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1후궁은 고개를 드시오. 그저 지나가는 길이니 신경 쓰지 말고.”
황제의 말에 치마를 쥔 그녀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폐하. 내려 주십시오.”
“그대는 다리에 힘이 없으니…… 으음.”
황제의 입에서 요상한 신음 소리가 났다.
나는 서둘러 그의 배를 꼬집었던 손을 떼었고 주위는 더욱더 얼어붙었다.
나는 황제의 귀에 대고 속사포처럼 다다다 말을 뱉어 냈다.
“내려 주지 않으면 다신 폐하와 얼굴을 마주하지 않을 것이며, 강제로 얼굴을 보게 한다면 이번엔 진정으로 제 시체를 보게 해 드릴 것입니다.”
벌겋게 달아오르던 황제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협박을……!”
“그러니까요. 얼른 내려 주십시오.”
황제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화를 참고 있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1후궁에게로 다가갔다.
“1후궁 마마께 인사드립니다. 함께 폐하를 모시게 된 30번째 후궁입니다.”
이곳에는 이름이 없다.
후궁이라는 직책만 있을 뿐. 그리고 후궁끼리는 권위가 비슷했다.
왜냐하면 품계가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후궁은 공공연한 황후 내정자였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에게 예의를 조금 더 지키는 편이었다. 후궁끼리라도.
물론 나 또한 주워들은 말이었고. 미래의 황후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것보다 앞서 저렇게 아름다운 미인에게는 미움을 받기 싫었다.
“감히 내 앞에서 바람을 피우는 건가?”
나의 상냥한 웃음을 오해한 이가 뒤에서 서슬 퍼런 얼굴로 따지고만 있지 않다면 참 좋았겠지만 말이다.
“폐하?”
1후궁은 무슨 상황인가 싶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란 말이 없음에도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혹시라는 희망을 품었다가 자신에게로 향해 있지 않은 감정을 깨닫고는 싸늘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그녀의 희망 어린 얼굴은 바로 앞에 있던 나밖에 보지 못하였다.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닥쳐라. 감히 그 간교한 얼굴과 혓바닥으로 나의 사람을 꾀어낼 셈인가?”
황제는 살기를 숨기지도 않고 1후궁에게 물었다.
그녀는 몸을 떨면서도 이를 악물고 살기를 견뎌 내고 있었다.
대장부라는 말이 어울리는 그녀가 이 세계가 아닌 지구에서 태어났다면 분명히 큰 것을 이루어 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여인이 이룰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세상이었다.
“폐하 입 좀 다무십시오.”
얼굴도 기개도 나는 1후궁이 마음에 들었으나 황제는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미 그녀에게서 나에 대한 적의가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이왕 틀어졌으니 그녀와는 최대한 접점을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후사를 이를 몸도 황후가 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니까.
“나에게 한 말은 아니지?”
뒤에서 황제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에게 한 말입니다. 그러니 입 좀 다물어 주십시오.”
“둘이 있는 시간을 방해했다고 나에게 화내는 것인가?”
이놈은 또라이가 틀림없었다.
말을 도통 들어 먹질 않았다.
나는 치미는 화를 가라앉혔다.
방금 전에는 그래도 황제와 1후궁만이 내가 황제에게 닥치라고 한 말을 들었으나 지금 소리를 지르면 그거야말로 황족 모독죄로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폐하 방금 전까지 저와 함께 있던 사람은 폐하이십니다. 그런데 무슨 해괴한 말씀이십니까?”
“그대가 나한테는 차갑다가 고작 여인이라는 이유로 웃지 않았더냐.”
기가 막혔다.
그거야 시커먼 황제보다는 어여쁜 1후궁이니까 웃은 것일 뿐,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하면 바람이라는 말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질투가 아니라 이쯤 하면 집착이었다.
“제 궁으로 가겠습니다. 폐하와 있다가는 화병 걸려 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폐하, 저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람은 당치도 않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걸음을 옮기자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검을 들고 이죽거리는 황제가 서 있었다.
미친놈이라는 말은 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후궁에게 검을 들이미는 미친놈이라니.
서둘러 황제에게 다가간 나는 황당한 말을 들어야 했다.
“싹을 자르면 나에게 오겠지.”
“미치셨습니까?”
“다들 그렇게 말하곤 하지. 그런데 뭐가 문제지?”
황제는 정말로 순수한 아이처럼 말간 눈을 하고 나에게 물었다.
“검을 치우십시오. 그리고 저 다리 아프니 저를 안고 가 주십시오.”
나도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미래의 황후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것보다 왕녀를 죽였다간 혼맹이 위태로워질 터였다.
물론 아무런 힘 없는 내가 걱정하기에는 터무니없지만, 안 그래도 여러 나라를 대상으로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 들었는데, 제2의 제국이라는 곳의 왕녀를 건드리면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면 내 안일한 일상이 위협받을지도 모르니 나는 황제의 살생을 막아야만 했다.
“오늘뿐이다. 눈감아 주는 건.”
황제는 한숨을 쉬며 검을 보좌관에게 넘긴 채 나를 들어 안았다.
