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계속하도록 하지.”
나를 대하던 상냥함은 사라진 채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황제를 보니 새삼 황제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무표정한 얼굴로 주저함 없이 공작인 이 몸의 아비에게 칼을 들이밀던 모습이, 지금까지 나에게만 말랑하다 해서 폭군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는데……. 새삼 다시 황제를 보게 했다.
“폐하. 그쪽으로는 산맥이 이어져 장기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작전으로 가면 평민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작전 회의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방어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은 포식자로서의 전술들이었다.
“내가 언제 전쟁 시기에 민간인을 신경 썼나?”
황제의 한마디에 보좌관들의 입이 닫혔다.
저건 너무 심하네,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군인은 모쪼록 노인과 미인과 아이는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하에 검을 들어야 하는데, 군주가 저 모양이니 아래 기사들이라고 해서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문제는 그 누구도 황제의 이런 점들을 지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과연 저 전쟁 미치광이 황제를 되돌릴 수 있을까?’
저절로 걱정이 들었다.
내 생각의 회로가 복잡하거나 말거나 황제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대들은 그저 가장 효율적인 방법만 입에 올리면 된다. 그 외에 다른 것들은 그대들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 따위를 하고 싶으면 내가 누누이 말했지. 나의 목을 베고 이 자리에 앉으면 된다고.”
황제는 서류 위로 검을 집어 던졌다.
쿵 터더덩 팅.
묵직한 소리가 났다.
꽤나 무거운 검일 거라는 것에 내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다.
그 소리에 놀란 것은 물론 나 하나였다.
그제야 싸늘하던 황제의 기운이 거둬졌다.
“오늘은 이만하도록 하지.”
토를 다는 이가 없었다.
황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
황제는 머뭇대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대에게 무섭게 굴 생각은 없었다. 그 저기 혹시 내가 싫어졌나?”
글쎄. 황제가 저렇게 행동하는 걸 보니 놀라기는 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넘어가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았다.
내 생각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황제가 서둘러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나를 바라봤다.
“미안. 정말로 미안하다. 그러니 나를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 그제야 나의 이 석연치 않음은 황제의 사과가 없어서 생긴 것임을 알았다.
사과를 받으니 찜찜했던 기분이 아주 괜찮아졌다.
그리고 버려진 강아지인 양 끙끙대는 모습이 썩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만을 향해 최대한 애교를 부리는 것과 같은 모양새였으므로,
그때 황제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나 또한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신을 만났을 때는 싱그럽고 상쾌한 기운이 느껴졌다면, 지금은 아주 욕망적이고 끈적한 무언가로 온몸을 갈구하는 느낌이었다.
그때 별안간 황제의 검은 눈동자가 검붉게 물들어 갔다.
마치 폭발 직전의 용암을 보는 것만 같았다.
나의 손을 잡은 황제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부러질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기에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폐하!! 아픕니다. 폐하!!”
황제가 몸을 퍼드덕 떨더니 내 눈동자를 보고 내 손목을 보고 퍼드덕하며 손을 놓아주었다.
“미안, 미안하다. 절대 해를 끼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이 그렇게 불안한지, 이번에는 황제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이 황제를 향해 올라갔다.
“괜찮습니다. 그저 조금 아팠습니다. 아주 조금요. 그리고 폐하께서 금방 놓아주셔서 지금은 괜찮습니다.”
몇 번이나 황제의 등을 토닥이자 떨던 어깨가 멈췄다.
그리고 나의 어깨가 젖어 들어갔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까지 구석으로 몰아가는지 나로서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까지 목매는 황제를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때 먹먹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그대가 나를 두려워할까 겁이 났다. 사실 그대가 나를 무서워해도 상관이 없다고 계속 생각했었는데, 정작 두려움에 떠는 그대의 얼굴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것이 이렇게 큰 두려움일 줄 몰랐다. 나의 두려움까지도 안아 주어서 고맙다.”
더 이상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안고 있을 뿐이었다.
황제에게 전쟁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래, 내일 말하지 뭐.
“일단 물이라도 좀 마시십시오.”
나는 눈물이 멈춘 것 같은 황제를 떼어 낸 다음 컵에 물을 따라 주었다.
황제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쫄래쫄래 나를 따라다녔다.
“이 상태로는 산책은 어려울 것 같고, 뭘 하시겠습니까?”
“하아, 그대는 참 내 보좌관보다 더 보좌관 같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그랬던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신경 써 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나에게 황제는 모셔야 할 상사가 맞았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습니까?”
