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베스는 제법 쓸 만했다.
신려의 정보통도 쓸 만했지만 그녀보다는 밑바닥까지 아주 촘촘히 훑어 날라다 주는 베스의 정보 또한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베스는 내가 물어보는 모든 것을 막힘없이 대답했다.
위대한 초록창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나는 아침부터 차를 마시며 신문들을 읽어 내려갔다.
베스에게 부탁한 다음 날부터 나에게 어느덧 자리 잡은 일상이었다.
황제는 그 후로도 나에게 선물을 계속 보내왔다.
물론 몇 번 오기는 했지만, 그날처럼 뻔뻔하게 자고 가는 일은 없었다.
신 또한 딱히 뭘 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가끔 지켜본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는 전쟁에 대하여 하나하나 알아내고 있었다.
“마마, 폐하께서 점심 식사를 함께 하는 게 어떠신지 물으셨습니다.”
베스가 조용히 물었다.
그러고 보니 황제와 함께 식사를 한 것이 꽤 오래 지났다.
황제 또한 내 옆에서 잔 다음 날부터 심하게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거절한다면 제법 서운해할 터였다.
“가겠다고 해 줘.”
베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는 웬만해서는 감정이 얼굴에 잘 실리지 않는데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얼굴을 보니 아랫사람들의 고통이 느껴졌다.
나 또한 직장 생활을 해 본 사람으로서 심히 공감이 갔다.
황제는 내가 식당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와 있었다.
황제보다 늦게 와서 송구하다고 하려고 했으나 황제가 너무 격하게 반기는 바람에 사과할 필요가 없었다.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식탁에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올라왔다.
단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음에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혹시나 이 몸도 전부터 저런 음식을 좋아했나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황제는 오히려 나와 반대되는 입맛을 가진 듯했다.
내가 담백한 음식과 채소를 좋아했다면 황제는 기름기가 있는 음식을 선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탁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만 올라와 또다시 황제의 마음의 무게가 더욱 가까이 와닿았다.
“폐하.”
“그래.”
“식사 후 시간 좀 내 주시겠습니까?”
황제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처음이군. 그대가 나한테 시간을 내라고 한 건. 없어도 낼 거다.”
황제는 지나치게 기분 좋은 얼굴로 음식을 퍼먹었다.
엄청 열성적이었다.
마치 음식이 적이라도 된 듯 다 없애 버리겠다는 각오가 보여 나는 그만 웃어 버렸다.
그에 황제가 또 놀라운 얼굴을 했지만 나는 금세 웃음기를 지우고 먹는 것에 집중했다.
“물러가라.”
식사를 마치고 황제와 응접실로 옮겼다.
황제는 나만 남기고 다른 이들을 다 물렸다.
“폐하.”
내가 부르자 황제가 긴장한 것이 느껴졌다.
“저기…….”
“황궁을 나가는 것은 안 돼.”
내가 입을 열기 전에 황제가 서둘러 말했다.
내가 무어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황제가 덧붙였다.
“그대의 허락을 받지 않고 그대의 침대에서 자서 미안해. 반성하고 있어. 그러니까 간다는 말은 안 된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나왔다.
나는 벌써 잊어버렸는데 황제는 내가 그 일로 화를 내서 자신을 피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뭐 어떻습니까. 부부인데. 이 황궁에서 폐하가 안 되는 곳은 없습니다. 이 궁의 물건들 또한 다 폐하 것인데 제가 뭐라고 사과까지 하십니까.”
다신 그러지 말라고 못 박아야 하건만 황제를 꼬시려는 입장에서는 하등 쓸모없는 말이었기에 전혀 반대되는 말만 나왔다.
“비꼬는 말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찔려서 저도 모르게 사족을 덧붙였다.
“화가 난 것이 아닌가?”
“네.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황제가 긴장을 풀고 편하게 앉았다.
“그럼 무엇 때문에 보자고 하였나?”
“사실은 폐하께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래, 무엇이든 들어주마.”
“약조하셨습니다.”
“그래.”
나는 한참을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로 무엇이든 들어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 이어질 내 말을 듣고도 들어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전쟁을 멈춰 주십시오.”
차를 들려던 황제의 손이 멈칫했다.
“갑자기?”
온화하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뭐든 들어주겠다고 큰소리치던 남자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순간 그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마음을 가지고 장난을 치려고 했던 내가 죄책감 따위를 가질 만큼 원대한 마음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고작 그만큼의 무게를 가지고 지금까지 그 난리를 피운 건가, 라는 생각이 드니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네, 갑자기 전쟁이 나는 것이 너무 두렵습니다.”
이미 뱉은 말이라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했다.
사실 신이 말한 모든 것을 털어놓을까, 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베스가 가져다준 신문들과 소문들에 비추어 볼 때 황제는 신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증오하는 쪽이었다.
