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결심이 섰나 보구나.”
역시 신은 다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것에 대해 기분이 나쁜가 보구나.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걸. 그대가 봐줘.”
바람이 살며시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아서 더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인간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속으로 구시렁대는 것밖에 없었다.
“보자. 황제는 일 보고 있는 것 같고, 너의 심지가 곧은 시종은 음, 못 들을 것 같으니 용건을 말하마.”
“그런 것도 아십니까?”
역시 관음증 환자답게 여러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곤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관심이 옮겨 갈까 걱정이 되느냐?”
“전혀 아닙니다만.”
내가 정색하건 말건 신은 절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싱그러운 목소리로 감미롭게 웃고 있었다.
“빨리 하실 말씀을 하십시오.”
“이런 이런, 급하구나. 하지만 빨리 알려 주는 게 맞으니까 얼른 알려 주마. 내가 왜 그대를 이 세계에 보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게. 너무 생각조차 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마냥 그렇구나, 하고 짐작하던 생각은 있었다.
“제가 너무 불쌍해서요.”
“이런. 그대는 너무 순진하구나. 생각해 보렴. 과연 지구에 남은 영혼 중에 그대보다 불쌍한 영혼이 없었을까?”
생각해 보나 마나 그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불행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나를 사랑해 준 가족이 있었다.
비록 피가 섞인 건 아니었으나, 나는 피가 섞여서 가족이라는 사람들보다 피가 안 섞여도 충분히 핏줄 그 이상의 유대를 이룰 수 있는 가족을 겪어 봤다.
하지만 그런 분에 넘치는 가족을 못 만난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할 터였다.
아니, 아주 많았을 것이다.
“이제 알겠느냐? 나는 그대가 불쌍해서 이 세계에 따로 보내 준 것이 아니다.”
“그럼요? 혹시 지켜보는 것이 중요해서요? 그 보통 연예인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던데 그런 종류의 관심입니까?”
“하하하하……. 저런…… 이럴 때 그 뭐냐. 자뻑이 심하다, 라는 말을 인간들이 쓰던가? 그대는 그만큼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느냐?”
순식간에 볼이 달아올랐다.
아니면 도대체 이유가 뭔데…….
“이런 이런 조금만 더 놀렸다가는 정말로 삐지겠구나. 그대에게 매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니 자뻑은 아니구나. 그대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니 화내는 것은 그만두렴.”
나는 순간 어쩌라고, 라는 말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말씀하십시오.”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그래그래. 정말로 말하마. 사실 나는 그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적임자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그대는 황제가 전쟁을 일으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아까 9후궁도 왔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전쟁을 막아 주련?”
“예?”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신이나 9후궁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정말로 몰랐다.
“들은 대로니까 재차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나는 네가 황제가 지금부터 일으키려는 전쟁들을 막아 주길 바란다.”
신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그의 목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처음 만났을 때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그때 느꼈던 공포의 느낌보다는 힘을 실어 주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하고자 한다면 그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일단은 전쟁을 일으키려는 사람이 폐하라는 겁니까?”
“그래.”
“그럼 폐하는 왜 전쟁을 하려고 하는 거지요?”
“그건 이제부터 그대가 알아봐야지.”
“무책임한 말씀만 하시는군요.”
“정말로 그대는 신을 신처럼 대하지 않는다니까. 신벌이 두렵지 않나?”
“그랬다면 벌써 받았을 테니까. 그리고 기분 나쁘시다고 벌을 내리진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하하, 그대는 참으로 귀엽기 그지없다니까. 필요할 때만 갖는 믿음이라니. 그리고 기분이 나쁘지 않으니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말려무나.”
진지하던 목소리가 사라지고 여느 때와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은 폐하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말하지 않았더냐. 나는 그대가 해내지 못한다고 해도 탓하지 않을 거야. 그저 그대가 최선을 다해 주기만 한다면 된단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무운을 비마.”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신이 돌아갔다.
나는 신이 간 것 같은 방향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걸음을 떼었다.
“베스, 폐하께로 가야겠어.”
“산책을 하시려면 시간이 아직 남았습니다, 마마.”
“알아. 하지만 지금 가야 할 것 같은걸.”
베스는 머뭇대더니 내 뒤에 와서 섰다.
지금 모시는 주인이 누구인지 완벽히 숙지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씩, 하고 베스를 향해 한 번 웃어 준 뒤 궁을 나섰다.
하늘은 푸르렀고 궁은 화려했으며 햇빛은 매우 따뜻했다.
그리고 나는 궁에서 가장 피해야 하는 여인을 맞닥뜨렸다.
그것도 황제의 궁 앞에서……. 그녀는 나오는 길이었고 나는 황제에게 들어가는 길이었으니 운이 좋았다면 엇갈릴 수도 있었건만, 불운의 아이콘답게 그녀와 마주치고야 말았다.
“오랜만입니다.”
