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몇 날 며칠 동안 상황은 똑같이 흘러갔다.
신은 계속해서 나에게 왔고 황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시간이 지나는 동안 황제와 신은 즐거워하는 듯한 모양새였으나 나에겐 그야말로 짜증 나는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이 갑자기 물었다.
“그래 황제와 가까워졌느냐?”
나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글쎄요?”
신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으나 나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왜 가까워지지 않는 것이냐?”
“제게 득이 될 것이 있겠습니까?”
“왜 득 될 것이 있을 수도 있지.”
“지금은 없습니다. 여자 황제라면 아양을 떨었을 수도 있겠군요.”
내 말에 신이 멈칫거렸다.
“여자인 것이 중요한 것이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와 내가 친구가 될 위치가 아닌 다음에야 여자이면 더욱 쉽지요.”
내 말에 신은 매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내가 여자가 좋다는데 신이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짓는 신에게 물었다.
“아니. 그저 너에겐 여인이 보이지 않았는데 찾기에.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가 보구나.”
신의 말이 영 찝찝했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에 그냥 넘겼다.
“그런데 왜 계속 황제랑 잘 지내냐고 묻는 겁니까?”
다른 것들도 다 궁금하긴 했지만 그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아직 아니고 네가 준비되면 알려 줄 거야.”
저 신은 도대체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뭐든지 나중에 말해 준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오는구나.”
신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었고 조금 있다 황제가 들이닥쳤다.
서류와 보좌관과 시종장을 줄줄이 달고 내 침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황제는 어느 순간부터 매일 내 침실로 출근하고 있었으며, 궁 안에서는 이상한 소문들이 돌기 시작했지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피곤이 아침부터 몰려올 뿐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폐하.”
나는 구겼던 인상을 펴며 인사했다.
“얼굴이 좋지 못하군. 밤에 잠을 잘 못 잔 건가?”
너 때문이에요, 라는 말이 나왔지만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오늘 날씨가 좋지 않나?”
도통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던 나는 그냥 쳐다만 보았다.
뒤에 있는 보좌관과 시종장 또한 의아한 기색을 비쳤지만 금방 갈무리했기에 나만 황제를 쳐다보았다.
역시 대답할 사람은 나뿐이었다.
“네, 좋습니다.”
“나와 산책하겠나?”
나의 착각인지 모르겠으나 매우 조심스러워 보였다.
그의 귓불 또한 매우 붉어져 있었다.
쑥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면 화난 것이라 판단이 되는데, 황제의 화를 돋울 만한 일을 하지 않았으니 쑥스러운가 보다 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소름이 돋아 생각의 꼬리를 잘라 냈다.
“네. 좋습니다.”
황제의 팔이 내 앞에 머물렀다.
나는 혹시나 하고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역시 에스코트를 하려고 했는지 내가 팔을 올리자마자 황제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걸음을 뗐다.
뒤늦게 팔을 빼려고 했지만 이미 타이밍이 지나 그대로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점점 궁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폐하. 이곳은 제 궁이 아닙니다만.”
“알고 있어. 잠깐 갈 데가 있다.”
그러시겠죠. 어차피 황제의 마음대로 할 테니 나는 그냥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황제가 멈칫하더니 걸음을 멈췄다.
“나랑 함께 가는 것이 불편한가?”
당연하지.
“아니요.”
마음속 말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그대가 불편하면 안 가도 되는데. 그래도 함께 가 줬으면 한다.”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착각이 아닌 것 같았다.
황제는 분명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마음이 이상하게 술렁거렸다.
심장 깊숙한 곳에서 쿵쿵거리는 것이 온몸으로 퍼져 나갈 기세였다.
나는 서둘러 그것을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먼 곳을 응시한 채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불편하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 오히려 좋은 축에 속합니다.”
나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황제가 안심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행이군. 혹시라도 힘들거나 하면 말해 줬으면 좋겠다. 혹시라도 무리하면 안 되니까. 안 그래도 자주 아픈 것 같은데…….”
“네, 알겠습니다.”
황제는 계속 나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참을 걷다 보니 내 앞에 화원이 나타났다.
그것도 아주 커다랗고 넓은 화원이었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꽃향기가 물씬 풍겨 왔다.
사랑스러웠던 나의 동생이 좋아하는 꽃이 이렇게 많은 곳에 있자니 마음이 벅차올라 목소리가 떨려 왔다.
“마음에 드나?”
“네. 아름답습니다.”
나는 꽃향기에서 그리운 이들의 내음을 잠시라도 맡을 수 있다는 것에, 이렇게 눈을 감으면 아직도 가족들이 내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아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런!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빨리 완성하라고 할 걸 그랬군.”
황제의 말에 나는 놀란 얼굴로 돌아섰다.
“이곳을 만드셨습니까?”
“그래. 그대가 깨어난 후 만들라고 했다. 내가 그대가 마음에 들어서, 그대가 웃어 줬으면 해서, 나에게서 두려움이 아닌 애틋함을 느끼길 바라서…… 그래서 선물을 준비했다. 다행히 마음에 들어 해서…… 이런!”
