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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안배-10화 (10/60)

10화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자려고 방금 누운 데다가 거의 잠이 들락 말락 한 상태였는데, 상사가 찾아왔으니 좋을 이유가 있겠는가.

게다가 저 인간은 내가 거절했다는 것을 잊었나 싶었다.

“이런, 내가 시간을 맞추지 못한 것 같군.”

황제는 낭패 어린 얼굴을 하면서도 기어코 침실로 기어 들어왔다.

나는 무거운 몸을 어기적거리며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오후입니다, 폐하.”

내가 인상을 찌푸린 채 일어나자 황제가 멈칫거렸다.

그가 화를 내려나, 라는 생각이 찾아들자 조금 더 피곤해졌다.

“어디 아파?”

“아뇨.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의원을 데려와라.”

황제는 괜찮다는데도 들어 먹질 않았고, 시종장은 마치 기계인 양 무표정한 얼굴로 황제의 명령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황제를 본 지 몇 분 흐르지도 않았는데 피곤함이 극에 달했다.

다행인 점은 황제가 나를 침대에 눕혀 준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궁의가 왔고, 그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몸을 몇 번 검사하더니 기력에 좋은 약을 지어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 버렸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그대 몸이 약한 거 모르는 사람이 있나. 약을 지어 먹어야지.”

황제는 의사가 다녀갔음에도 걱정스러운 얼굴을 지우지 않았다.

저렇게 걱정하는 사람이 안 오는 것이 도와주는 거라는 걸 왜 모를까.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황제는 그제야 큼큼 기침하더니 잠시간 우물쭈물했다.

덩치도 나보다 한참 큰 그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니 꼴불견이 따로 없었다.

내가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고서야 황제는 뒤를 향해 손짓했다.

시종장이 품에 커다란 함을 안고 다가오자 황제는 몇 번 더 큼큼거렸다.

“뭔지 모르지만 빨리하시죠.”

나는 빨리 처리하고 잘 생각에 그를 재촉했다.

함의 크기는 제법 커다랬다.

나는 혹시나 이 궁 안에 맘에 든 것이 있어서 황제가 가져가려 그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저렇게 눈치 보지 않아도 다 줄 생각이었다.

그냥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는데 굳이 재물을 탐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나의 재촉에 더는 꾸물거리지 않고 함을 열었다. 그 안을 들여다본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말았다.

큰 함 안에는 다른 함들이 더 있었고, 그 안에는 보석이 가득했다.

이러다 눈이 멀지 않을까, 라는 걱정을 할 만큼 보석들이 반짝거렸고, 그 크기들 또한 만만치 않았다.

목걸이, 반지, 팔찌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뭡니까?”

놀란 나의 물음에 황제는 귀가 붉어진 채 말했다.

“그대가 나와 큼, 혼인을 했는데 내가 선물을 주지 않았던 것 같아서. 크음.”

“그렇군요. 그럼 다른 분들에게도 다 주시는 건가요?”

정말로 궁금해서 물은 것뿐이었는데 황제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아니.”

그러니까 나한테만 준다는 말이었다.

나는 분명히 거절했는데 물질로 회유하려는 그를 보니 답답하기만 했다.

적어도 마음을 얻으려면 그 사람이 원하는 것 정도는 알고 선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시군요. 그런데 폐하.”

“그래.”

“저 남자입니다. 제가 저것을 가지고 뭘 하란 말입니까.”

황제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얼빠진 얼굴로 덧붙였다.

“그래도 보석들이 최상급이라 도움이 될 거야.”

그렇긴 하겠지만 굳이 그게 아니라도 돈이 여유로웠다.

공작이 보내는 돈은 천문학적이었고 후궁들에게 주는 돈도 제법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럼 이것만, 이것만 받아 줘.”

황제는 간절한 얼굴로 작은 함을 내밀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싶어 나는 순순히 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핑크색 다이아몬드를 올려놓은 반지가 있었다.

