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온몸이 굳어졌다.
머릿속은 하얘졌고 심장이 빠르게 쿵쿵거렸다.
식은땀이 옷을 적실 만큼 흘러나왔다.
내가 여기에 와서, 불행을 몰고 다니는 내가 살아 보겠다고 해서, 그래서 또다시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위기에 처했다.
심호흡을 해도 거친 호흡은 진정될 기미가 없었고 아무리 힘을 줘도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다.
“……성.” 멀어져 가는소리가 들렸다.
“……차리거라.”
나를 다급히 부르는 신의 목소리에 뒤이어 따뜻한 무언가가 내 몸을 감쌌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흡.”
나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었다.
“괜찮으냐?”
“네, 괜찮습니다.”
“쓰러져서 놀랐다.”
쓰러졌다는 말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지금 이곳은 신과 단둘이 있는 곳이었고 현실이 아니었으니까. 암전된 후 이곳이라면 현실의 나는 기절했었을 테니까.
“그래서 아까 한 말씀 자세하게 들을 수 있습니까?”
가상 세계라서 그런지 몸의 속박에서 벗어나니 아까와 같은 충격은 없었다.
멸망이 올지도 모른다는 말에 아직까지 숨이 가빠 오는 듯한 압박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참을 만했다.
지금 당장은 멸망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또 쓰러질까 봐 그러지.”
신은 아주 가벼운 투로 나를 놀리듯이 말했다.
“장난칠 기운 없으니 얼른 말씀해 주시죠.”
“큼큼, 그래. 그러자꾸나. 사실 관리자는 나 하나뿐이 아니야. 아, 이게 중요한 건 아니지. 어쨌든 세계는 무궁무진하고 그 많은 세계를 관리할 관리인들은 가지고 있는 세계에 따라 힘이 나누어져 있지. 그래서 자신이 관리하는 세계를 잘 돌봐야만 해.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나 또한 너희들만큼 너희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아낀다는 뜻이야.”
신은 묻지 않은 말을, 절대 궁금하지 않은 말을 아주 서사를 써 가며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당연히 나는 뭐 어쩌라고 하는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았고.
“크음. 그런데 그대도 알다시피 지구가 사라졌어. 지구는 제법 모든 것이 균형을 잘 맞춘 세계였거든. 인간들도 자기들끼리 힘의 균형 또한 잘 조절했고. 흠, 다른 말로 하자면 야만적이지 않다는 말이야. 그런 세계는 신들끼리도 아주 귀하게 취급해. 지금 그대가 살고 있는 세계도 그런 세계 중의 하나이고, 그렇기에 나는 이 세계를 지킬 의무가 있어.”
신의 목소리는 점점 더 진지해져 갔다.
“그런데 이 세계 또한 어쩌면 멸망할지도 몰라. 원인이 알고 싶지? 이곳은 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신들이 지키려고 하는 세계인데 어떻게 멸망하냐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나 또 다른 인외 존재는 세계를 멸망시키는 것이 제법 어려워. 왜냐하면 그들은 관여는 할 수 있어도 직접 손대는 것은 못 하거든. 예를 들면 지구야. 지구는 인외 존재의 손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 낸 핵에 의하여 멸망을 맞이했지. 즉, 세계에 속한 존재가 세계 밖의 존재보다 멸망을 더 쉽게 가져온다는 뜻이야.”
나는 숨을 멈춘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 지금 네가 사는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세계에 속한 것이고, 그것은 인간이고 너도 아는 사람이야.”
나는 슬슬 짜증이 났다.
내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누가 핵인지 알 수 없었다.
누가 터지면 안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가장 의심이 가는 인간은 황제인데, 그는 제정신이 아니고 피에 미친 놈이긴 했지만 터질 정도는 아니었는데…….
신이 나를 지긋하게 쳐다보았다.
설마…… 설마?
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제가 핵이 되어 터지기라도 합니까?”
내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났다.
분위기에 맞지 않게 신이 푸읍, 하고 웃었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났지만, 가만히 있었다.
신이 어떤 답변을 할지 궁금했으니까.
“터지지는 않고. 하긴 터지긴 터지네. 그가 지금 하려는 일을 막지 않으면 수많은 인간들이 죽을 거고, 그 인간들이 죽으면 세계가 돌아가지 못할 만큼 모든 것이 멈춰 버리겠지. 또 연쇄적으로 전염병이 돌고, 인간들은 또 죽고. 온순한 짐승들이 맹수가 되어 버리고. 그렇게 모두 미쳐서 세상에 숨 쉬는 것이 없을 때까지 죽고 죽이는 날이 올 거야.”
순간 나는 그것들이 상상이 되었다.
다 죽고 모든 것이 멎어 버린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그리고 내 상상을 부추기듯 신이 그 세상을 눈앞에 구현해 냈다.
“어때. 막을 생각이 들어?”
나는 멈칫했다.
막을 생각이 드냐고? 그것보다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황제가 나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와 있을 때 그가 일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한마디로 내가 그를 막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세계 멸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죽을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생각보다 그리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이런 불행이 닥쳐오리란 경고를 들은 이 순간에도 다행스러운 점이 하나 있었다.
