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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안배-15화 (15/60)

15화

1후궁의 눈이 나에게로 향하자 황제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찢어 죽일 것처럼 으르릉거렸다.

“네 눈을 뽑아야 그 요망스러운 눈을 돌릴 것인가?”

허. 나는 말리는 것도 잊은 채 황제를 보다가 1후궁 쪽으로 걸어갔다.

“폐하, 왜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화가 났으면 저에게 푸십시오. 연약한 여인에게 뭐 하는 짓입니까.”

“그대는 지금 뭐 하는 짓이지?”

황제는 목소리를 낮게 깐 채 나를 향해 눈을 번뜩였다.

어제저녁에 봤던 바로 그 눈이었다.

갑자기 화가 솟구쳤다.

닥치라고 내치더니 인제 와서 자기 거라니.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또 자신은 어제 운 것이 쪽팔려서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었는데 인제 와서 뭐 어쩌라고.

“폐하, 생각보다도 더 많이 좀스러우십니다.”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아닙니다. 생각보다가 아니라 그냥 원래 좀스러우신 분이시군요.”

더욱 진하게 웃었다.

“뭐라고?”

황제는 멍청하게 계속해서 되물을 뿐이었다.

막상 입을 열고 나니 어제 일이 생각나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고 짜증이 났다.

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였다.

“앞으로 더는 안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화나는 것만큼 환하게 웃었다.

“잠깐. 그대 괜찮나?”

황제는 화를 내던 것도 잊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 모습에 가식적으로 얼굴에 머금었던 웃음이 사라져 버렸다.

“아뇨. 절대 안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여기에서 사라져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폐하.”

화를 내더라도 정신을 다잡아야 했지만, 황제가 다가오는 순간 평정심이 깨어졌다.

나는 나에게 다가오는 황제를 콱, 하고 밀쳤다.

물론 물러난 것은 황제가 아닌 나였다.

더욱더 서러워졌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폐하와 저 둘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그럴 힘도 없으면서 악을 썼다.

이것은 그와 나 둘 다에게 하는 협박이었다.

황제는 내가 밀어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더 다가오왔다.

그의 손이 내 얼굴을 향해 뻗어 왔다.

그 순간이 슬로모션처럼 아주아주 느리게 보였다.

혹시 때리려나? 맞으면 아프겠지. 아니면 죽으려나? 죽으면 가족 못 보는데. 너무 개겼나? 따위의 생각들을 하며 눈을 감았다.

“열이 나고.”

다행히 다가온 것은 폭력이 아니고 내 이마를 짚는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대에게서 냄새나.”

뭐? 맞는 것보다 더욱더 짜증 나는 말이었다.

“너도 냄새나거든.”

나는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나는 씻기도 했다고!! 지도 냄새나는 주제에.”

사실 황제에게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늘 나무 향이 나기는 했는데, 지금은 더욱 진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황후에게서 향수 같은 냄새가 진하게 났었는데, 그 향이 떠오르지조차 않을 만큼 아주 강렬한 나무 향이 났다.

“그런 냄새가 아니고. 아무튼 그대에게서 늘 나는 향이 있는데 더욱 강해졌다는 말이다.”

“그게 뭔데?”

반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건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까. 일단 그대는 방에 들어가서 눕도록 해. 궁의를 보내도록 하지.”

황제는 화를 내던 것도 잊고 나를 안아 든 채 침실로 향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응접실에서 본 것은 안광을 번뜩이는 1후궁의 눈동자였다.

단단히 미움을 받게 생겼다.

다시 화해를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폐하, 궁의가 오셨습니다.”

베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황제가 나를 데리고 방으로 온 후부터 숨을 쉬기가 더 힘들어졌다.

숨을 쉬기 힘들다고 말을 하려 했지만 입을 열면 황제에게서 나는 향이 더욱 강해져 나는 가까스로 호흡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얼른얼른 보거라. 무슨 일인지 꼭 알아내야 할 것이다.”

궁의는 내 팔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열을 내리는 약과 심신 안정을 유도하는 약을 처방했다.

더불어 코가 예민해진 것 같다며 냄새를 못 맡게 하는 약도 지어 왔다.

다행히 한나절 지나자 열도 내리고 냄새를 아예 못 맡게 되어서인지 살 만해졌다.

대신에 심장이 쿵쿵거려서 숨쉬기는 여전히 어려웠지만, 아까에 비하면 제법 살 만해 괜찮아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정말 괜찮나?”

황제는 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계속 허둥거렸다.

그러고 보니 황제랑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이렇게 어영부영 넘어가기는 싫었다.

하지만 조목조목 따지기에는 조금 힘이 없었기에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폐하, 이만 돌아가십시오. 혼자 있고 싶습니다.”

나는 나라 잃은 표정을 짓는 황제를 본체만체하며 이불을 끌어 올렸다.

이미 그런 표정 지어 봤자 더는 속지 않는 나였다.

“내 말을 좀 들어 줘.”

황제가 애절하게 말해도 말이다.

“폐하, 피곤합니다.”

단호한 내 말에 황제의 입이 다물렸다.

이제야 방 안의 공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무언가 이상했다.

딱 짚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직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게 뭘까 골똘히 생각하는 그때, 황제가 잡았던 내 손을 이불 안에 여며 주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럼 내일 다시 오도록 하지.”

아니요. 올 필요 없는데요, 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급히 도망가는 황제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사라지고 나자 숨쉬기가 훨씬 편안해졌다.

가슴이 답답한 것은 여전하지만 뭔가를 분출해야만 사라질 것 같았던 답답함이 자취를 감췄다.

