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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안배-19화 (19/60)

19화

“그럼 안내하지 않고”

“폐하께서 마마 식사 끝내기 전에는 아무것도 못 하게 하시라 명하셨습니다.”

폭군의 다정함이 싫지만은 않았다.

“다 먹었어. 응접실로 갈게.”

안 그래도 먹기 싫었던 음식이었는데 누군가 기다린다고 들으니 더더욱 무엇을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입을 대충 닦고 응접실로 걸음을 향했다.

다행히 9후궁은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지 않았는지 앉아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공간에 온 것처럼 아주 잘 어울렸다.

“오셨나요?”

물론 내가 할 질문을 본인이 하는 것을 보니 정말로 자신의 공간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주객이 바뀐 느낌입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맞은편 의자에 몸을 실었다.

“아, 뭐 어때요. 먼저 자리 잡은 사람이 임자이지요. 솔직히 이 안에 우리 것이 어디에 있나요. 공자님도 저도 그냥 객식구일지도 모르는걸요.”

들어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한없이 나 자신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살아가면서 내 것을 가진 기억이 없는데, 왜 그때는 괜찮던 것들이 지금은 괜찮지가 않은지 모를 일이었다.

“용건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시시콜콜한 소리를 나눌 만큼 가깝지는 않았기에 용건을 먼저 물었다.

물론 그녀에게서 궁 안의 소문을 전해 들었기는 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그녀와 나는 한 남자를 모시는 후궁이었기에

“어머. 우리가 용건이 있어야 만나는 사이였던가요?”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무척이나 상처받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인위적이라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얼굴은 내가 가장 많이 사용했고, 다른 사람의 표정 변화를 평생 지켜보며 살아왔기에.

그럼에도 미인이 저런 얼굴을 하면 나는 속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놀러 오셨습니까?”

“재미없네요.”

내 반응에 9후궁은 흥, 하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 차를 마셨다.

처음엔 대하기 어려웠던 그녀도 어느샌가 편해져 있었다.

마치 동생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미친, 동생이라니……. 이건 나 때문에 세상을 떠난 하나뿐인 동생에게 너무 실례되는 생각이었다.

요즈음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더니 감히 행복해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쓸데없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거겠지.

나는 최대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하지만 마주 앉아 있는 여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차만 마셨다.

참으로 무심한 사람이었다.

“사실은 알려 줄 게 있어서 왔어요.”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9후궁이 입을 열었다.

이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계속해서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던 그녀는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듯 진지하게 변모했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내 질문에 그녀는 대답은 하지 않고 한숨을 쉬며 입을 달싹이다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이건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극비거든요.”

나는 순간 극비라고 말하는 그녀가 무서워 보였다.

특히 극비라는 것을 나에게 굳이 밝히는 그녀를 멀리하라고 본능이 소리를 지르는 것만 같았다.

내가 무섭든 말든 9후궁의 입은 닫히지 않고 술술 열렸다.

“전쟁이 일어날 거예요.”

담담히 내뱉는 말에 순간 힘이 탁 풀렸다.

다아는 사실 이었다. 황재와 다투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 제국 또한 전쟁으로 다져진 국가이기도 했다.

“그런데요?”

내 무심한 말에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섭지 않으세요? 죽을지도 모르는데?”

“네, 안 무섭습니다.”

정말로 무섭지 않았다.

내가 무서워한다고 해서 일어날 일이 안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9후궁은 한숨을 한 번 쉬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나 또한 그녀와 눈을 맞춘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는 평화주의자예요. 전쟁으로 다져진 제국의 후궁이라는 것이 우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전쟁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그런데 저는 이 전쟁을 막을 방법을 모르겠어요. 한낱 후궁이 뭘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왠지 공자님은 하실 수 있을 것 같아 말씀드린 거예요.”

“전에는 방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만. 그리고 저를 높아 사주시는것은 감사합니다만 할수 없을겁니다.”

비꼬는것이 아니었다. 그저 있는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나는 할수 있는것이 없었다.

정확히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지요. 물론 공자님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지만요”

“방금 한낱 후궁이 바꿀 수 있는 게 없다고 하신 걸로 압니다만.”

“그렇죠. 그런데 그거는 저이고요. 공자님은 한낱 후궁이 아니시니까요. 이 제국에서 폐하 다음으로 가장 고귀한 자리에 앉으실 분이지요.”

“절대 아닙니다. 그리해서도 안 되는 거고요. 혹여 누가 들을까 봐 겁이 납니다.”

“저런, 언제부터 공자님이 이렇게 소심해졌는지 모를 일이네요.”

9후궁이 싱긋 웃었다.

나는 처음부터 겁이 많았는걸…… 하지만 대답 대신 그저 살며시 웃어 보였다.

“어쨌든 공자님은 뭘 하실 생각이 없으시다는 거죠?”