“그래. 조금만 더 살갑게 대해 줄 수는 없을까? 방금 두렵다고 한 것치곤 염치없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대에게서 부하 같은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대를 내 반려로 맞을 생각이거든.”
“미치셨습니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버럭 하고 올라갔다.
당연히 황제는 벼락같은 내 목소리에 놀란 눈을 했다.
사실 놀란 것은 황제보다 나였다.
속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겉으로 나왔으니까.
“왜 그렇게 격한 반응이지? 그대가 아니면 누가 내 옆자리에 앉을 수가 있다고, 지금까지 나와 밤을 보낸 이 자체가 그대밖에 없는데.”
생각보다 놀라운 말이었다.
무릇 폭군이라 하면 신하는 무 썰듯 베어 버리고 여인이란 여인은 다 취해야 그 이름에 걸맞은 게 아닌가.
하지만 내 앞의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폭군은 자신은 순결을 지켰노라 말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의 테크닉으로 본다면 믿음성이 전혀 없는 말이었고, 나에게조차 별로 중요한 발언은 아니었기에 그냥 넘기기로 했다.
“절대 안 됩니다. 저는 폐하와 그런 관계가 되기 싫습니다.”
“어떤 관계를 말하는 거지? 황후 자리가 싫은 것인가?”
“저는 폐하와 음, 동맹 관계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황후 자리는 당연히 탐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남자입니다. 후계를 생산하지 못하는 황후의 자리가 얼마나 위신이 있겠습니까? 저는 모두에게 손가락질받는 자리라면 절대로 사양입니다.”
“하아. 그대는 지금 그대와 내가 그때 말했던 친우라는 관계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절대 안 돼. 왜냐고? 내가 그런 생각이 없기 때문이지. 왜냐하면 나는 그대를 연모의 감정으로 좋아하기 때문이야. 그대는 자주 잊어 먹는 것 같으니 기억하도록 해, 연. 또한 그대는 나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아주 많이 낳게 될 거야. 후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미친 황제가 점점 더 미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모든 발언에 문제가 있어서 도대체 어느 부분부터 짚어 줘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가장 중요한 부분부터 짚어야 했다.
왜냐하면 절대 내 귀로 듣고 내 머리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문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잠, 잠깐만요. 폐하. 정말로 제정신이십니까? 아이라니요? 남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지나가던 어린아이도 다 압니다만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설마 방법이 있다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절대 어떤 방법이든 저는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자가 아이라니. 이 얼마나 괴상망측한 일입니까? 신이 온다면 신벌을 내릴 일입니다.”
“나는 지극히 정상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내가 알려 줬던 것 같은데 알파와 오메가에 대해서. 그 기록에 의하면 알파와 오메가는 남자와 여자 외의 제삼의 성이고, 그들은 남녀 관계없이 오메가는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대와 내가 사랑을 나눈다면 세간의 부부들과 같이 평범하게 아이를 가지고 낳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뒤통수를 누군가 콱, 하고 가격한 것처럼 얼얼했다.
그딴 개 같은 경우가 어디 있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저 심호흡을 했다.
“그러니까 폐하 말씀은 제 배 속에 아이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이를 사리문 채 이가 떨리는 줄도 모르고 황제를 향해 물었다.
남자와 남자가 사랑을 나눠도 된다는 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내 몸속에 다른 생명이 자라도 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왜 어디 안 좋나?”
황제가 내 볼에 손을 올렸다.
아니 올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놀라 그 손을 쳐 버렸기 때문이었다.
“미안. 그대를 놀라게 할 생각이 아니었다.”
황제는 자기가 어떤 표정을 한지도 모른 채 나를 바라보며 말을 뭉뚱그렸다.
아까처럼 나에게 또박또박 말을 하던 황제가 아니었다.
황제는 당장 바스러질 것 같은 것을 쳐다보듯 애처롭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잔뜩 상처받은 얼굴로.
“괜찮습니다. 질문에 대답을 해 주십시오.”
“아니 벌써 생기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게 금방 생기는 거였다면 이 나라는 아이로 득실거렸을 테지.”
저딴 발언이나 하는 황제라니.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저건 분명 성교육이라는 것을 받지 않은 사람의 말이었다.
확실한 것을 알려면 궁의를 만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냥 나는 신과 한 약속을 지키며 겸사겸사 산책이나 하려고 찾아왔다가 이런 봉변을 당할지 추호도 몰랐다.
정말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역시 황제는 미친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