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황제는 눈시울을 붉힌 채로 배신당한 사람인 양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바람이란 자고로 사귀거나 결혼하거나 어찌 됐건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전제하에 귀결되는 단어이다.
그러니 지금 나와 황제 사이에는 바람이란 단어가 나와선 안 되었다.
나는 남자이고 또 황제도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황제 자신도 후궁들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들었다.
후궁은 지위만 후궁이지 결론은 인질이었기에…….
“왜 화를 내십니까.”
황제가 나 자신보다 더 크게 화를 내니 내 화가 사그라들었다.
원래 싸울 땐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고 했는데, 그것보다 더 위인 건 상사였다.
상사를 이기려 들 때는 사표를 낼 각오가 붙어야 했기 때문이다.
미친 황제는 내 상사였고 그는 내 사표를 받아 주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내 화를 삭이고 말았다.
“왜냐고?”
황제는 물음표 살인마라도 된 듯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난 정말로 황제가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황제는 나에게서가 아니라 이미 화가 난 상태에서 나에게 왔을 수도 있었다.
나는 문득 내가 너무 불쌍해 보였다.
“네. 폐하는 제가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화가 나 계셨습니다. 저는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려 주시고 화를 내더라도 내십시오. 뭐 폐하는 하고 싶은 대로 하겠지만요.”
마지막 말은 그냥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쏘아붙이고 나니 황제의 얼굴이 조금 풀어져 있었다.
황제는 한참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인을 만나고 싶나?”
나는 한숨이 나왔다.
여인을 만나고 싶냐고? 그래, 만나면 좋을 것 같긴 하다.
생물학적으로 나는 여자를 좋아하도록 태어난 남자이니까. 그러니까 성적으로 여인이 끌리냐고 묻는다면 예스였다.
하지만 지금 연애를 목적으로 여자를 만나고 싶냐고 묻는 거라면 노였다.
왜냐고? 나는 일단 법적으로 유부남이었고 도덕적으로 문제 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배우자가 남자라고 해도 이건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황제의 이런 질문은 나에겐 조금은, 아주 조금은 기분 나쁜 의도로 들려왔다.
“더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나는 싸울 의도가 없었기에 담담히 말했다.
황제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는 입술을 혀로 한 번 핥고 한숨을 쉬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와 부부의 연을 맺은 걸 후회하냐는 뜻이야.”
한숨과 함께 나온 말은 정무 회의에서 대신의 목을 아무렇게나 쓸던 황제의 말이라고 하기엔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폐하, 저한테 선택권이 있었습니까? 폐하의 질문엔 오류가 너무 많네요. 그럼에도 질문에 답을 드린다면 아니요, 입니다. 선택한 것이 제가 아닌데 후회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부디 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불경하고 죄송한 말씀인데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피곤합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드렸으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
황제는 대답 없이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어느 순간 황제도 공격력이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기력이 다 빠진 나는 황제가 어서 빨리 나가 줬으면 좋겠다고 바랐지만, 황제는 나가는 대신 소파에 다가가 앉아 버렸다.
“폐하, 나가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전 좀 자겠습니다.”
나는 황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그대로 침대를 향해 직행했다.
남녀가 쌍으로 나의 기를 싹 다 빼 먹었기에 나는 신이 와서 뭐라고 한대도 에너지 보충이 시급했다.
나는 침대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어 버렸다.
잠들면 신이 와서 피로를 증가시킬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나는 꿈도 꾸지 않고 아주 잘 잤다.
착각이었으면 좋으련만 신은 내 생각까지 들춰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긴 했으나 정신 건강에 해로웠기에 깊게 파고드는 것을 그만두었다.
“으음. 잘 잤네.”
꿈도 안 꾸고 잤더니 찌뿌둥했던 몸과 피로했던 정신이 맑아짐을 느꼈으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잠들기 전 그대로인 황제를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내가 잠들기 전 앉았던 소파에 그대로 죽치고 있었다.
아까와 다른 점이라면 그가 서류를 보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잘 잤나?”
“네, 폐하. 돌아가지 않으셨군요.”
“그래. 황궁의 모든 것이 내 것이니까.”
네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도대체 왜 이 시간까지 황제가 안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은 매우 어두워 있었다.
“혹시 제게 더 물어볼 게 있으신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의 앞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식사부터 해야 할 것 같군.”
전부터 황제는 꽤나 식사에 많은 집착을 했다.
많이 먹으니 당연했다
혹시 황제는 미식을 즐기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곧 지워 버렸다.
왜냐하면 어떻게 봐도 그의 취미는 남의 피를 보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저는 생각이 없습니다.”
정말 식사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나의 대답에 황제의 한숨이 바로 들려왔다.
“황궁에서는 아픈 것도 불충이야. 더더욱 황제를 모시는 후궁이 아프면 안 되지. 그러니까 안 먹는 건 안 돼. 명령이야.”
“네네.”
나는 반항하는 대신 황제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여기에서 더 논쟁을 했다가는 또다시 기력이 소진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종을 흔들자 음식들이 침실로 착착 들어왔다.
식당으로 향하기 위해 일어섰던 나는 그 광경을 보곤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당연히 그 자리에 있던 서류만 치운 상태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물론 식사하는 내내 나를 빤히 바라봤기에 안 그래도 없던 입맛이 더욱더 없어져 버렸다.
식사가 끝나고 황제는 자신의 궁으로 돌아갔다.
또다시 함께 자자, 라는 헛소리를 하면 궁을 나가 버리려고 했는데, 다행히 그런 의미 없는 싸움을 안 해서 나는 매우 기뻤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모두가 잠드는 밤이었으니까.