눈을 치켜뜬 그녀를 향해서 먼저 고개를 숙였다.
“30번째 후궁께서는 여전하시군요.”
저 여전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연히 좋은 의미는 아닐 것이기에 나는 무해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웃는 얼굴로 성질 긁는 것도 여전하시고요.”
이 말은 억울했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왜냐하면 1후궁은 화를 내도 예뻤으니까.
나에게 조금만 칼을 덜 갈았어도, 나는 그녀와 친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뭐, 피차 좋은 얼굴로 볼 사이는 아니고, 또 이곳에서 더 있었다가는 폐하께서 오해하실지도 모르니 전 이만 가 보도록 하지요.”
나는 속으로 잘됐다 하고 쾌재를 불렀다.
그때 1후궁이 내 귀에 입술을 바짝 붙인 채 속삭였다.
“폐하의 밤을 허락받았다고 너무 즐거워하지 마세요. 그래 봤자 그대는 후계를 생산할 수 없는 몸이랍니다. 제가 이 나라에서 폐하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고, 내 아기님이 폐하의 뒤를 이어 가장 높은 이가 된다면 이 치욕은 배로 돌려드릴 테니까요. 그러니까 그 기분 나쁜 웃음도 웃을 수 있을 때 실컷 웃어 두세요, 30.번.째.후궁.”
여인이 한을 품으면 정말로 서리가 내릴 법한 웃음을 지으며 떠나는 그녀를 나는 정신 줄을 놓은 채 지켜보기만 했다.
“전쟁을 막기 전에 내가 저 얼음 가시에 얼어 죽든 찔려 죽든 할지도 모르겠네…….”
“네? 무슨 말씀인지 못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마마.”
내 중얼거림에 베스가 머리를 숙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었다.”
나는 그길로 다시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해 다시 걸었다.
듣기로는 황제의 궁에 들어오면 그 어떤 사람이라도 황제를 만나기까지 수많은 관문이 있다고 들었다.
전쟁광답게 황제의 궁은 갑옷을 갖춰 입은 기사들이 철통 방어를 했고, 황제에게 다가가려면 그 어떤 위험도 없어야 했기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위험 요소들은 제거해야 했다.
물론 1후궁은 이 황궁에 가장 먼저 들어온 여인이었고, 제국 다음으로 가장 강대한 왕국의 왕녀였기에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은 수월했지만, 그럼에도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의 어떤 언질이 있었는지, 황궁 안에서 나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황제를 대하듯 모두가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황제 외에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황제만의 ‘블랙헤드’ 기사단조차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런 식이니까 1후궁이 나에게 피를 물고 해 보자며 덤벼드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그만두란다고 여기서 내 말을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나는 그냥 늘 그렇듯 이 상황을 받아들인 채 황제의 집무실 앞에 가서 섰다.
“폐하. 연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안에서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곧 벌컥 하며 급하게 문 여는 소리가 이어졌다.
“연?”
“예, 폐하. 접니다.”
“그대가 정말로, 그대의 의지로 나를 찾아온 것이 맞나?”
황제의 귀신같이 창백했던 얼굴이 복숭아처럼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막 이제 사랑을 시작한 사춘기 소년과도 같은 모습에 찾아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예, 폐하. 산책 시간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오늘은 제가 폐하께 오고 싶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 아니 절대 아니다. 나는 그대가 언제 찾아와도 기뻐.”
황제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뒤를 흘끔거렸다.
문 뒤로 높게 쌓여 있는 서류들과 방금까지 회의를 했는지 군복을 갖춰 입은 보좌관들의 모습이 보였다.
“제가 방해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패기 있게 왔지만 정말 방해했다는 생각에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바로 돌아가려고 몸을 움직였건만 나의 팔을 급하게 잡는 황제 때문에 그대로 멈췄다.
“진짜 끝났다. 거의 다 끝났어.”
“거의 다라는 말씀은 아직 할 일이 있으시다는 겁니다만.”
“금방 끝낼 수 있다. 아주 조금만 저기에서 기다려 주면 안 되겠나? 진짜 다 그만두고 싶은데……. 그대가 정말로 돌아가야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황제는 집무실의 소파를 가리키다 말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황제의 저런 표정에 약했다.
한없이 포악한 폭군이 나에게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지가 않았다.
“좋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파아앗, 하고 황제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저런 모습들이 귀엽게 느껴지는 것이 이제는 나에게 일상과도 같았기에 나는 황제가 끄는 손길대로 방 안으로 얌전히 발걸음을 옮겼다.
황제는 소파 앞까지 나를 데려간 후 얌전히 앉혀 놓고 진득한 눈빛으로 쳐다보다 담백한 볼 뽀뽀를 한 번 하고는 수줍어하며 서류 더미 속으로 들어갔다.
정말로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황제가 부끄러움이라니!!! 황궁의 사람들이 본다면 세상에 멸망이 찾아왔다고 생각할 만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