신전이 존재했지만, 황제는 교황을 비롯한 신관들을 멸시했고 그들은 황제가 즉위한 후 단 한 번도 황궁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사실대로 말했다간 어떤 후폭풍이 있을지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내가 아무것도 못 하고 죽는다면 가족들을 다시 보지 못할 테니 그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약속하지. 적들은 절대로 제국의 땅을 밟지 못할 거다. 그러니 그대는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냥 안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니. 그건 안 돼. 아무리 그대라고 해도 안 돼. 다른 것을 들어주마. 다른 것은 어떤 것이든 다 들어주겠다 약속하마.”
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방금 전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는데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무엇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폐하의 약속 또한 지켜지지 않겠군요.”
나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황제의 검은 눈동자가 순간 번뜩이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렸다.
그때 황제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으으윽.”
황제가 머리를 잡은 채 고통스럽게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문득 이걸 죽이고 전쟁을 막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행동으로 옮길 수 없어 황제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황제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내 손은 짝,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머물렀다.
“제발 좀 닥쳐.”
황제의 검은 눈이 짐승의 것처럼 번뜩였다.
나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주제넘은 생각을 했는지 처절하게 알아차렸다.
미친 황제는 지금껏 놀이를 한 것이다.
남자 후궁에게 구애하는 척하면서 가지고 논 것이다.
애초에 미친 황제가 감정이 있다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길로 바로 돌아섰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따끔거렸다.
분명 그를 좋아했던 적이 없는데도 그의 행동에 화가 났다.
아니, 화가 났다기보단…… 서운했다.
분명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말이나 한 번 해 보자는 심정으로 꺼냈었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졌다는 걸 대차게 거절당하고서야 깨달았다.
아, 이 감정은…… 분명했다.
정이 들어 버린 것이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베스가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
“당연히 괜찮지.”
나는 나오지 않는 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때 베스가 나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뭔가?”
“닦으십시오. 제가 해 드릴 수는 없어서…….”
그제야 나는 내가 울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젠장. 여자도 아니면서 그까짓 서운함이 좀 느껴졌다고 울고 있는 내가 비참해졌다.
“눈물이 아니다. 그냥 눈에 뭐가 들어가서 물이 흘렀을 뿐이다.”
결연한 내 말에 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마마.”
나는 베스와 함께 궁에 돌아왔다.
괜찮다 괜찮다 밤새 나를 세뇌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혀 괜찮지 못한 아침을 맞이했다.
“마마, 1후궁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젠장.
가뜩이나 어제 일로 충격이 가시지 않은 몸을 이끈 채 나는 일어나야만 했다.
“돌아가시라고 할까요?”
베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를 비웃으러 오셨나 보지. 난 괜찮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전해 줘.”
“예, 마마.”
베스가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대충 씻은 다음 옷을 걸치고 응접실로 향했다.
생각 같아선 만나고 싶지 않지만 내가 지금 황제에게 버림받은 입장에서 미래의 황후가 될지 모를 그에게 더 이상의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화해를 청하고 싶기도 했다.
정말 후궁의 자리는 황제에게 버림받으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최대한 무해한 웃음을 지으며 1후궁에게 다가갔다.
“생각보다 신수가 훤하시군요.”
돌아온 인사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웃음을 띤 채 말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잠이 많아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아무런 언질도 없이 불쑥 찾아온 제 잘못인걸요. ”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일로 오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냥. 공자님이 갑자기 보고 싶어서 왔어요.”
이를테면 황제에게 버림받은 남자 후궁이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자존심이 상하라고 한 말이겠지만 맞는 말이었기에 딱히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뒤에서 문이 쾅, 하고 열렸다.
“감히!”
천둥 같은 소리가 응접실에 울렸다.
황제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놀란 나와는 다르게 1후궁은 단정히 인사했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평온한 1후궁을 바라봤다.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한 떨기 꽃인 양…….
그녀도 놀란 모양이었다.
“감히. 내 것에 눈독을 들여?”
황제는 성큼성큼 다가와 1후궁과 내 사이를 막아섰다.
도대체 이 안에 황제의 것이 아닌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누가 눈독을 들였는지 알 수 있을까요?”
뱉고 나니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이 겉으로 나와 버린 것이다.
“그대는 제발 조용히 있어. 안 그러면 그대에게도 화를 낼 것이다.”
이미 충분히 내고 있으면서 또 화를 내겠다고 협박하는 황제를 나는 황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폐하, 왜 화를 내시는지 알려 주신다면 다시는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겠습니다.”
1후궁은 손과 온몸을 바르르 떨면서도 목소리는 단단했다.
“하. 감히 내 후궁에게 보고 싶다고 말하고도 뻔뻔스럽게 나에게 질문하는 짓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면 될까?”
순간 방 안에 적막감이 흘렀다.
1후궁 또한 떨던 것을 멈춘 채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입을 떡 벌렸다.
진짜 미친놈 아니야? 눈앞의 여인도 네 후궁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