“내가 뭘 한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면요?”

“가능성만으로 매달리기에는 제가 많이 겁쟁이입니다.”

“그런데 공자님, 그거 아세요?”

“뭘 말입니까?”

“진짜 겁쟁이는 본인을 겁쟁이라고 하지 않는답니다. 그렇게 인정하는 것 자체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니까요. 좀 더 자신감을 가지셔도 좋을 거예요. 그럼에도 공자님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어쩔 수가 없지요. 제가 여기 머문 시간이 너무 긴 것 같으니 이만 가 봐야겠어요. 오늘 즐거웠답니다.”

내 대답을 듣지 않은 채 그녀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응접실을 나섰다.

산들바람이 귓가에 스쳤다.

왠지 나를 감싸는 느낌에 기겁하며 일어섰다.

“무슨 짓입니까?”

“……어떻게 알았느냐?”

신이었다.

“문이 다 닫힌 방에 바람이 불어온다면 그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내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기에는 저번에 본인 입으로 이곳이 신님의 영역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그랬었구나. 그대는 정말로 눈치가 너무 빨라서 문제라니까. 뭐 그대처럼 자란 인간들은 대부분 눈치가 빠르긴 하더구나.”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오셨습니까?”

“내가 보고 싶었느냐?”

“절대 아닙니다.”

“부끄러움도 많구나.”

“절대 아닙니다.”

“그래그래. 그대가 이렇게나 나를 반겨 줄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구나.”

도대체 내 말은 어디로 들어 먹은 건지 더는 반박할 마음이 들지 않아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참 동안 혼자서 감상에 젖어 말을 하던 신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리고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베스. 무슨 일이지?”

“폐하께서 오후에 산책이 가능하신지 전언을 보내셨습니다.”

“그래, 그러지 뭐.”

“네, 마마. 그렇게 말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시종이냐?”

“네, 지금은요.”

“좋은 기운을 가진 아이로구나.”

“베스가요?”

“그래”

“그런데 좋은 기운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입니까?”

“선에 가까운 기운이지. 정확히는 이 세계를 관리하는 나에게 가까운 기운이란다. 그네들은 신성력이라고들 하지.”

뭐 신성력? 생각지도 못한 베스의 능력에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럼 베스가 사제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다 사용하는 것은 아니란다. 신성력을 사용하려면 개화라고 하는 재능을 틔우는 길을 터 주는 것이 중요한데, 아직 저 아이는 길을 트지는 못했더구나. 길을 튼다면 사용 또한 가능하겠지.”

쳇, 뭐야. 저런 말은 누가 못 해?

원래 천재는 뇌의 능력을 일반인보다 더 다양하게 사용해서 천재가 된다고들 한다.

인간은 누구나 천재가 될 가능성이 있지만, 뇌를 사용하는 능력을 개발 못 해서 천재가 되지 못한 것이다.

결국은 뇌를 사용하는 거나 신성력을 사용하는 거나 본인이 능력이 안 되면 어쩔 수 없다는 말이다.

금세 관심이 꺼졌다.

방에만 갇혀 있다 보니 신성력을 쓰는 사람을 못 봤던 터라 구경하나 했는데…… 아쉬움에 입이 샐쭉해졌다.

“신성력에 관심이 가느냐?”

“뭐 그렇다기보다는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이 궁금하긴 합니다.”

“그래? 그건 그대도 가능해.”

“그렇겠죠. 제가 능력을 개화시키기만 한다면요.”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신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비웃어라, 비웃어. 원래 그런 거 아니야? 능력을 개화한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은 천재라고 증명된 말이라는 걸 누가 모를까.

“그대는 내가 이 세계를 관리하는 관리자라는 것을 가끔 잊는 거 같아. 늘 입으로는 신님 하면서도 정작 신으로 생각하지 않는 느낌이야. 물론 그렇다고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란다. 그것 또한 그대의 매력이니까.”

왠지 놀리는 듯한 말투에 기분이 슬슬 나빠 왔지만, 그것보다 왠지 신성력을 사용하게 해 줄 것 같아 저절로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그래서 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렇게 귀여운 얼굴을 하면 안 되는 것도 되게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래. 당연히 가능하지. 단, 그대가 해 줘야 할 것이 있단다.”

쳇. 그래,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어.

“무엇입니까? 참고로 제 능력 밖이면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하느냐? 그대가 해내지 못해도 괜찮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대답을 해 주면 된단다.”

역시 신이었다.

내가 말을 뱉으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알고 저러는 것이었다.

나는 왠지 신의 다 안다는 듯한 그런 모습이 짜증이 났다.

솔직히 신은 내가 허락하든 거절하든 별로 타격을 받지 않을 테지만, 아니 한낱 흥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신의 손바닥 안에서 몸부림칠지라도 왠지 신의 부탁이라는 것에 대해 들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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