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처음에는 내가 달뜬 숨을 내쉬며 매달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성이 날아간 이는 다름 아닌 황제였다.
“폐하?”
황제의 눈은 검붉게 물들었다.
마치 검었던 눈동자에 화산을 부어 넣은 듯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불러도 도통 멈춰 주지를 않았다.
나갔던 이상이 되돌아온 상태에서 눈이 돌아간 황제를 받아 내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남자와 몸을 맞대고 있다는 이 상황 자체가 기가 막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지금은 아래위로 받기 너무 벅차서 수치심은 잠시 넣어 놓기로 했다.
“폐하, 잠시 좀…….”
“하아, 연. 연, 좋은 냄새가 난다.”
황제는 나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 쉼 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벌어질 수 없는 곳이 한계까지 벌어진 채 이물질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나는 몹시도 견디기 힘들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황제는 검붉은 눈을 번뜩이며 속도를 더욱 높여 나갔고, 내가 황제에게서 해방된 것은 그로부터 3일이나 지난 뒤였다.
“으으윽.”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온몸을 쇠사슬에 묶인 채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인 양 삭신이 쑤셔 왔다.
지난 며칠 동안은 눈을 뜨면 늘 황제가 위에 있었기에 혼자 눈을 뜨는 지금이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너무 울어 댄 탓인지 눈 또한 퉁퉁 부어 있었기에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흠흠, 아, 아.”
안 나오는 목소리를 쥐어짜자 그렁그렁한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다.
곧이어 급한 발걸음 소리도 이어졌다.
“베스?”
목이 아파 겨우 한마디만 내뱉었다.
“나야.”
꼴 보기 싫은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대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황제가 나에게 다가왔다.
“물 마시겠나?”
나는 상대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목이 몹시 아팠던지라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많이 아파?”
내가 얼굴을 찌푸리자 황제가 더 아픈 얼굴로 물어 왔다.
나는 고개를 대충 끄덕이고 다시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전까지 몰랐었는데 몸에 열까지 나는 것 같았다.
“미안.”
황제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몸이 너무 아파서 까무룩 다시 잠이 들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멀쩡한 몸으로 다시 돌아다니기까지는 그로부터 일주일이 훨씬 더 지난 후였다.
황제와 그동안 가까워졌냐고? 전혀 아니었다.
왜냐하면 황제는 계속 나를 찾아왔지만 내가 거부를 했다.
남자와 밤을 보낸 것까지 괜찮았다.
또한 내가 그의 후궁 신분이었으니까 그것도 참을 만했다.
그런데 사람을 일주일 동안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극한으로 내몬 황제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베스가 여느 때와 같이 나에게 알렸다.
나는 이불 안에서 나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황제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은 좀 괜찮나?”
온갖 걱정을 다 그러안은 목소리로 풀이 잔뜩 죽은 채 황제는 매일매일을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나는 지겹게 들은 저 질문에 단 한 번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늘 하루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그저 목이 너무 아파서였고, 다음에는 황제가 너무 꼴 보기 싫어서였다.
“그대가 좋아하는 음식을 올렸는데 조금이라도 먹지 그러나.”
사실 나는 요새 거의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열이 오르는 데다가 충격 또한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아무리 애달픈 마음으로 말해도 나는 여전히 입을 꾹 닫은 채 그냥 이불 속에서 뭉그적거렸다.
“요것만 한 숟가락만 먹어 보지 않겠느냐?”
황제가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침대 옆에 앉아 말을 걸어왔다.
“…….”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황제의 몸이 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향 태운 냄새와 싱그러운 숲속의 나무 냄새가 잘 어우러져 오묘한 느낌을 선사하는 황제만의 향이 확 풍겨 왔다.
순식간에 아래쪽으로 열이 확 몰려왔다.
시발, 나는 속으로 욕을 삼키며 이불을 더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연아.”
황제가 다가오던 몸을 멈추며 애달프게 나를 불렀다.
“…….”
황제는 한참이나 그런 나를 들여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배고프면 먹도록 해.”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짜증 난 마음을 내리누르며 일어나 앉아 옆에 있는 물을 마셨다.
“큭큭큭.”
그때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차라리 크게 웃으십시오.”
“크하하하.”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주 큰 웃음소리가 또 들려왔다.
“신이 그렇게 경박하게 웃어도 됩니까?”
경박하다는 내 비아냥거림에도 신은 아주 이상한 소리까지 내며 웃어 젖혔다.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렇게 웃으시면 제가 기분이 안 좋지 않을까요?”