그제야 나는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다른 냄새, 즉 음식이나 향수 같은 것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가 없는데, 황제에게서 나는 냄새는 너무 잘 맡아졌다.

황제가 떠난 지금까지도…….

“신님, 신님.”

나는 혹시라도 나를 관음하고 있을 신을 불렀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기에.

하지만 신은 찾아오지 않았다.

망할 신 같으니라고, 자기 필요할 때만 오다니. 젠장.

“베스.”

“네, 마마.”

“그래서 황궁의는 뭐래.”

“혈이 불안정하게 잡힌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상 처음으로 잡히는 방식이라 의학서를 뒤져 본다고 하였습니다. 짐작은 가지만 아직 명확한 것은 아니라 이후에 다시 알려 준다고 하였습니다.”

너 뭐 알파고니?

기계적으로 말하는 베스를 한참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이불을 끝까지 뒤집어썼다.

혹시라도 불치병일까 무서웠다.

안 되는데. 아직 죽으면 안 되는데…….

눈물이 흘러내렸다.

슬프지도 않은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베스, 혼자 있고 싶다.”

“네, 마마.”

베스는 나에게 손수건 하나 건네주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참으로 야속한 시종이 아닐 수 없었다.

혼자서 눈물을 흘리며 베개를 적시고 나니 머리가 멍해졌다.

내려갔던 열이 다시 오른 탓인지 온몸이 뜨거워진 것 같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무시하려고 애썼던 황제의 향이 점점 나를 덮쳐 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저것은 치워지지도 않는 건데.

나는 속으로 화를 내며 형체 없는 향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것은 없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다가와 나의 몸을 감싸 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생각지도 못한 것에 놀라고 말았다.

말할 수 없는 부분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날뛰고 있었다.

아주 단단하게 고개를 든 채 자신을 쳐다보라 종용해 댔다.

뭐, 뭐야.

무릇 남자라면 다들 아는 것이다.

자신을 달래는 것은 사춘기가 오기 전에 벌써 미디어를 통해 잘 해결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성인이 되어서 새 직장에 들어갔을 때 직장 동료를 통해 겨우 전수받았다.

그때 느낀 감정은 자괴감뿐이었다.

따라서 나는 자기 위로를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물론 아름다운 여성을 보거나, 뜻하지 않게 직장 동료의 직박구리 폴더를 강제로 시청을 하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기 위로를 해야 할 때가 있었다.

결단코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이러지는 않았다는 말이었다.

왜 이렇게 된 것이지?

나는 점점 내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고 있는 제2의 나를 내려다보며 황망함을 금하지 못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유혹을 당했는지를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유혹을 당연히 이성에게서 찾았다.

이성이라면 아까 1후궁뿐이었는데, 혹시 내가 화를 내는 여자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혹시 변탠가?…….

가능성을 열어 놓은 채 생각을 이어 가고 있는데, 점점 이성이 사라져 갔다.

저절로 옷을 벗고 있었다.

한 꺼풀 한 꺼풀 뱀이 허물을 벗듯 하나하나 벗어 냈고 태초의 내가 이불 안에 혼자 남았을 때 나는 신음하듯 입술을 달싹였다.

“베스. 하아.”

아주 약하게 불렀는데 베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불을 몸에 감은 채 옷가지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는 걸 목도한 베스의 얼굴이 이상해져 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지금 내가 가장 급했다.

“베스. 하아. 의원, 의……원, 좀…… 하아.”

입을 열기만 하면 열띤 신음이 새어 나와 좀처럼 말을 할 수 없었다.

베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는 나에게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방 안을 뛰쳐나갔다.

다행이었다.

내 의도가 전달된 것 같았다.

빨리 와 줬으면…….

“연아!!”

누군가 큰 소리로 연을 부르고 있었다.

연이 누구지? 나는 강은성인데…… 저렇게 애달프게 불러 주는 사람이 있어서 연이라는 사람은 좋겠다.

이름도 예쁘네. 예쁜 여자인가? 나는 어떻게 되나? 그러고 보니 내 불행이 옮겨질까 연애 한 번 못 한 것이 아쉬웠다.

혹시 나 죽나?

그렇게 생각할 즈음 또 누군가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완전 짐승처럼 그르렁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연.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나?”

아니 누군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을 알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누군지도 모를 사람의 목을 감싸 안았다.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하지만 정체 모를 이는 목을 감은 내 손을 떼어 내고 있었다.

아 씨, 왜 나를 밀어내는 거야. 내가 연이라는 사람보다 안 예뻐서 그런가? 나는 계속 눈앞의 사람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 말해. 블리 연 가히 제드.”

그는 화를 내고 있었다.

블리 연 가히 제드. 이제야 기억이 났다.

나는 강은성이고 블리 연 가히 제드는 이 몸의 원주인이다.

지금은 내가 이 몸의 주인이었다.

그러니까 눈앞의 사람이 찾는 연이라는 사람은 나였다.

“누구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이렇게 애달프게 부를 사람이 기억이 안 났다.

공작인가?

“아버지?”

머리 위에서 허,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누군가의 입술이 내 입술을 머금었다.

“그대는 아비랑 이런 것도 하나?”

목소리는 나직했고 그가 남자임을 두꺼운 입술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나는 입술로만 알았다고 설명하고 싶었다.

남자와 입술을 비비는 감각은 생각보다 거부감이 없었다.

또한 그와 숨결을 나눌수록 점점 내가 원하는 욕구가 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사람이 누군지도.

“폐하, 좀 더 주세요.”

내가 한숨처럼 내비친 말에 황제는 그제야 나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내 허리를 휘감았다.

“잊지 마, 나야. 그대의 반려다.”

황제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짓씹듯 뱉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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