보석에 관심이 없는 내가 봐도 예쁘네, 라는 감상이 들 만큼 반지는 예뻤다.

“알겠습니다. 다른 것은 가져가 주십시오.”

“알았다. 고마워.”

황제는 내가 다른 선물을 거절한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반지를 꺼내더니 나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조심스럽게 끼웠다.

반지는 내 손가락에 꼭 맞았다.

황제는 반지 낀 손에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나는 화르륵 놀라 급히 손을 뺐고, 황제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만 볼 뿐 따로 말은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저 감사합니다.”

나는 그 침묵을 견디는 것이 버겁고 불편해 그저 감사 인사를 했다.

황제는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는지 눈이 동그래져 버렸다.

순간 그가 귀엽다는 생각을 하던 나는 속으로 나 자신에게 미친놈 소리를 퍼부었다.

“나는 이만 돌아가지.”

몇 번이고 내 손에 자리 잡은 반지를 흘끔거리던 황제가 돌아가고서야 드디어 나는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나의 하루하루는 매우 바쁘게 흘러갔다.

오전에는 신려가 찾아왔고, 오후에는 황제가 찾아왔다.

신려는 황궁의 소문에 대하여 떠들어 댔고, 황제는 아무 말 없이 이것저것 챙겨 왔다 갔다 했다.

처음에는 찾아온 신려가 매우 못마땅했는데, 그녀가 가져온 소문들이 제법 쏠쏠해서 그녀를 더는 불편해하지 않기로 했다.

가령

“요즘 소문 들으셨나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못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공자님을 많이 좋아하신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뭐 사실이긴 했다.

“그래서 매일매일 선물을 들고 공자님을 찾아오신다고요. 그래서 어쩌면 공자님이 황후가 될지도 모른다고요.”

그녀는 나를 곧 죽어도 공자라 불렀다.

나도 후궁이라는 칭호보다 공자가 더 듣기 좋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특히 황제 앞에서 저렇게 불렀다가는 경을 칠 게 뻔했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정정해 주지 않았다.

그녀의 안위보다 내 기분이 더 중요했다.

“그렇군요.”

“그래서 정말이에요?”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네, 사실입니다.”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었다.

“네?”

질문은 자기가 해 놓고도 놀란 얼굴을 했다.

“뭐가 문제입니까?”

황제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이 저렇게 놀랄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황제를 생각해 보니 놀랄 만하구나, 라고 수긍이 갔다.

“정말 공자님이 황후 자리에 관심이 있으신 거예요?”

“네?”

이번엔 내가 놀라 되물었다.

“네?”

그녀 또한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문했고 나는 나오는 대로 주절거렸다.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릴 아무렇지 않게 하십니까. 저는 절대로 그런 거 될 생각 없습니다. 가늘고 길게, 아무한테도 피해 주지 않고 조용히 살 겁니다. 그러니 그런 무서운 말은 하지도 마십시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나의 불행이 아직 안 없어졌을까 겁이 났다.

내가 핵 가까이에 갔을 때 지구가 멸망했는데, 만약 황후가 되면 이 나라를 멸망시키지 말란 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황제의 마음을 모른 척하는 이유도 이게 가장 컸다.

황제가 남자이고 내가 남자여서 안 된다는 이유보다도 내 불행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 갈까 그것이 제일 두려웠다.

내가 진심으로 질색하자 그녀는 더 질색한 얼굴로 말했다.

“공자님이 먼저 그렇다고 답했잖아요.”

“저는 그게 그 뜻인지 몰랐습니다. 아무튼 그런 일 없으니까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지요.”

우리는 그렇게 싸늘한 분위기를 풀지 못하고 신려는 자신의 궁으로 돌아갔다.

오후에 황제가 오리라 생각하고 낮잠도 안 자고 기다렸건만 오늘 황제는 오지 않았다.