“흠흠, 그거야 그동안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는데, 드디어 일을 치렀으니 당연히 내가 와 봐야지.”
과연 관음증 환자다운 신의 대답이었다.
“짜증이 나네요.”
내가 한숨 쉬며 투덜거리자 그제야 신의 웃음소리가 멈췄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냐?”
인제 와서 물어봤자지만, 그래도 입이 근질근질했던 터라 어쩔 수가 없었다.
“신께서는 제가 남자와 성관계를 했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어때야 하는데?”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니까요.”
“그래서 남자랑 해서 안 좋았느냐?”
“그게 중요합니까? 제가 여자 아닌 남자와 관계를 가졌는데요?”
“그러니까. 기분이 나빴는지를 묻는 거잖느냐.”
신인데…… 신은 원래 같은 성끼리 사랑을 나누면 벌을 내리는 거 아니었어? 아니면 벌까진 아니더라도 만류해야 하는 거 아닌가. 혹시 저렇게 반응하는 것이 정상인가?
내 이러한 생각을 읽은 신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신은 성별 개념이 없단다. 그리고 사랑에는 종족 개념도 없고, 신이 누구보다 사랑하는 이가 바로 인간인지라……. 그리고 우리는 절대로 어느 누구의 운명에도 관여하지 않는단다.”
하긴 신이 만약에 동성 커플을 악이라 규정했다면 그들은 행복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동성 커플들도 많은 이들이 행복해했다.
정말로 신이 그들에게 벌을 주려고 했다면 그들은 행복감이라는 감정을 느끼지도 못했으리라.
나는 나의 편협한 생각에 반성하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쳐지지 않는 생각에 당황스러웠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응? 무슨 말이지?”
“저는 제가 남자인데. 남자라서 그런 짓을 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인데. 신이 허락 안 한 일을 해서 벌을 받으리라 생각했는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랬는데도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리고 나는 신은 인간의 운명에 관여하지 않아서 사랑을 해도 괜찮다는 말에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랬다면 애당초 성이 상관없는 인간으로만 살게 해 주지, 왜 다른 성을 주어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안겨 주는가 하는 거였다.
적막을 깨고 신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그대의 생각이 끝나면 다시 오마.”
그 말만을 남긴 채 신이 매정하게 가 버렸다.
머리가 하얗게 바래 버렸고 심장이 쿵쿵거려 왔다.
이것은 새로운 사실에 대한 충격 또한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후로 나는 며칠이고 잠을 자고 또 잤다.
“마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베스가 나를 조용히 불러 왔다.
“오늘은 산책이라도 하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항상 나를 지척에서 조용히 부르기만 하던 베스가 오늘은 다른 것을 제안해 왔다.
그러고 보니 해를 본 지도 꽤 오래 지나 있었다.
몸은 이젠 멀쩡해졌고 정신도 꽤 맑아진 상태였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베스가 반색하며 다가왔다.
“마마, 오늘은 날씨가 무척 좋습니다. 바람도 적당하고 햇빛도 적당한 것이 마치 신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신이라는 말에 머리가 아파 왔지만 일으켰던 몸을 다시 누이지는 않았다.
베스는 나를 이끌고 가더니 욕탕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 보니 씻은 지도 꽤 시간이 지나 있었다.
대충 씻고 베스가 마련해 준 옷을 입고 나오니 어느덧 외출 준비가 끝나 있었다.
내가 앞서서 걸었고 베스가 뒤에서 조용히 따라왔다.
들떠 보이던 베스의 목소리도 어느덧 조용해져 있었다.
베스의 말대로 날씨는 화창함을 뽐내며 온 궁 자체가 화사해져 있었다.
나는 날씨의 기운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되는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아.”
어찌나 누워만 있었던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마마, 조금 쉬었다 가시지요.”
베스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꽃이 정말 예쁘게 피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덧 황제가 나에게 고백했었던 꽃밭에 다다라 있었다.
문득 쉬어 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곳에 자리를 잡자 베스가 서둘러 깔개를 깔아 주었다.
“그대를 좋아한다.”
황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황제의 붉어졌던 얼굴이 떠올랐다.
온몸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표현하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순식간에 내가 부끄러워졌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두 무릎 사이에 고개를 박았다.
“어디 아픈가?”
다시금 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 얼굴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순간 황제가 횡설수설했다.
“그저 나는 그대가 밖으로 나왔다는 말에 너무 반가워서. 그대가 싫다면 나는 이만 가겠다.”
그의 붉어진 얼굴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행동이, 갈 곳을 잃고 흔들리는 눈동자가, 황제의 모든 것이 귀여워 보였다.
“싫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