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1후궁전에 도착하니 몇 명의 후궁들이 더 있었다.
1후궁은 마치 황후가 된 것인 양 고고하게 앉아 있었다.
지금 나의 위치는 마치 청문회에 온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블리 연 가히 제나드 웰렌입니다.”
이미 친해지는 건 물 건너간 것 같기에 싸늘한 얼굴로 인사했다.
사실 후궁이니까 제나드 가문의 성을 쓰면 안 되었지만, 이 제국에서 황제와 같은 성을 쓸 수 있는 이는 오직 황후와 적통뿐이었기에 후궁들은 원래의 성을 쓰고 있었다.
그 말인즉 아직 후궁끼리의 서열보다 가문의 서열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물론 1후궁은 제법 힘이 있는 왕국의 왕녀였기에 저렇게 군림하는 것도 가능했고, 나 또한 이 제국의 하나뿐인 공작가이자 충신이며 제국의 검인 가문이었기에 이런 자리에도 절대 주눅 들 일이 없었다.
물론 아름다운 여인들의 얼굴에서 저런 싸늘한 눈총을 받는다는 것은 절대 기꺼운 일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공자님, 만나서 반가워요. 앉으셔도 됩니다.”
1후궁은 나를 후궁이 아닌 공자라 칭했다.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저 말은 결국 내가 황후가 될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경고였다.
참으로 귀여운 여인들이었다.
나는 절대로 황후 따위가 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나도 이런 기분 나쁜 자리를 마련한 그녀들에게 반발심이 들었다.
“왕녀님, 또 뵙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나는 정답게 인사했다.
나 또한 그녀를 후궁이 아닌 왕녀라 칭하면서…….
방 안에 정적이 앉았다.
“처음 보는 영애들도 계시는군요.”
정적이 내려앉든 말든 나는 싱긋 웃으며 내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엉덩이를 가져다 붙였다.
나를 먼저 공자로 칭한 것은 그녀들이었으므로 다들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결국 이 자리는 후궁이라는 같은 품계가 아닌 가문이라는 서열이 존재하는 만남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저를 불러내셨습니까?”
나는 삐딱하게 앉은 채 삐딱한 얼굴로 물었다.
전이었다면 입에 칼을 물고 나를 갈기갈기 찢는 말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그저 고통을 감수하며 그냥 묵묵히 끝날 때를 기다렸겠지만, 가족을 잃은 나는 조금의 틈도 내어 줄 수가 없었다.
이미 나의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서 단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회생 불가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공자님과 티타임을 가지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청을 드린 거예요. 뭔가 오해를 하시는 게 아닌지.”
나와 마주 앉은 여인이 입을 열었다.
나 또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아주 오만하고 당당한 눈빛으로, 여기 앉은 이들 중에 내가 가장 고귀하다는 생각으로.
“그렇군요. 저는 혹시라도 여러분들이 제 기를 눌러 주려고 부른 줄 알았습니다. 오해를 길게 끌지 않아 다행입니다.”
전혀 오해를 풀지 않았다는 얼굴을 하고 나는 싱긋 웃었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래 봤자 예쁜 꽃이 구겨진 것이어서 이쁜 것은 변함이 없었다.
“공자님께서는 폐하와 몹시 친해 보이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폐하와 밤을…… 흠흠 보내셨나요?”
무례한 질문을 던지면서 무례라는 자각은 드는지 몇 번이고 큼큼거렸다.
물론 눈은 몇 번이고 1후궁 쪽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글쎄요. 제가 여러분의 궁금증을 풀어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답변의 주인이 제가 아닌 것 같으니까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분의 사생활을 밝혀야 하는 부분이라 물어보고 여러분 한 분 한 분께 알려 드리도록 하죠. 부디 오해하지 마시길.”
탁. 방관하면서 차를 마시고 있던 1후궁의 찻잔이 그제야 식탁에 내려앉았다.
나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질문했던 여인을 마주 보았다.
“공자님.”
물론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고개를 돌려야 했다.
“네, 왕녀님.”
“이 궁은 또 다른 세계이고, 또 다른 국가이며, 또 다른 전쟁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군도 적도 특정 지을 수 있는 공간이에요. 저는 공자님과 굳이 적이 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오르고 싶은 자리에 앉았을 때 그 누구보다 공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에요. 부디 제 아군이 되어 주시겠어요?”
1후궁은 누구보다 우아하게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을 잡지 않는다면 저 날카로운 손톱이 언제건 내 목을 뚫고 지나갈 것만 같아 뒷골이 섬찟했다.
그때 누군가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어린 궁녀였다.
“마마. 폐하께서 이곳으로 오고 계십니다.”
1후궁의 얼굴이 서늘해졌고, 다른 후궁들의 얼굴은 종잇장같이 창백해졌다.
이윽고 발소리가 들리더니 황제가 기사들과 들이닥쳤다.
“왜 내가 못 올 데라도 왔나?”
황제가 비아냥거리며 시종장이 가져온 의자에 착석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1후궁을 선두로 모두 고개를 숙였고, 황제는 내 쪽을 쳐다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들라.”
왠지 저 말이 황제 자신에게 하는 말같이 들려와서 나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언제부터 후궁들끼리 서열을 정했지?”
황제의 싸늘한 말이 공간에 울려 퍼졌다.