눈빛은 형형했고 낯빛 또한 찬바람이 불었으나 나를 안아 드는 손길만큼은 부드러웠다.
나는 그제야 좋아한다는 마음의 무게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폐하.”
“그래.”
“폐하에게 바람이란 무엇입니까?”
“그대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품는 것이지.”
“아까는 그러지 않았는데 바람이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대는 여인을 좋아하니까.”
내 말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강타했다.
더불어 철옹성 같은 황제의 표정에서 두려움이라는 것이 스쳐 지나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여인을 좋아하지만. 여인이라고 다 좋다 하는 지조 없는 놈은 아닙니다.”
“그렇겠지. 그저 나는 가능성을 남기기 싫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폐하께 가지는 않을 텐데요.”
“안다. 아는데…… 아는데도 그것밖에 할 수 없으니까.”
황제는 지독히도 외로운 얼굴로 우울하게 중얼댔다.
나는 처음으로 황제에게 불쌍함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폐하.”
“그래.”
“폐하는 저 외에도 후궁이 많은 것은 알고 있습니까?”
황제가 걸음을 멈췄다.
“나는 그대 외에는 마음을 주지 않는다.”
피에 미친 살인마. 폭군을 비롯한 수많은 악명을 가진 황제가 마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그였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는 넘기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그의 태도였기에.
“폐하의 곁에 남자 또한 많습니다. 저기 폐하의 뒤를 따르는 기사들도 다 남자이지요.”
황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폐하의 논리대로라면 저는 궁 안에 모든 이들을 시기하고 질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황제의 얼굴에 곤란함이 맴돌았다.
“제가 폐하의 마음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당신은 저 한 사람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사실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머리를 더 굴려야 했지만. 인생은 타이밍이다.
지금이 거절하기에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손에 천하를 쥐고 있는 이라도, 그것이 나에게 독이 든 성배와 같다면 나는 받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 남은 인생을 잘 살아야만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궁중 암투는, 더더욱 여인들과 하는 궁중 암투는 적극 사양이었다.
“그러니 폐하. 당신의 궁이 아닌 제 궁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저는 절대 당신에게 후계를 안겨 줄 수 없는 몸이고, 제가 만약 당신과 같은 마음을 품어 혹여라도 후계를 안겨 주는 여인을 질시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황후의 자리는 더더욱 사양이니. 폐하, 돌려보내 주십시오.”
황제는 나를 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우울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단장.”
“네, 폐하.”
“편히 모시거라.”
“존명.”
기사단장이 나를 안아 들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나를 옮겼다.
나는 무사히 나의 궁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한동안 황제의 발걸음이 끊겼고, 신의 음성 또한 들리지 않았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신은 황제와 관련하여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
그런데 계속 때가 아니라고 한다.
궁금한 한편으로는 알고 싶지 않은 기분을 느끼며 느긋한 산책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저 여인은 껄끄러운데…….”
멀리에서 안 좋은 기운을 풍기며 한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궁에서 가장 껄끄러운 여인이었다.
“안녕하세요, 공자님.”
이 궁에서 나를 후궁이라고 부르지 않고 공자라고 부르는 이 궁에서 유일하게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홉 번째 후궁 신려였다.
“네 오랜만입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오한이 들어 마지못해 인사했다.
“오늘도 신수가 훤하시군요.”
저 여인은 저번부터 참 나를 적극적으로 싫어하고 있었다.
적의 또한 숨기지 않은 채로 말이다.
“우리의 오해가 아직 풀어지지 않았나 보군요. 아직 저를 싫어하시는 것을 보면.”
“저런. 더욱 굳건해졌지요. 도대체 공자는 얼마나 안하무인으로 자라셨으면 혼자서 시작도 끝도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시나요?”
먼저 찾아와서 시비를 거는 꼴이 못마땅했지만 굳이 싸울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저렇게 날을 세우는 이유가 자식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드니 오히려 안쓰러워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찾아온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녀는 나를 한참이나 보더니 심호흡을 했다.
“1후궁 마마께서 만나고 싶어 하세요.”
그녀는 같은 후궁인 1후궁에게 경어를 사용했다.
물론 다들 그러고 있긴 했지만 같은 후궁이 직접 경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니 새삼 1후궁의 위세가 직접 다가왔다.
“저를요? 그런데 왜 굳이 당신을 통해서죠?”
그녀의 눈빛이 새삼 더욱 뾰족해졌지만 나는 무시했다.
“내가 당신과 먼저 만난 걸 알고 계셨어요. 그리고 나는 공자님이 그녀와의 만남에서 저와의 약속을 지키신다면 오해를 풀도록 하겠어요.”
말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굳이 내가 말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솔직히 궁에 처음 온 내가 봤는데, 다른 후궁들이 모른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후궁들은 진짜 몰라요.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요. 궁 밖을 벗어난 것이.”
그제야 왜 그녀가 나에게 그렇게까지 싸늘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조심스러운 일이면 좀 더 숨겼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언제 만나면 되죠?”
“지금 함께 가면 돼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1후궁의 의도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물론 첫 만남이 좋은 만남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적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황제가 내 궁에 발길을 뚝 끊었다는 것을 알 테니 혹시라도 좋은 만남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