엥?
눈을 뜨자마자 나는 매우 당황했다.
그리고 곧 얼굴을 찌푸린 채 침대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미친 황제가 아침 댓바람부터 내 침실에 와 있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어기적어기적 황제에게 말했다.
“쳐다도 안 보고 아침 인사를 하다니 불경하군.”
황제는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아주 상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불경하고 폐하는 무례하십니다.”
나는 불퉁하게 내뱉고는 아차 하는 얼굴로 황제를 바라봤다.
하지만 황제는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나의 반려와 아침을 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기다렸더니 기분이 나쁘지 않군.”
나는 그의 말에 피식하고 웃었다.
그의 반려는 나 빼고도 29명이나 있었으니까.
“네, 그러신 것 같습니다. 그럼 오늘에야말로 폐하의 반려분들을 다 볼 수 있겠군요. 유감스럽게도 얼굴을 제일 적게 본 저를 기다리신 은혜는 하해와 같습니다만 다른 분들에게도 가 보십시오.”
나의 비꼼에 황제는 멈칫했지만 굳이 인상을 쓰지는 않았다.
“그래. 그랬었지. 그런데 나는 그 많은 이들 중 오직 그대와만 식사를 함께하고 싶다.”
그래. 아무 힘도 없는 내가 거절할 수가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오늘도 황제와 식사를 했고 하루 종일 함께 있었다.
며칠 동안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은 황제의 옆에는 군부대신만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보좌관들보다 군부 쪽이 훨씬 많이 드나들었다.
물론 시종장도 가끔 오기는 했지만, 군부 쪽보다는 확실히 오는 횟수가 많지 않았다.
전쟁이라도 하려나 보네. 어쩌면 소문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이라. 여기 전쟁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려나. 칼이나 창으로 싸우나? 나는 후궁이니까 전쟁엔 안 참가하겠지?
여러 생각을 하는 와중에 문득 지구의 전쟁이 생각이 났다.
핵이 날아다녔고 지구는……. 지구처럼 멸망하지는 않겠지.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나는 애써 괜찮은 척하려고 심호흡을 시작했다.
그때 황제가 나에게 다가왔다.
“괜찮나?”
서류를 보며 보고를 받는 줄 알았던 그가 다가오자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그에게서 향을 피울 때의 냄새가 났다.
나무를 태우는 것만 같은 냄새를 맡으니 생각보다 빨리 안정감이 찾아왔다.
“네, 괜찮습니다.”
“몸이 불편하면 눕도록 해.”
황제는 창가에 앉아 있는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같은 남자에게 번쩍 들어 올려지는 일은 유쾌하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수치스럽진 않았다.
하지만 곧 나는 내 생각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보고하던 군부대신이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차를 내오던 시종장은 문을 연 채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같은 남자가 붙어 있는 꼴이 아름다울 순 없겠지. 더더욱 같은 남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더욱더 경악할 일이겠지.
나는 다 안다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지만, 나의 눈빛을 받은 두 사람은 나를 외면해 버렸다.
나는 매우 창피하고 억울했지만 황제에게 항의는 하지 못했다.
다만 소심한 복수 삼아 숨이 막히라고 목을 꽉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황제의 목덜미와 얼굴, 그리고 귀가 갑작스럽게 붉어졌다.
나는 그가 숨이 차서 그런 줄 알고 바로 힘을 풀었다.
그때 황제의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아까처럼 해도 된다.”
순간 나는 멈칫했다.
“그대가 싫다면 안 해도 되고…….”
지금까지 당당하던 황제와는 달리 목소리가 힘이 없는 데다가 조금 떨리기까지 했다.
그의 모습을 보고 든 생각은 혹시 이놈은 아픔을 즐기나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 속으로만 생각했다.
나는 황제의 목에 두른 팔을 조심스럽게 풀 수밖에 없었다.
“그만 자.”
황제는 그 말만 남긴 채 바로 방을 나가 버렸고, 얼빠져 있던 두 사람도 서류를 챙겨 급히 황제를 따라갔다.
며칠 만에 나의 방에 평화가 찾아왔지만, 마음이 조금 찝찝해졌다.
“잘 지내는 것 같구나.”
황제가 가니 신이 찾아왔다.
깜짝 놀란 가슴을 달래며 나는 목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관음증은 고칠 생각이 없으십니까?”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굳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황제나 신이나 말이 안 통하는 것은 똑같았다.
위에 앉아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자기중심적이었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어도 고치는 것은 아랫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래요. 그럴 필요는 없죠.”
“그렇지?”
신의 웃음소리와 함께 매우 부드러운 바람이 나를 지나쳤다.
나는 그 바람에서 신이 진심으로 웃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냥. 네가 잘하고 있나 보러 왔다.”
“혹시 제가 히어로입니까? 보통 소설에서는 빙의하면 세계를 구하고, 그러고 그를 위해 모험도 하고, 오러도 생산하고, 정령과 소통도 하고 막 그러던데. 저도 그런 거 해 주시려고 그러시는 거예요?”
“풋.”
신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닌 걸 압니다. 비웃음 소리는 기분이 나쁘군요. 그럼 도대체 왜 저에게 이런 관심을 가지시는 겁니까? 신이 할 일이 없습니까?”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야. 그저…… 잘 지내는지 보러 온 거야. 그리고 히어로라. 그거 좋겠구나.”
신의 들뜬 목소리에 찬물을 끼얹듯 나는 매우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놀리지 마십시오. 저는 여행도 별로고 정령도 별로입니다. 또한 몸을 움직이는 것도요.”
나의 진지한 목소리에도 신은 웃기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