지구와는 다르게 아직 소중한 것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너무, 너무나도 다행이었다.
“최선을 다하면 막을 수 있을 거야.”
신이 태평한 소리를 했다.
이 세계가 소중하다고? 신들이 지킬 의무가 있다고? 참으로 공감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들이 이 세계를 아무리 귀하게 여긴다 말해도 그들에겐 그냥 귀애하는 장난감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치열한지,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그들은 알 수가 없었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에는……. 그들이 아무리 손해를 입어 봤자 직접 당하는 우리만큼은 아닐 테니까.
“글쎄요. 저는 하지 못할걸요.”
나는 덤덤히 말했다.
이게 사실이었으니까. 신이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나에게서 무언가를 얻으려는 눈빛이었으나 나는 신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하아…….
신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폐허가 되어 버린 미래의 이 세계를 바라봤다.
그렇게 아름답던 것이 이렇게 사라진다는 것이 사무치게 아쉬웠다.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가족을 보여 줄 수 있다.”
나는 모든 생각을 멈췄다.
신의 목소리가 들린 이후에 머릿속이 그야말로 백지가 되어 버렸다.
가족이라니,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아니 잊을 수 없는 단어였다.
나의 목숨을 바쳐서 단 한 순간만이라도 나를 키워 준 가족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당연히 내어 줄 터였다.
뭐 신이니 나의 영혼 따위를 가지려고 하지 않겠지만 영혼이 필요하다고 해도 흔쾌히 줄 수 있었다.
나는 정말로 간절한 얼굴로, 제발이라는 단어를 차마 내뱉지도 못한 채 신을 바라봤다.
“네가 막을 수 있다면, 막아만 준다면 다른 곳에서 살고 있는 그들의 얼굴을 보여 줄 거다. 당연히 이야기는 할 수 없어. 직접 만날 수는 더더욱 없고, 그냥 영상처럼 얼굴만 보여 줄 거야. 네가 원하는 만큼. 어때 할 수 있겠느냐?”
나는 앞뒤 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막을 수 있냐 없냐는 이미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나에게 단 한 번의 기회가 온 것이었고 나는 그 기회를 기필코 잡을 테니까.
신은 한숨을 내쉬기는 했지만, 나의 대답이 나름 마음에 드는 듯했다.
“건투를 비마.”
나는 게슴츠레 눈을 떴다.
나의 손을 잡은 채 나를 내려다보는 황제가 보였다.
황제는 지금 나에게 구명줄이었다.
그에게 전쟁을 멈추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다.
어떻게?
머리를 굴리려고 했으나 나를 쳐다보는 눈동자가 어찌나 뜨거운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바래 버렸다.
“괜찮나?”
황제의 목소리가 심히 낮아져 있었다.
그에게선 항상 오래된 나무 향 같은 냄새가 났는데 오늘따라 그 향이 몹시 짙었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그 향이 나의 몸 곳곳을 찌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네. 괜찮습니다.”
나는 애써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황제가 나를 도로 눕혔기에 얌전히 그의 뜻에 따랐다.
“무슨 일이 있었나?”
황제의 목소리에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평소와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눈이 붉어져 있었다.
순간 울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설마 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안 그러면 당장 그에게 먹힐 것만 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하. 아무, 일도, 없었는데,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지나?”
황제가 이를 앙다문 채 말을 끊어 가며 짓씹듯 물었다.
그런데 정말로 내가 해 줄 말은 없었다.
곧 세계가 멸망할 예정이며 그를 실현할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이 말을 어떻게 쉽게 하겠는가.
하지만 황제는 내가 대답을 안 하면 찢어 죽일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으나 좀처럼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을 들으려고 몇 번이나 묻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바른대로 말해.”
“…….”
나는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할 말이 없는데 어쩌라고,
나의 시위 어린 행동에 황제는 한참을 씩씩거리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화내는 거 아니다. 내가 그대에게 어떻게 화를 내나. 그래도 하나는 대답해 줬으면 좋겠다. 그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겠다고.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해 줄 수 있나?”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물론 새로 생긴 목숨이 소중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나의 내면을 황제가 알아봤다는 것이 나는 그저 놀라웠다.
하지만…… 그런 약속은 이제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목숨보다 중요한 약속을 해 버렸기에.
내 손으로 내 목숨을 끊는 날이 안 오기를 바라지만 부득이한 날이 올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거짓을 말하면 그뿐인데 왜 이렇게 입도 벙긋할 수 없는지 모르겠다.
나의 대답이 늦어지자 황제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면서도 나를 다그치거나 소리 지르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나를 뚫어지게 쳐다만 볼 뿐이었다.
“내 손으로 제 목숨을 끊지 않을게요.”
한참을 생각한 끝에 나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안 그러면 황제는 평생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버티고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거짓일지라도 그러겠다는 대답일 터였다.
“그래. 항상 그렇게 생각해. 꼭 그래야만 할 거다. 꼭.”
황제는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꼭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한마디 한마디를 꾹꾹 눌러 나의 온몸에 박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