누가 봐도 1후궁을 중앙에 모시는 형태였기 때문에 황제의 추궁은 매우 정당했다.
황궁에서는 황제만이 상석에 앉을 수 있었으니까.
아무도 입 여는 이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 또한 가만히 있었다.
“그대 괜찮나?”
황제는 몇 번이나 나를 흘끔거리더니 못 참겠는지 나에게 물어 왔다.
참으로 온순하고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앞의 여인들을 추궁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였다.
“폐하.”
내가 나지막하게 부르자 황제가 흠칫거렸다.
“그냥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습니다.”
혹시나 또 바람이라는 헛소리를 하면 찻잔으로 머리를 내려칠 각오까지 했는데, 생각보다 황제는 담담했다.
몇 명이 함께 만나는 상황이라서 참을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나도 함께 담소를 나누지.”
황제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앞에 있는 차를 들었다.
뒤에서 보좌관들과 시종장이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서류들을 한가득 쥔 채였다.
직장인의 인생이란 참으로 고달파 보였다.
황제가 온 후 아무도 입을 안 열었기에 티타임은 금방 흐지부지 파했다.
황제는 나에게 말을 걸고 싶어 했지만 내가 궁으로 향하자 그냥 잘 자란 말만 했을 뿐이었다.
오늘은 생각보다 많이 피곤한 날이었다.
하룻밤 자고 깨어났더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었다.
다름 아닌 신려였다.
“또 뵙네요.”
나를 보자마자 그녀가 건넨 한마디였다.
굳이 보려고 찾아온 것은 자신이면서.
“그러게 말입니다. 왜 자주 보려고 합니까.”
내 까칠한 말에 그녀가 쏘아붙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꼬아 말한 내가 머쓱해졌다.
여인들과 신경전을 하다 보니 점점 내가 여자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사과를 드리려고 왔어요.”
“네? 사과요?”
“지금까지 공자님에게 무례했던 것 같아서요.”
“갑자기 왜 사과를 하십니까?”
“저를 구원해 주신 분이 그러기를 원하셨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홀가분해 보였다.
문장 뜻대로라면 그녀는 그 사람이 아니면 나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을 거라는 의미인데, 의외로 그녀의 얼굴은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내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그분이 누굴 말하는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신려 님 말씀대로라면 그분이 아니었다면 저에게 절대 사과를 하지 않았으리라는 소리로 들리니까요.”
“일단은 그분이 밝히기를 원하지 않으셔서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어요. 다만 이 황궁에서 공자님께 우호적인 분이 아니겠어요?”
신려는 싱긋 웃었다.
그 사람은 황제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신려는 왠지 황제를 후궁으로서 모시는 것보다 신하로서 모시는 걸로 보였다.
“그리고 제 비밀을 말하지 않아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고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 황궁에서 나의 말 상대가 없어서였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오해가 풀렸다니 다행입니다.”
신려는 나를 신기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무슨 의미냐는 듯 눈을 찡그리는 나를 향해 그녀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이가 누군지 묻지 않으시나요?”
“굳이요. 안 궁금합니다.”
“처음 만남이 그렇지 않았다면 그때부터 우리는 친해질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무척 아쉬워요.”
“네. 뭐.”
혼자서 김칫국을 사발째 드링킹하는 그녀의 얼굴이 매우 짜증이 나서 나는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나는 그녀와 절대 친해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가까이에 가기엔 영혼도 유혹당할 것만 같은 위험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사실은 제 아이예요. 공자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폐하의 아이도 아니구요. 그리고 이 사실은 폐하께서도 알고 계세요. 제가 궁에 들어올 때 이미 품고 있었거든요. 이 황궁에서 아는 사람은 폐하와 저와 호휘들과 공자님뿐이에요.”
굳이 안 궁금한 사실까지 그녀는 서슴없이 해 댔다.
그녀의 말속에는 나를 향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긴 이왕 들킨 거 한배 타려는 걸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황제는 정말 미친놈이었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품고 있는 여인을 후궁으로 들이다니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었다.
더더욱 후궁은 황후까지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만약 그녀가 황후가 된다면 다른 사람의 아이가 후계를 이을 수도 있었으니까.
다행히 앞의 여인은 그 자리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쫑알거렸다.
처음 만났을 때의 독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저렇게 수다쟁이 같은 그녀가 지금까지 말없이 어떻게 살았는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었다.
마치 그녀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 같았다.
나는 물론 그녀에게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저기 볼일이 끝나셨으면 이만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가 낮잠을 좀 자야겠습니다.”
그녀가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하긴 무례하게 내쫓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를 싫어한다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았다.
“공자님은 정말로 몸이 약하시군요. 제 아들도 이렇게 일찍부터 낮잠을 자지는 않는데. 얼른 잘 드시고 잘 쉬시고 하셔서 건강을 찾으세요. 그럼 전 내일도 올게요.”
오지 말란 말을 하기도 전에 신려는 안쓰러운 얼굴로 돌아섰다.
어찌나 걸음이 신속하고 몸이 재빠른지 미처 잡을 새도 없었다.
누가 보면 전문 암살이나 뒷세계에서 정보를 모으는 길드에서 일을 하는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 할당량을 그녀가 다 채운 줄 알았으나 다른 일이 또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