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어서 오십시오, 아버님.”
공작이 강건한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내가 쓰러졌다는 말이 이제야 그에게 전달이 된 것 같았다.
나이 든 공작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마마, 괜찮으신 겁니까.”
“당연합니다. 아무렇지 않습니다.”
공작의 얼굴을 보니 또 내가 혹시나 자살을 시도했을까 전전긍긍하는 것 같았다.
하긴 뭐든지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쉬운 법이니까. 하지만 나는 이 몸의 원주인이 아니었다.
절대 그럴 일이 없었다.
소중하진 않지만, 다음 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에는 그냥 얌전히 생을 채우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는 자각쯤은 있으니 말이다.
“마마, 혹시 아니시지요?”
공작의 입에서 끝끝내 혹시라는 말이 나왔다.
“절대 아닙니다, 아버님. 그냥 몸이 살짝 아주 조금 아팠었는데 지금은 다 나았습니다.”
나의 단호한 대답에 공작이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얼굴을 했지만, 그래도 걱정은 사라지지 않는 듯했다.
“요즈음 폐하께서 자주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 혹 황후 자리에 관심 있으십니까?”
황후 자리라. 절대 관심 없는 자리이긴 하다.
하지만 황제와 가까워질 수만 있다면 그 자리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가 관심이 있다면 가질 수 있는 자리입니까?”
“후궁이라면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마께서 꼭 그 자리에 오르시겠다고 하시면 모든 것을 다 바쳐 도울 것입니다. 그러나 아비로서는 말리고 싶습니다. 결코 좋은 곳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겠지. 지금 황궁에서 황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황제라고 해도 귀족이라든가 신전이라든가 이런 곳들에게서 제동이 걸리기 마련인데 이곳만은 황제가 절대적이었다.
그만큼 미친놈처럼 방해되는 인물들을 황제가 다 칼로 썰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황제와 함께하는 황후 자리가 꽃길일 수 없으니 가시밭길이 분명했다.
분명 그럴 터인데도 나는 꼭 가야만 한다면 마다할 수가 없었다.
“일단은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제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도와주십시오, 아버님.”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귀족들은 자식들을 권력의 말로 키우는데 공작은 아들에게 제법 애틋함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뿐인 아들이라지만 너무 알겠다고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마마. 제가 다 들어줄 겁니다. 그러니 마마께서는 한 가지만 하시면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남겠다고. 꼭 열심히 살겠다고 그것만 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공작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제법 얼굴이 많이 풀어졌다.
그때 문득 공작은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나름 공작이 귀족파의 수장인데 혹시나 그가 반대하는데도 전쟁이 가능할까 싶었다.
“아버님.”
“네, 마마.”
“혹시 아버님께서는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두가 죽는 것이지요. 인간의 목숨이 파리보다 못한 곳이 전장입니다.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물웅덩이가 아니라 피로 웅덩이가 생겨나고, 돌이나 흙이 아니라 인간의 시체로 산을 쌓는 것이 전쟁이고 전장입니다. 슬픔을 느끼지도 두려움을 느끼지도 못한 채 오직 광기로만 물들어 있는 곳입니다.”
공작은 매우 고독하고 슬프고 씁쓸하게 대답했다.
“나쁜 의미이지요?‘
“네. 당연히 나쁜 의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곳을 좋아하는 이는 별로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왜 전쟁을 막지 않으십니까?’
공작이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 속에는 걱정과 염려가 담겨 있었으나 대답을 피하지는 않았다.
“지킬 것이 많은 이는 멈추는 법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신려의 말이 떠올랐다.
황제가 자신을 방해하는 이들을 어떻게 쳐 냈는지가 이제야 제대로 와닿았다.
결론은 공작도 충신 대신 자기 자식을 택한 모양이었다.
“다 죽을 줄 알면서도 그런 것을 택하는 거예요?”
나는 황당함에 목소리가 올라갔다.
“그러니 이겨야만 합니다. 간절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국은 전쟁에서 승리할 겁니다. 그때까지 마마는 잘 드시고 잘 쉬시고 하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이 아비가 알아서 할 테니 지금까지처럼 예쁘게 잘 계셔 주시면 됩니다.”
그의 걱정이 고맙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온실 안의 꽃인 양 입 닥치고 있으라는 거였다.
“그렇군요. 결국 이 땅에 전쟁을 막을 자가 없다는 거군요.”
힘이 쑥 빠졌다.
사실 전쟁을 막을 방법을 생각했을 때 첫 번째로 떠올린 것이 황후 자리에 올라 황제와 같은 권력을 나누어 내분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두 번째 방법은 공작과 같은 귀족들이 상소 같은 것을 올리는 것이었는데 공작의 대답으로 미뤄 보건대 당연히 실패였다.
이제 남은 것은 두 가지였다.
세 번째 방안은 내가 천하에서 가장 섹시하고 사랑스러운 요부가 되어서 황제를 꼬시는 거였다.
다시 말해 황제를 아무 곳에도 못 가게 방 안에 붙잡아 두는 것이다.
네 번째는 황제를 그냥 암살하는 거였다.
