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황제는 그 후에도 돌아가지 않은 채 나에게 붙어 있었다.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내가 몸이라도 움찔거리면 득달같이 살펴 댔다.
“폐하, 안 돌아가십니까?”
황제는 도통 자신의 궁으로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질문에 안 들리는 척하는 것만 봐도 알 것 같았다.
“폐하 들리는 거 다 압니다.”
황제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몸이 아직 아프고 돌봐 줄 이가 필요하지.”
“그렇긴 하지만 폐하가 누굴 돌보실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황제는 내 눈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하긴 맞는 말이라 반박이 어려울 터였다.
“그대는 다른 사람을 곁에 안 두지 않나. 그래서 내가 곁에 있으려고 하는 것이다.”
“오늘만큼은 곁에 두겠습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보셔도 됩니다.”
황제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사실 황제는 내 곁에서도 정무를 보고 있었기에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나 또한 신이 말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단 계획이 필요한데, 황제가 있으면 도무지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없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 그대를 씻겨 주는 것만…….”
“그게 제일 문제입니다만.”
나는 서둘러 황제의 말을 막았다.
뭐 처음이라면 같이 씻자고 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나 좋다고 고백한 남자랑 함께 씻고 싶지는 않았다.
황제는 내 말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뭘 상상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 시중을 받을 테니 걱정 말고 돌아가십시오.”
내 말이 끝나자 부끄러워하는 듯하던 황제가 돌연 내 어깨를 잡았다.
“절대 싫다. 내 시중을 받든지 아무 시중도 받지 않든지 해.”
하도 기가 막힌 나머지 어이가 가출한 기분이었다.
지금도 손이 떨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저런 말을 하다니……. 결국 자신의 시중을 받으라는 말이었다.
“참으로 황송합니다만. 정 그러시다면 오늘 하루는 안 씻도록 하겠습니다.”
황제의 손이 어깨에서 내려왔다.
그는 크게 한숨을 쉬더니…….
“땀을 많이 흘려서 씻는 것이 좋을 거다. 내가 닦기는 했는데 그래도 씻는 것만큼은 못 할 테니. 절대 그대에게 다른 의미로 손을 대지 않을 테니 믿어도 된다.”
귀까지 벌게진 채 말을 해 봐야 씨알도 안 먹힌다.
“됐습니다. 그냥 저 혼자 씻겠습니다.”
황제는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얼른 부축했다.
함께 욕조까지 왔지만 도통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이것저것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존귀하신 황제가 후궁의 시중을 들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폐하.”
“안 보고 할 테니 나가라고 하지 말아 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저렇게까지 필사적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제가 나에게 저렇게 목맬 만큼의 일이 우리 사이엔 있지 않았다.
내가 왜 그에게 이다지도 간절한 존재인지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당신한테 도대체 뭘 해 줬길래 그래? 내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야? 나한테 성적으로 끌려서 그러는 거야?
수많은 질문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하나도 꺼낼 수 없었다.
그의 대답이 어떤 것일지도 모르는데 별거 아닌 말이 나올까 봐, 아니면 아주 지독해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말이 나올까 봐 무서웠다.
황제는 약속대로 나를 쳐다보지 않은 채 깨끗하게 아주 잘 씻겨 주었다.
물론 예민한 부위라든지 그런 곳은 일절 만지지 않았다.
씻는 내내 적막만이 흘렀다.
다 씻고 나오니 어느덧 나는 뽀송뽀송해지고 황제는 푹 젖어 있었다.
내가 물속에 있었는데 오히려 황제가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모양새였다.
“나도 씻고 가지.”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말했고 나는 몸이 노곤해서 침대가 시금했다.
그대로 잠자리에 든 내가 눈을 떴을 때 황제의 얼굴이 내 얼굴과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아 씨, 깜짝이야.”
흠칫 놀란 나는 빽 소리치며 그와 멀어졌다.
이 인간은 언제 내 침대에 기어 들어온 거야.
쿵덕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황제가 나를 너무 꽉 끌어안고 있는 바람에 좀처럼 뺄 수 없었다.
순간 콱 물어 버릴까 고민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그의 팔을 억지로 떼어 냈다.
절대 놔주지 않아 그마저도 실패하고 말았지만.
“하, 안 일어나시면 때릴 겁니다.”
움찔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폐하, 고자 만들어 주는 수가 있습니다.”
또다시 움찔거렸다.
하, 이것도 안 된다 이거지. 뭘 해야 가장 현명한 협박일까를 고민하다 보니 그가 지금 현재 나에게 감정의 약자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폐하, 지금 안 놓아주시면 저 오늘 가출할 겁니다.”
스르륵.
마침내 황제의 손이 풀렸고 나는 드디어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안 돌아가신 겁니까?”
멋쩍은 표정으로 일어난 황제는 나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하긴 묻는 내가 잘못이지. 기회를 준 내가 미친놈이지. 다행히 황제가 나에게 아무 짓도 안 했다는 것에 위안이 되었다.
“아, 되었습니다. 오늘은 혼자 있게 해 주십시오.”
황제는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내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알겠다는 대답만 남긴 채 가 버렸다.
그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작아 보였다.
이제부터 하나하나 정리를 해야 했다.
