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허둥거리던 황제의 몸짓이 우뚝 멈췄다.
나 또한 충동적으로 뱉은 말이라 같이 놀라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뱉은 말이 내 마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곁에 가도 되겠나?”
한껏 들뜬 황제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끄덕거리기만 했다.
왜 이다지도 부끄러운지 모를 노릇이었다.
발자국 소리와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커다란 온기가 옆쪽에서 닿아 왔다.
한동안 우리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 앞쪽만 바라보았다.
그때 황제의 손이 옆쪽에 있던 나의 손과 슬쩍 닿았다.
나의 고개가 황제 쪽으로 돌아갔다.
황제의 눈동자가 나의 눈동자를 올곧게 응시하고 있었다.
앞쪽만 바라보고 있던 것은 나뿐이었던 것 같았다.
“몸은 좀 괜찮아졌나?”
“네, 많이요.”
“잘 지냈냐고 물어도 되나?”
그의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나의 대답에 황제가 잠시 포개져 있는 손에 시선을 주더니 다시 마주해 왔다.
“나는…… 잘 지내지 못했다.”
그제야 황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눈 밑은 거뭇거뭇하게 변해 있었고 창백한 얼굴은 더욱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입술 또한 거칠거칠했다.
“…….”
“왜 잘 못 지냈냐고 물어봐 줄 수 있나?”
그의 거대한 몸이 한없이 왜소해 보였다.
설마 폭군이라고 일컬어지는 황제가, 다른 사람의 목을 스스럼없이 베는 황제가 동정을 바라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못한 채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왜 잘 못 지내셨습니까?”
왠지 목이 메어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저 황제가 슬퍼 보였고, 그의 슬픔이 느껴졌고, 내 의지와는 다르게 그의 마음에 내가 동화되는 것만 같았다.
“그대가…… 나를……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까 봐.”
그의 목소리 끝이 떨려 왔고 나의 손등에 포개져 있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나는 포개져 있던 손에 고정해 둔 눈을 들어 황제를 바라봤다.
“…….”
황제가 울고 있었다.
“……폐하?”
황제가 황급히 옷깃으로 자신의 눈을 훔쳤다.
“우세요?”
“그대는…… 하아…… 모른 척해 주면 안 되나?”
“아…… 네…… 죄송합니다?”
순간적으로 기가 막혔다.
나 보라고 우는 게 아니었다면 도대체 왜 사람을 쳐다보면서 우는 것인지…….
“아니다.”
그렇게 또 한동안 대화가 끊겼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 흘러넘치는 꽃향기. 황제에게서 늘 나던 나무 향까지 어우러져 마치 숲속에 황제와 나 단둘만 있는 듯한 아늑함이 느껴졌다.
“바쁘지 않으십니까?”
한참 후 내가 물었다.
“안 바쁘다.”
황제가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또다시 침묵…….
나와 달리 황제는 이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듯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계속 여기 계실 겁니까?”
“내가 있는 것이 싫은가?”
황제가 상처받은 얼굴로 물었다.
그냥 걱정되어서 물은 것뿐이었는데 저런 얼굴로 되물으니 내가 도대체 저 사람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 찬찬히 돌아보게 되었다.
물론 반성은 덤이었다.
“아닙니다. 그저 할 일이 많으실 텐데 저랑 있는 것이 걱정이 되어서 한 말입니다.”
“내가 안 바쁘다고 했잖나. 그럼 안 바쁜 거다.”
황제는 뒤에서 애절한 얼굴로 쳐다보는 군부대신이나 다른 보좌관들은 투명 인간 취급하듯 말했다.
뭐 본인이 이렇게까지 괜찮다는데 내가 더 뭐라 할 수가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식사를 할 건가?”
그는 여전히 나의 식사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예.”
“제시간에 먹을 건가?”
“예.”
“그럼…… 혹시…….”
어울리지 않게 황제가 또 우물쭈물하였다.
“같이 먹자는 말씀입니까?”
황제의 눈이 커졌다.
저렇게 솔직히 반응하는데 못 알아보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시원한 대답이 나올 거라고 예상한 것과는 달리 황제는 여전히 머뭇거렸다.
“그게 아니었습니까?”
“아니, 아니다. 아니 맞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나는 좋은데 혹시 그대가 안 좋을까 봐.”
안절부절못하며 버벅대는 황제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귀가 붉다 못해 터질 듯이 보였다.
여기에서 그것까지 지적했다가는 정말로 황제가 터져 버릴 것 같아 나는 못 본 척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이 말이 뭐 그렇게 어렵다고 불현듯 너무 부끄러웠다.
아마 내 귀도 황제의 귀 못지않게 붉어졌을 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일상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황제와 함께하는 식사 시간이었다.
황제의 언질이 있었는지 아니면 황궁 요리사 개인의 능력인지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가득 찬 식탁이 풍성했다.
기름기가 없고 담백한 음식들 일색이었다.
황제가 나와 음식을 번갈아 보며 내 눈치를 살폈다.
황제의 지시인 것 같았다.
“잘 먹겠습니다.”
전에 어떻게 먹었던가……? 어색해 죽을 것만 같았다.
분명 싫은 것은 아닌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간질거리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거기에다 황제는 먹지는 않고 계속해서 나에게 음식을 집어 주었고 내가 잘 받아먹을 때마다 황송한 얼굴을 했다.
“폐하는 안 드십니까?”
