소설리스트

신의 안배-5화 (5/60)

5화

황제의 얼굴에 미약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나는 당장 나가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으나 참았다.

이곳은 내 궁이기도 하지만 결론은 황제의 궁이니까. 아무리 커도 세 들어 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소파에서 자겠습니다.”

폭신한 침대를 버리고 덜 푹신한 소파로 가자니 발걸음이 안 떨어졌지만 그래도 가야만 했다.

여기에서 저 딱딱한 황제와 한 이불을 덮을 수는 없었다.

“농담이다. 편히 자. 난 이만 가 볼 테니.”

황제는 미련 없이 바로 돌아섰다.

내가 미약하게 한숨을 쉬자 황제가 눈치챘는지 나를 돌아보긴 했지만 그 시간은 아주 짧았다.

돌아설 때 미약하게 웃은 것 같기도 했는데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침대에 엎드리자 눈이 감겨 왔다.

청명한 하늘과 푸른 들판 그리고 청량한 공기가 페부 깊숙이 들어왔다.

이렇게 상큼한 공기를 마신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나 나는 물을 처음 만난 사람인 양 미친 듯이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때 누군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죠?”

하지만 웃는 소리만 날 뿐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미쳐 가나? 라는 생각을 했지만, 곧 나는 이것이 현실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꿈이구나.”

나의 혼잣말이 끝나자 또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는 그가 누군지 이번엔 알 수 있었다.

“이젠 제 꿈까지 찾아와 관음하시는 겁니까?”

비꼬듯 이죽거리는 말에 웃음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세상이 변했다.

푸른 호수가 넘실거리고 온갖 꽃들이 만발한 곳으로.

그런데 그 풍경이 나에게는 꽤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하늘이 하얀색이었으니까.

지구에서 현대사회에 살면서 미세 먼지로 인하여 하늘이 파랗다는 것을 잊은 지 오래지만, 어쨌건 나는 하늘이 파랗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이것이 곧 진리였다.

하늘은 절대 하얗게 보일 수가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뀐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마음에 드느냐?”

“네, 하나만 빼고요.”

“뭘 말하는 것이냐?”

“하늘이 파란색이 아니라서 아쉽습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고 신은 하하, 하고 웃었다.

아름다운 것을 봐서인지 날카로웠던 마음도 조금은 풀리고 있었다.

신 또한 하얗던 하늘을 파랗게 물들였다.

“마음에 드느냐?”

“네, 그런데 이곳은 어디입니까?”

“지구.”

“……?”

나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고 신의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이렇게 말하면 못 알아듣겠구나. 지구였던 곳이다. 이젠 생명이 남지 않아서 옛 순간 아름다웠던 것들을 이렇게 구현해 보고 있단다.”

신의 말끝에서 씁쓸함과 아련함이 묻어 나왔다.

그리고 나 또한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이 공간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아무도 안 남았습니까?”

“그래. 내가 인간을 좋아하긴 하는데 인간의 욕심은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어쨌든 인간은 본인들의 욕심으로 만들어 낸 물건에 종말을 맞이했으니까.”

그 말에 동의하긴 했다.

그러나 잠깐 든 생각은 왜 그때 갑자기 핵무기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는가 하는 것이었다.

신은 내 생각을 읽었음에도 대답할 의지가 없어 보였고, 나는 그런 그에게 어떻게 질문을 해야 원하는 답변이 나올까 하고 궁리했다.

“아직은 아니다.”

신이 내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

“그럼 언젠가는 이야기해 주실 겁니까?”

“그래. 네가 잘해 낸다면.”

내가 무엇을 잘해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신이 바라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그러나 일단 내가 지금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먼저였기에 나는 질문을 속으로 삼켰다.

그래, 아직은 아니었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자기 전에 나를 감싸고 있던 우울감도 거의 다 휘발되었다.

아마 신이 없애 준 것이라 생각하며 나는 욕실로 향했다.

처음에는 웬 여자들이 내 몸을 씻겨 준다기에 기겁해서 도망갔는데, 그 일을 거치고 나서야 이렇게 혼자 씻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이 방에는 나 외에는 아무도 허락하지 않았다.

궁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저 나의 예민한 성격 탓으로 돌린 것인지 그렇게 큰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씻고 혼자 옷을 입는 것이 처음엔 어려웠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적응을 했다.

나는 나의 적응력에 탄복하면서 산책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혼자 흥얼거리며 정원을 거닐고 있는데 웬 여인이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굳은 채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여인은 어제 아기와 함께 있던 여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여인은 나에게 다가오며 화사하게 웃었다.

예쁘다기보단 섹시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나는 굳어진 얼굴로 여인에게 인사했다.

“이런 놀라게 해 드렸군요. 저는 공자님과 함께 폐하를 모시고 있는 아홉 번째 후궁 신려입니다.”

특이한 이름이었다.

한국이었다면 저 이름이 특이하지 않았겠지만, 내 이름만 봐도 되게 긴 블리 연 가히 제나드 웰렌이었으니까.

“네. 무슨 일로?”

나는 내 소개를 해야 한다는 사실도 자각 못 한 채 굳어져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직설적이신 분이시군요. 그러면 저 또한 본론만 말할게요. 혹시 어제 저를 보셨나요?”

