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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안배-18화 (1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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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다행히 황제는 내 모습을 보고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원래 그러니까 태초에 신이 이 땅을 만들 때 남녀를 비롯하여 또 다른 성을 만들었다고 하더군. 자식을 낳는 것에 구애를 받지 말라는 뜻으로 성의 구분이 필요치 않을 거라는 예상으로 만들었는데 그 우주의 질서 같았던 법칙들이 어느 순간 깨어지기 시작했지.”

뭐 판타지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하긴 내가 영혼 이동을 한 상황이니 지금은 판타지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으로만 구분이 되어 버려서 제삼의 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세상을 마감해 버려서 이제는 구전이나 설화로 남았다고 했지. 그리고 나 또한 내 몸의 이상함을 깨닫지 못했었는데 그대를 만나고서야 알게 되었어. 사실 제삼의 성은 오직 일생을 함께할 이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그러한 안정감 같은 거였어.”

안정을 말하는 황제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다.

마치 안정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것처럼 보였다.

천하를 제 발아래 놓은 이가 무엇이 저다지도 불안해 안정에 목매는지 당시의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대를 봐서, 그대를 만나서, 그대에게서 비로소 안정감 같은 걸 처음 맛봤어. 그게 내가 알파고 그대가 오메가라는 특수한 성인 것도 있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영혼의 각인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지. 나는 본래 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만은 마음에 들더군. 그대와 나는 신이 처음부터 정해 준 운명이라는 테두리 안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그래서 그대만이 나를 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황제는 정말로 절절한 얼굴로 말했다.

가뜩이나 얼굴이 하얀 사람이 저런 얼굴로 말을 하니 신성함 그 자체였다.

왠지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은 들어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연히 느낌과는 별개로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충격적이었으나…….

내가 판타지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내가 직면한 현실에서 일어나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정하기에는 너무 사실적인 내용이었다.

지구에서 작가들이 말하던 제삼의 성이 어쩌면 허무한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 반, 신들이 그들의 아이디어를 도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 반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중요 도서들은 저절로 소멸이 되었고 중요한 것들만 황궁 도서관에 몇 권 남아 있는 터라 나도 자세한 것은 모른다.”

황제는 최대한 나에게 잘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대가 그날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몸 상태는 오메가들이 겪는 히트 사이클이라는 것이라더군. 성인이 되면 반려를 찾기 위하여 뿜어 대는 페로몬이 최고점에 도달했을 때 나타나는 것인데, 서로의 반려가 곁에 있으면 반대쪽도 사이클이 오는데 알파는 그걸 러트라고 불렀다더군. 변명 같지만 내가 그대에게, 아니 그대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대를 탐한 것은……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제야 말해서 미안하다.”

내가 사실 그런 제삼의 성에 대해서 완전 무지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세히 아는 것도 아니라서 황제의 세세한 설명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이렇게 흔들리는 마음 또한 내 의지가 아닌 그냥 한낱 본능이었다고 치부하니 한결 위로가 되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면 안 되었다.

“괜찮나?”

말을 끝마친 황제는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냐고? 글쎄…… 오히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랬기에 내 대답은 당연히…….

“괜찮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거듭 물었고 나는 몇 번이나 괜찮다는 대답을 반복했다.

그리고 나는 황제가 몇 번이나 물은 이유를 화장실 거울 속의 나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거울 속의 인영은 완전히 질려 버린 얼굴로……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인영이 나였으니까.

“난 정말 괜찮은데…… 왜 저런 얼굴인 거야.”

나는 몇 번이나 중얼거린 후 한동안 심호흡을 거치고서야 평상시의 얼굴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씻고 나가니 방에서 서성거리는 황제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품위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을 듯한 모양새였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치며 살던 황제가 저렇게 왔다 갔다 하리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거였다.

“폐하. 어디 불편하십니까?”

내 목소리에 황제가 우뚝 멈췄다.

그러곤 나에게 허둥지둥 달려왔다.

눈에는 걱정과 염려가 담겨 있었다.

아…… 나 때문이었구나. 마음 안쪽 어딘가가 간지러웠다.

마구마구 긁어 버리고 싶었는데 어디를 긁어야 할지 몰라 불편함을 참았다.

황제는 저토록 걱정 어린 얼굴을 하면서도 나에게 더는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다만 계속해서 나의 얼굴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늦었는데 자고 가실 겁니까?”

황제의 눈빛이 흔들렸다.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에 인제 와서 저런다는 것이 웃겼으나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 혹시 나와 함께 자려는 건가?”

황제의 기대감 어린 얼굴을 본 후에야 내가 말을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끝까지 간 사람들끼리 손잡고 잡시다 하리라곤 생각지 않을 테니까. 이런 생각을 하니 그제야 황제가 의식되기 시작하였다.

황제의 마음을 알았고, 신의 생각을 들었음에도 그렇게 공공연하게 그러한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해 왔던 생각의 흐름을 갑자기 틀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서둘러 손을 저으며 황제에게서 물러났다.

“그냥, 잠, 잠만 잘 겁니다. 그냥 눈 감고 모두가 잠드는 그런 잠 말입니다.”

“나, 나도 그냥 그 잠을 말한 거였다.”

황제는 얼굴을 붉히고 말까지 더듬으며 손사래를 쳤다.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우리는 어색한 상황 속에서 둘이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황제는 이불 속이 아닌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안 추우십니까?”

걱정이라기보단 어색한 침묵이 싫어서 물었다.

“그래. 춥지 않다.”

“네.”

나는 큰 침대의 커다란 이불을 혼자 덮은 채 눈을 감았다.

황제는 잠이 안 오는지 계속 뒤척이고 있었다.

이번엔 정말로 추워서 그러나 싶어 걱정을 담아 말했다.