나에게 가까이 오고 싶어 하는 황제의 마음을 이용해 갑자기 기습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방법은 황제 죽고 나도 죽는 비극적인 결말만이 남아 있을 테지만 말이다.
물론 네 번째보다 세 번째가 평화적인 방법이었긴 하지만,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었다.
“마마,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지요?”
“네, 아무 일 없습니다. 아버님은 제 걱정 그만하시고 아버님 건강 먼저 돌보십시오.”
“언제 마마가 이리 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저에겐 아기인데 벌써 이 아비를 걱정하고 계시니…… 너무 좋기도 한데 슬프기도 한 기분입니다.”
“이제 집을 나섰으니 저도 철이 들 때가 된 것입니다. 저에게 항상 뭐든 된다고 하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담백한 인사에 공작의 눈이 커졌다.
그의 눈에는 대견함과 쓸쓸함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 후로도 공작은 계속 나를 걱정하다 돌아갔다.
현재로서 전쟁을 막을 유일한 방법은 황제를 유혹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가 나를 좋아하는 시점에서 유혹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사람의 마음을 이용해도 되는가 하는 양심의 가책이 들어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마마, 폐하께서 보내신 분들이 오셨습니다.”
엥? 갑자기?
나는 허둥지둥 일어났다.
그때 문을 열고 여러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천과 책자 그리고 상자들이 들려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캅 의상실입니다.”
시종이 고개를 숙이며 소개하자, 의상실에서 온 사람은 휘황찬란한 모습을 하고 나에게 인사했다.
“캅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는 라벨이라고 합니다. 폐하께서 마마의 의상을 맞추라 명하셔서 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의 의상을 맡게 되어서 무척 영광입니다. 호호.”
얼굴에 화장을 떡칠하고 갖가지 빛깔의 의상을 휘감은 채 나에게 인사를 하는 그를 보며 과연 그에게 맡겨도 되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오호, 마마께서는 심플한 것을 선호하시는군요.”
내 의상실에 있는 옷들을 보며 라벨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항상 저런 옷들만 입을 수는 없는 법이지요. 마마는 주목받는 옷을 입으실 필요가 있으시니까요.”
라벨은 불길한 웃음을 지으며 짝, 하고 박수를 쳤다.
그 소리를 신호탄 삼아 그와 함께 온 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아한 점은 모두 남자였다는 것이었다.
“혹시 뭐 좀 물어봐도 됩니까?”
“네, 마마. 질문은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의상실은 원래 남자들만 일합니까?”
그냥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내 물음에 오히려 묘한 웃음을 띤 건 라벨이었다.
“그럴 리가요. 그냥 높으신 분의 요청으로 없는 인원을 쥐어짜서 왔을 뿐이랍니다.”
호호거리며 웃는 남자 라벨을 보는 게 피곤했지만 그래도 물을 건 물어야 했다.
“그럼 여자들도 있는 겁니까?”
“네. 우리 의상실의 직원은 대부분 여자입니다. 남자들은 거의 다 칼을 쥐니까요. 아시다시피 이런 직업은 남자들이 하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하죠. 특히 시선들이. 그래서 저와 같은 평민들이 한답니다. 그것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평민들이죠.”
“그럼 저한테만 이런 구성으로 오신다는 거군요.”
라벨은 싱긋 웃기만 했다.
젠장, 미친 황제 같으니라고, 내가 여자에게 한눈팔까 봐 의상실 방문 인원에 여자를 배제하라 한 것이었다.
도대체 그 머리통 안의 나는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치수를 다 쟀고. 일단은 최대한 아름답고 주목받는 의상을 준비해 보내 드릴게요. 물론 다른 의상도 보내 드릴 예정입니다.”
“그래요.”
내 돈도 아니고 굳이 황제가 준다는데 거절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만 라벨의 옷을 보아하니 그가 만든 옷을 과연 내가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들 뿐이었다.
“마마. 그럼 완성되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라벨은 화려한 몸을 움직이며 방을 나섰다.
“폐하께서는 정무를 보십니까?”
“네, 마마.”
“그렇군요. 혹시 제 궁에도 여자가 없습니까?”
“예, 마마.”
시종은 혹시라도 내가 화를 낼까 봐 시종일관 긴장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혹시 이름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까지 아무도 찾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계속 찾아 댈 테니 이름이라도 알아야 할 듯싶었다.
지금 보는 시중은 계속 나의 주위에 있었으니까.
“베스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네. 이제야 인사를 하게 되어 미안합니다. 베스, 지금까지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마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말씀 낮추어 주십시오. 폐하께서 경을 칠 것입니다.”
베스는 정말로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예전이라면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이왕 사이좋게 지낼 생각을 했으니 말을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고마워, 베스.”
“네. 감사합니다, 마마.”
“베스, 부탁할 일이 있어.”
“네, 마마”
“이제부터 궁 안의 소문들을 나에게 매일 알려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신문 같은 거 있을까?”
“네, 마마. 있습니다.”
“그것도 최대한 여러 가지로 매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지금부터 베스를 초록창처럼 써먹을 예정이었다.
궁금한 걸 물으면 정보를 물어다 주는 나만의 개인 정보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