그녀가 순간 날카로워진 눈으로 물었다.

나는 왠지 보면 안 되는 것을 봤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어제 저 여인은 어떤 남자와 아이와 함께 꽃밭에서 놀고 있었다.

마치 한 가족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가족이라기보단 저 여인을 호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고? 그 남자는 호위 같은 복장으로 검을 차고 있었으니까.

황궁에는 아이가 없다.

황제가 아직 그 어떤 후궁에게서도 아이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대왕 또한 황제 외에 후계가 없었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황궁에 아이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제 아이를 보았다.

그런데 저 여인은 후궁이었다.

후궁이면 당연히 황제의 아이를 낳는 것이 맞다.

하지만 황궁에는 아이가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그 아이는 황제의 아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라는 소리였다.

물론 그 아이가 저 후궁의 아이라면 말이다.

“당신의 아이입니까?”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나왔다.

나는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저 물음이 아니라 못 봤다고 해야 했는데…….

“보셨군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눈앞의 후궁의 눈동자에 적의가 서리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못 본 걸로 하겠습니다. 저한테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요.”

나의 대답에 후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적의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제가 믿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궁 안이 전쟁터인 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 않나요?”

나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저렇게 단정 지을 거면서 묻는 의도를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여인에게는 폭력을 쓰지 않는 진정한 매너남이었다.

그것이 언어폭력이라 할지라도…….

“제가 그럼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이번엔 조금 짜증 나는 표정을 지었다.

“죽어 달라고 하면 죽어 주실 거예요?”

또 욕이 나왔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죽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거야 원 무서워서 길을 잃지도 못할 것 같았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영원히 그렇게 살 거고요. 그리고 후궁님, 제가 지금 당신과 같은 후궁의 위치에 있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공작가의 아들입니다. 당신이 아까 불렀던 그 공자요. 그러니까 되지도 않는 협박질은 하지 마십시오.”

내 말이 끝나자 후궁에게서 이번에는 살기가 튀어나왔다.

물론 마지막쯤에는 살짝 짜증 어린 말로 이야기하긴 했지만, 저렇게 살기를 드러낼 줄은 몰랐던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나는 당신 같은 것들이 제일 싫어. 같잖게 부모의 기세를 믿고 계급을 나누는 것들. 언젠간 후회하게 될 거야.”

후회, 나는 충분히 후회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아마 지금보다 더 후회하는 삶은 없을 것이었다.

그랬기에 저렇게 화를 내는 후궁을 받아 줄 여력이 없었다.

“미안한데 내가 후회하고 말고는 내가 정해. 당신이 후궁의 신분으로 다른 사람의 아이를 낳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 그리고 황궁에서 다른 남자 아이는 좀 그렇지 않나? 아니면 황제의 아이인데 다른 후궁들에게 죽기라도 할까 봐 숨겨서 키우는 거야?”

말하고 나서야 문뜩 깨달았다.

황궁 안의 일을 황제가 모르는 것 같지는 않고 황제가 알면서 묵인한다는 것은…… 나는 후궁을 바라보았다.

후궁은 홱, 하고 돌아섰다.

나는 사실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먼저 목숨을 운운한 건 저 여인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서리가 내린다는 오뉴월이 지금인 것만 같았으니까.

내가 지친 얼굴로 들어가자 시종으로 보이는 이가 급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황제가 왔다는 말에 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응접실 쪽으로 향했다.

“어디 갔다 오지?”

싸늘한 물음이었다.

황제의 눈은 나를 갈가리 찢어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감정 소모를 더는 하고 싶지 않아 곧이곧대로 뱉었다.

“산책이요.”

황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누굴 만났나?”

“여자요.”

사실이었으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곧이어 나는 아까보다 더 화가 난 황제의 얼굴을 마주했다.

“뭐라고?”

목소리 또한 더욱더 가라앉아 있었다.

왜 저런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내가 잘못한 일은 없었다.

“다시 말해 봐.”

“왜 그러십니까?”

나는 짜증 난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도 내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잔뜩 미움을 받고 왔다.

그런데 쉬지도 못하게 생뚱맞은 화를 감당하고 있으니, 아무리 나라도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뭘 잘했다고 나한테 화를4. <빙.빙.빙> 오찬 작가 149-153화 내용 관련 소통

내는 것이지?”

“또 잘못한 건 뭡니까?”

“뭐? 잘못한 것이 없다고?”

황제는 화가 극에 다다른 듯 목소리가 더욱 가라앉아 있었다.

“예. 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제가 뭘 잘못했길래 이렇게 바람난 부인을 잡는 것인 양 닦달질을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막말로 폐하와 제가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 진짜로 부부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진짜로 다른 사람을 만나도 폐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요. 제가 다른 사람을 만나서 폐하의 흉이라도 봤답니까. 도대체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솔직히 내가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바람난 부인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데, 오늘 내 흑역사의 날일 것 같다.

후궁 주제에 부인이라니. 그럼 황후란 소린데, 언감생심 그런 생각은 꿈꾸지 않았다.

나는 괜히 황제가 오해할까 겁이 났다.

“바람을 피웠다고? 나 아닌 다른 이와? 그것도 여인과?”

황제는 분명 나를 보고 말하는 것 같은데 대화의 핀트가 어긋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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