어색함을 피하고자 건넨 말이었는데 황제는 또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내가 뭘 했다고……. 나는 서둘러 다른 말을 이었다.
“폐하도 좀 드십시오.”
접시의 것을 집어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따라 하기도 했다.
물론 황제는 너무 행복한 얼굴로 얼른 받아먹었다.
그렇게 나와 황제는 예전처럼 서로의 음식을 집어 주며 맛있게 식사를 끝냈다.
황제의 궁에서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함께 내 궁으로 돌아왔다.
기어이 나를 따라나서고야 마는 황제를 말릴 수가 없었다.
당연히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은 황제를 보좌관들이 재촉하듯 졸졸 따라다녔지만 황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폐하, 도착했습니다.”
나는 내 궁 앞에 서서 나와 눈을 마주쳐 오는 황제를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래.”
황제 또한 간단히 응답했다.
“이젠 돌아가셔도 됩니다.”
“…….”
“가셔도 됩니다.”
“…….”
황제는 내가 거듭 말했음에도 도통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하아…….
한참 후 황제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웬 한숨이십니까?”
“내가 꼭 가야만 하나?”
그거야 당연히 가야지. 라는 말이 나왔지만 하루 종일 풀이 죽어 있던 황제를 떠올리며 다른 말을 생각해 보았다.
나의 대답이 느려지자 황제는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축 처진 목소리로 웅얼대며 말했다.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겠다. 그대도 좋은 꿈 꾸도록.”
거대한 황제가 안쓰럽고 아주 작게 느껴졌다.
나는 힘없이 돌아서는 황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조금씩 그를 향해 다가갔다.
아주 연약한 짐승을 건드리듯 조심스럽게 그의 옷깃을 잡았다.
“싫지 않으시면 계셔도 됩니다.”
황제가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황제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사실은 긴장되었다.
내가 느꼈던 것이 착각이라고 할까 봐 두려웠다.
거절의 말을 듣는 것이 이렇게나 가슴이 조여드는 일인지 이제야 알았다.
아, 내가 황제에게 못 할 짓을 하고 있었구나…….
“내가, 정말 그리해도 되나?”
다행히 황제는 한껏 상기한 채 기쁨에 흠뻑 젖은 얼굴로 동의의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맙다. 그리고…… 좋아해, 아니 사랑한다. 그대는 정말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운 행동만 골라서 하는지…… 너무 좋다.”
황제는 몹시나 들떴지만 애써 참는 목소리로, 담담함을 가정하여 나와 눈을 맞춘 채 몇 번이고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온몸이 녹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꽤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과 더불어 마음이 들떠 몽글몽글 피어났다.
황제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궁의 계단을 올라왔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황제의 명실상부한 애첩이 되어 버렸다.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1후궁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 왔다.
저번에 봤을 때 나를 보며 분명 악의에 차 손을 부들부들 떨었었는데…… 담에 만나면 독살을 하든 암살을 하든 할 것 같았다.
순식간에 몸이 차가워지고 떨려 왔다.
내가 부르르 몸을 떨자 황제가 걱정스레 나를 쳐다보았다.
“어디 아픈가?”
“아닙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나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황제는 이마를 찡긋거렸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황제와 함께 들어온 곳은 응접실이었고 그곳에서 우리는 차를 마셨다.
“뭐 필요한 것이 있나?”
황제는 뜨거운 차를 원샷하고는 나에게 물었다.
너무 뜨거웠을 텐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어 와 내 차만 뜨거운 줄 알았으나 곧 같은 주전자에서 나온 물임을 알았기에 당황스러웠다.
물론 황제는 정말로 일상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곧 그의 귀가 빨갛게 물든 것을 보고 애써 참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뭐든 갖고 싶은 걸 말하면 다 들어주지.”
갖고 싶은 거라…… 한 번도 그런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내가 감히 그 어떤 것을 갖고 싶다고 말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아니, 그러면 안 되었다.
나는 행복하면 안 되었기에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도 죄였다.
“없습니다. 충분합니다.”
“내가 또 실수했나?”
꽉 잠긴 황제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닌 척 굴었지만 죄스러운 마음이 튀어나올 때면 나조차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내 기분을 상대방에게까지 전염을 시킨다면 그것 또한 죄를 짓는 행동이었다.
더더욱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에게 나쁜 감정을 전하고 싶지 않았다.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충분히, 아니 넘치도록 잘해 주고 계십니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아무렇지 않아야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밤을 보낸 이후 황제와 내 궁에 나란히 앉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너무나도 이상한 날이었다.
혹시 황제는 알까? 의문이 들면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기에 나는 황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 혹시 그날 일 말입니다.”
“어느 날? 아. 그, 그래.”
황제는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거렸다.
목부터 귀까지 붉게 타오르는 것을 보니 아무렇지 않게 질문을 던졌던 나조차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혹시 말입니다.”
황제가 잔뜩 긴장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몸이 이상했습니다. 혹시 궁의에게서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곧바로 물어야 하는 사항이었지만, 지금까지 황제를 피해 다니느라 이제야 입에 담았다.
황제라면 왠지 궁의에게 곧바로 추궁을 해서라도 들었을 것 같았다.
“아. 맞다. 그대는 자세한 건 모르겠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사실 원래 인간의 성별은 남녀 외에 제삼의 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나?”
제삼의 성이란 혹시 오메가나 알파나 베타를 말하는 건가? 그런 건 판타지물에서나 나오는 내용 아닌가? 아니면 또 다른 말인가? 돌연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