“추우시면 이불을 덮으십시오.”

“…….”

대답이 없기에 감았던 눈을 떴다가 깜짝 놀랐다.

황제가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와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으악.”

깜짝 놀라 비명이 터져 나왔다.

“미안.”

황제는 서둘러 일어나며 뒤로 물러나다 침대에서 떨어질 뻔한 나를 잡아 주며 낮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원체 낮은 목소리가 지금은 더욱더 나직했다.

나는 같은 남자였기에 그가 왜 그런지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욕망까지도…….

솔직히 느낌이 아니라 육안으로도 가능했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기겁하며 황제에게서 물러났다.

너무 서둘러 도망친 탓에 침대에서 떨어지는 걸 황제조차도 막지 못했다.

으아악.

엉덩이가 떨어지는 동시에 머리에서도 쿵 소리가 났다.

엉덩이가 너무 아픈 탓에 머리가 아픈 것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괜찮나?”

“그, 그거 좀, 어떻게 좀 해 봐요!!”

황제는 내 눈길과 손길을 따라 고개를 내렸다.

“아, 이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쁘지나 말든가.”

“뭐라고요?!”

너무나도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하는 황제로 인해 기가 막힌 사람은 오히려 나였다.

“그대가 옆에 있는데 이게 가만히 있으면 나는 남자도 아니다.”

“허…….”

이럴 때 기가 막힌다는 말을 쓰는구나……. 그래, 이 세상에 가장 알맞게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말이 있다면 그것은 기가 막힌다는 것일 것이다.

이렇게 알맞은 상황에 써먹으라고.

“그보다 엉덩이는 괜찮은 건가?”

“머리도 부딪쳤거든요!!!”

사실 엉덩이가 시큰거렸지만, 굳이 그곳을 콕 집어 대는 황제 때문에 얼굴에 열이 올라 버럭 소리 질렀다.

“괜찮나?”

황제의 커다란 손이 나의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쿵쿵 심장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지금 이 심장 소리가 나에게만 들리는 것인지 아니면 황제에게까지 들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 얼굴이 홍당무인 양 붉게 물들었다는 것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얼굴도 붉은 것이 궁의를 부르는 것이 낫겠군.”

그제야 정신을 퍼뜩 차린 나는 황제를 말렸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침대에서 떨어져 엉덩이가 아프다고 의원에게 보였다간 수치사할지도 몰랐다.

황제는 내가 단호하게 싫다고 하자 한숨을 한 번 쉬고 나를 안아 든 채 침대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그대로 침대 속으로 들어왔다.

“이젠 놓아주셔도 됩니다.”

바로 앞에서 황제의 숨소리까지 들리자 심장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냥 잠시만 이렇게 있어 주면 안 되나?”

사실 싫은 건 아니었다.

그저 불편할 뿐. 내 심장 소리도 황제 심장 소리도 매우 컸지만, 더욱 불편한 것은 허벅지를 찌르는 단단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티를 냈다가는 아직도 생생한 며칠 전의 일들이 벌어질까 봐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연.”

황제의 목소리가 무지무지 낮아졌다.

“예, 폐하.”

일부러 나는 딱딱한 목소리를 냈다.

“연.”

황제의 목소리와 눈빛이 신경 쓰였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대답했다.

“예, 폐하.”

“입 맞춰도 되나?”

기어이 황제가 자신의 욕망을 입에 올렸다.

“안 됩니다.”

“알았다.”

당연히 황제는 더 조르지 않은 채 누워 있었고, 그렇게 우리는 눈치 싸움을 하느라 밤을 새운 채 피곤한 아침을 맞이했다.

“폐하…… 그것은…… 안 됩니다……. 아닙니다.”

새벽에 잠깐 잠이 든 것인지 짧게 끊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으음.”

목소리가 저절로 잠겼다.

피곤이 몰려왔지만 그렇다고 잘 것도 아니기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깨어났나?”

웬일로 멀끔하게 씻고 옷까지 차려입은 황제가 나에게 다가왔다.

이전까지 황제의 행동을 보면 아침에 일어나도 내 옆에서 누워 있었는데 오늘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어디 가십니까?”

황제의 눈 속에 온화함이 깃들어 있었다.

대답은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내 머리만을 쓰다듬었다.

“하아…… 가기 싫다.”

어디에 가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똑같은 질문을 다시 했다.

“어디 가십니까?”

“일하러…….”

황제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긴 황제니까 당연히 일을 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니. 일하면서 먹어야지. 그대는 준비시켰으니까 먹도록 해.”

황제는 애틋한 눈으로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다 일어나 문을 나섰다.

적막이 나를 감쌌다.

이곳이 이렇게 넓었나 싶었다.

“마마,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솔직히 별로 입맛이 없었다.

하지만 먹으라고 콕 집어서 말했던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와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으로 차려진 밥상과, 내가 좋아하는 적막함과, 내가 좋아하는 나만의 공간인데 좀처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나는 손을 들어 가슴께를 꾹 눌러 보았다.

이러면 조금은 시원할 줄 알았건만 겉이 아닌 속의 불편함 때문인지 괜찮아지지가 않았다.

“마마,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신가요?”

베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 괜찮아.”

나는 목구멍으로 그냥 음식을 욱여넣었다.

솔직히 맛있게 생긴 음식들이 무슨 맛인지 모르고 그냥 삼켰다.

그때 베스가 몇 번이나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우물거리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내가 먼저 물었다.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베스”

“사실은 마마, 아홉 번째 후궁 마마께서 아침부터 와 계셨습니다.”

아. 그녀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늘 나에게 정보를 물어다 준 그녀인데 한동안 연락이 안 왔음에도 따로 알아보지조차 않았다.

황제와 내 관계에 대해서 고민하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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