일단 전쟁을 막아야 한다.
그러자면 전쟁의 원인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아는 사람도 없고 들은 거라고는 신려가 물어다 준 소문뿐인 내가 원인을 알 리가 만무했다.
“포기하면 안 돼. 이제 시작이다.”
“저기 밖에 계시는 분.”
복식 호흡 후 소리를 내자 잽싸게 누군가 들어왔다.
몇 번이나 봤던 시종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궁 주변엔 여자가 거의 없었다.
여자를 좋아한다고 한 나 때문에 황제가 내린 조치라 생각하니 이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예, 마마.”
“가서 신려 님 좀 오라고 해요. 아, 그가 누군지 모르나? 그 아홉 번째 후궁 마마 좀 오라고 해 주세요.”
“예, 마마. 모셔 오겠습니다. 말씀은 낮추셔도 됩니다.”
사실 필요한 내가 찾아가는 것이 맞겠지만, 황제가 궁 밖을 벗어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신려 또한 내가 찾아가는 것보다 찾아오는 걸 좋아하는 것 같길래 오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 안 오겠다 할 경우를 위해 열심히 외출 준비도 하고 있었다.
“마마, 9후궁 마마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공자님.”
신려가 요염한 얼굴로 나에게 인사를 건네 왔다.
사내들이 보면 홀리지 않고는 못 배길 웃음이었다.
“신려 님은 오늘도 어여쁘시군요.”
신려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귀하신 공자님께서 오늘은 어인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요. 너무 당당히 오라고 하셔서 기분이 상하려고 했지만, 친우와 같은 공자님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달려왔답니다.”
신려가 한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유혹은 거절입니다.”
내가 질색하며 말하자 신려가 크게 웃었다.
“절대 유혹 아니에요.”
그러시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차를 권했다.
“사실은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그러리라 짐작하고 알고 왔어요. 도대체 뭐가 그리 궁금하실까.”
남은 초조해 죽겠건만 신려는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하긴 그녀는 아무것도 모를 테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전쟁 준비는 어디까지 되어 있습니까.”
신려의 손이 멈칫했다.
내가 이런 걸 물어볼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그렇겠지. 나는 그냥 얌전히 남은 인생을 기다릴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나의 삶의 우선순위가 찾아왔다.
나는 그것을 해내야만 했다.
“왜 물어보는지 알려 주실래요?”
장난스럽던 얼굴에 진지한 눈빛이 깃들어 있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입니다. 일단은 전쟁을 막고 싶어서, 라고 하고 싶습니다.”
나의 대답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단 한 번도 그런 것에 관심을 안 두시더니 어인 일이신지요?”
“그러게요. 망하면 안 되는 이유가 생겼습니다.”
“그 말씀은 이 제국이 망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그냥 웃었다.
전쟁을 하면서 망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황제는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신이 이야기했으니 거짓은 아닐 테지. 제국이 아니라 이 세계가 망한다는 것을 알면 당신은 어떤 얼굴을 할까.
“공자님 생각을 알 수 없네요. 일단 전쟁 준비는 다 끝났어요. 언제든지 폐하의 명령만 있다면 시작할 거예요. 그게 언제일지는 폐하만 아실 테고요. 그리고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아, 하나 있긴 하네요. 폐하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에요. 하지만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것을 멈추실 뿐이 아니에요. 폐하의 평생이니까요.”
단단한 눈빛으로 너는 안 될 것이라 그녀가 말하고 있었다.
불가능을 가능게 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고, 인간은 이 세계 하나쯤은 멸망시킬 만큼 큰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 가능성이 내게는 없다고 못 박을 이유는 없기에 그녀의 말은 나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왜 전쟁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유, 이유라? 참 신기한 것을 물으시네요. 이유가 어디에 있나요? 그저 해야 할 일이라고 하셨어요. 어려서부터, 폐하가 그 자리에 앉으셨을 때부터 줄곧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말이에요. 아,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지금까지 전쟁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멀리 쫓겨나거나 아예 존재를 없애 버렸거나 아니면 공자님과 같은 이유로 더는 반대를 할 수 없게 되었어요”
정말 이 말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황제는 정말로 미친놈이 분명했다.
이런 미친놈.
일단 그렇다면 황제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을까? 내 목숨을 중요하게 생각하니 목숨으로 협박을 할까? 하지만 그런 놈이면 그냥 나를 감금해서 피폐물 하나를 찍을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가진 게……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일단 고맙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저 지금처럼 가만히 있으세요. 공자님에게 그것이 가장 도움 되는 일이니까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신려는 몇 가지 장난을 치다 돌아갔다.
첫 만남이 안 좋았을 뿐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불러냈음에도 화를 내지 않고 잘 받아 주었다.
이제부터 할 일은 결국 황제를 공략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다.
황제가 나에게 마음이 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전쟁을 하지 마세요, 라고 말린들 들어 먹을 인간이 아니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계속 고민했음에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마마,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이 아뢰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시종은 나의 존칭을 극도로 어려워했지만 나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 사람에게 좀처럼 반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불편해하더라도 내가 편하자고 계속 존칭을 쓰는 중이었다.
언젠간 고쳐야겠다 생각하면서도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