나는 황제의 말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러니까 황제는 정말로 나를 이성으로서, 아니 같은 동성이니 이성은 말이 안 되지만 정말로 그는 나를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묻어 두고 싶어 머리를 굴리고 있는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를 좋아해. 그대가 온 후부터 내 세상이 밝아졌어. 그대는 암흑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하겠지. 나는 이젠 그대 없는 삶을 생각하기도 싫다.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 줘. 나에게 기회를 달라는 말이다.”
“저에게 성적으로 끌린다는 말씀입니까?”
“그것까지 포함해서 그대의 모든 것을 원한다.”
황제의 귀와 목뒤가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눈은 정염으로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이, 무슨 희한한 부조화란 말인가? 수줍어하면서도 더 이상의 것을 원한다는 눈빛은 오히려 나를 부끄럽게 했다.
황제가 한 걸음 한 걸음 나에게로 다가왔고, 나는 그의 걸음 수만큼 멀어졌다.
안 그러면 당장에라도 그에게 먹힐 것만 같았다.
“후우”
황제의 긴 숨소리가 나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나 또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순식간에 골치 아파졌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거절할 말을 생각할 시간이.
황제는 나에게서 물러났다.
이렇게 인간이 없는 곳에 황제와 그 수하들만 있는 곳에서 거절의 말을 입에 담지 않은 것은 신의 한 수였다.
황제가 순순히 물러난 것만 봐도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방증이 아니겠는가.
“오해하지 마. 그대가 거절의 말을 했더라도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을 거야. 나는 그대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거든. 그대가 믿든 안 믿든 이 말은 진심이다.”
폭군의 입에서 진심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다니 참으로 놀라웠다.
“궁에 돌아가 쉬고 싶습니다. 참고로 폐하의 도움은 받지 않겠습니다.”
아까처럼 붙어 있고 싶지는 않았기에 당차게 말하고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몇 걸음 지나지도 않아 나는 황제의 품에 다시 안착하고 말았다.
이 비루먹은 몸뚱이는 너무 놀란 나머지 다리의 힘이 풀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내가 불편하더라도 궁까지만 참아 줬으면 좋겠군. 그대가 다치는 일을 두 손 놓고 지켜볼 수는 없으니. 인간은 생각보다 많이 연약하니까.”
황제는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주아주 연약한 이를 안듯이 조심스럽게 꼭 안아 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엄청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그저 아무것도 보지 않을 심산으로 황제의 옷에 머리를 박아 버렸다.
“그대는 정말이지. 하아.”
황제의 중얼거림과 함께 곧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 지난 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궁에 도착했나 싶어 내리려고 했다.
“가만히 있어.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다.”
황제는 나를 자신의 품속으로 더욱더 끌어안았다.
힘겹게 겨우 머리를 돌려 상황을 마주한 나는 곧 그것을 후회했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1후궁전.”
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크게 벌렸다.
1후궁이 누구인가. 그녀는 차기 황후로 지목되고 있는 인물이다.
제국보다는 힘이 약한 왕국이지만, 그래도 다른 주변 왕국들에 비해서는 제법 강자로 지목되고 있는 왕국의 1왕녀였다.
그런 그녀가 혼맹을 다지느라 팔려 오다시피 제국에 왔지만, 그래도 그녀의 친정은 귀족이 아닌 왕족이었고, 후궁 중 여러모로 훌륭한 이를 황후로 뽑는 제국에서 그녀는 독보적인 황후 후보였다.
그랬는데 그런 그녀를 이런 꼴로 보게 되다니 참으로 수치스러웠다.
나는 첫인상을 굳이 치정으로 마주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왜 이곳으로……?”
“그대의 궁에서 내 궁으로 가는 길에 있었을 뿐이다.”
황제는 아주 산뜻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왜 제가 폐하의 궁에 갑니까?”
“내 궁이 그대의 궁보다 가까우니까. 그리고 해야 할 일도 있다.”
나는 순간 어이가 탈출했다.
황제는 후궁의 처소에 잘 가지 않는다고 들었다.
아니, 첫날밤만 보내고 아예 안 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은 궁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랬던 그가 마지막 후궁의 처소에는 뻔질나게 드나든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남색을 밝힌다는 소문은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밤을 함께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모든 이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황제의 처소에 후궁이 들어가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황후가 거의 내정된 상태에서 다른 후궁을 황제의 처소에 들인다는 것은 그에게서 후계를 보거나 황후로 앉힐 의사가 있다는 말이었다.
지금의 나는 남자니 후사는 안 되고 황후로 앉힐 의향이 있다고 밝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공공의 적이 될 수도 있었다.
“잠시, 내려 주십시오.”
“안 된다. 그대는 몸이 약하니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군.”
“절대 싫습니다. 모든 후궁들의 적이 되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절대 갈 생각이 없으니 저를 여기 내버려 두고 폐하 혼자 가십시오. 저는 여인들에게 미움받기 싫습니다.”
순간 황제에게서 냉기가 퍼져 나왔다.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 말했나 싶어 걱정스러운 와중에도 슬슬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 같아 서둘러야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심정은 눈곱만큼도 안 알아주는 황제는 팔에 더욱더 힘을 주었고, 나는 그에게 안긴 채 우아한 목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태양이 더욱 환하게 밝히기를.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1후궁 인사드립니다.”
나는 삐걱거리는 목을 애써 돌려 그녀를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고개를 숙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를 맛봐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