마음이 분명 편안한데,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찝찝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곳에 온 지 벌써 한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가벼울 것만 같던 황제의 감정은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었고, 공작은 그 기간 동안 몇 번이나 나를 공작저에 데려가려고 시도를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신려 또한 꾸준히 내 궁에 드나들었고, 1후궁은 대놓고 나를 싫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황제는 나에게 많은 것을 안겨 주었다.

처음 선물했던 화원과 내 궁이 더 가까울 수 있도록 길을 새로 내어 주었고 작던 내 궁을 증축시켜 주었다.

아직까지 완공되지 않았기에 내 궁 주변은 공사가 이어지고 있었고, 나는 자신의 궁에서 머물라는 황제의 말을 무시한 채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궁에 고집스럽게 머물고 있었다.

황제는 내 궁 앞마당에 분수를 설치해 주었고, 어디선가 예쁜 보석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으면 꼭 구입해 나에게 선물했다.

나는 당연히 거절했고 황제는 다시 가져갔다.

나중에 들은 말인데 황제는 내가 거절한 것들을 무슨 전리품인 양 방 하나를 마련해 그곳에 전시한다고 했다.

정말로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어느 날에는 열쇠를 하나 건네주는 게 아닌가.

“이게 뭡니까?”

“황실 보고 열쇠다.”

여상하게 말하는 황제에게 놀란 나머지 나는 열쇠를 집어 던졌고, 황제는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잡아채며 말했다.

“필요한 거 있으면 가져다 쓰라고.”

도대체 왜 나에게 저렇게까지 뭘 주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사람이 저렇게까지 되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그럴 일 없으니까 다시 가져가십시오.”

황제는 이날도 아무렇지 않게 열쇠를 다시 가지고 갔다.

그때 일을 생각하며 머리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데, 오랜만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아주 오랜만이었다.

“잘 지냈느냐?”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오랜만입니다.”

너무 오랜만이라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이렇게 반겨 줄 줄은 몰랐구나. 내가 많이 보고 싶었느냐?”

순간 들떴던 마음이 차게 식었다.

“무슨 그런 말을 하십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간 편했는데 다시 관찰당할 생각에 불편해진 것이 안 느껴지십니까.”

신이 푸으으, 하며 웃었다.

신답지 않게 무게감 없는 웃음이었다.

처음에 나의 영혼을 짓누르던 이랑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이젠 말해 줄 때가 되어서 왔다.”

그 말에 저절로 긴장이 차올랐다.

혹시나 드래곤 잡으러 가는 용사라든가. 모든 사람을 구해야 하는 성자 역할 일까 봐 겁이 났다.

나는 편하게 이 생을 마감하고 싶었으니까.

“그대가 새 인생을 시작할 때 내가 원하는 인생을 말하라고 했던 것이 기억나느냐?”

그랬던 것 같기도 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너는 돈도 많고 가족도 많은 곳에 보내 달라고 했다.”

“그래서요.”

“그 조건에 부합하는 몸이 마침 그 몸이었지.”

나는 황당함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정적이나 다름없는 후궁들이 어떻게 많은 가족이며 남자인 나에게 후궁으로 살라는 것이 말이나 되는 것인가.

“물론 그것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분노를 표출하듯 몸을 떨어 대는 나를 향해 신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래,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기에 이리 보낸 것이라야만 했다.

내 소원을 이따위로 들어주는 신이 너무 짜증 났으니까.

“황제와 잘 지내고 있느냐?”

지금 이 순간에 저 말을 한다고?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문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숨 쉬는 소리에 뒤이어 신은 곧장 다음 말을 이었다.

“황제와 잘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

“왜요? 그가 권력자라서요? 안 그래도 복종하며 살고 있습니다.”

나는 억울함이 가득 담긴 어조로 말했고 신은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런 간단한 일이 아니야. 만약 이 세계가 지금 멸망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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