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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안배-22화 (22/60)

22화

황제가 나를 쫓아오든 말든 그대로 방을 나와 버렸다.

나는 지금 당장 확인해야만 했다.

황제가 뒤에서 나를 향해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한 채 그냥 무작정 내 궁을 향해서 걸었다.

만약, 아주 만약에 내 몸속에 새로운 생명이 자라난다면…… 나는 어떡해야 할지 더럭 겁이 났다.

여인이 아닌 내가 아이를 품어 낳아 기른다는 것은 사실 내 인생에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황제는 차마 나를 붙잡지 못한 채 내 뒤에서 나를 졸졸 쫓아왔다.

그리고 그 뒤로 황제를 수행하는 이들이 따라왔다.

황제의 앞에서 걷는 후궁이라니, 모두가 우리를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황제가 후다닥 내 옆으로 왔다.

아주 들릴 듯 말 듯 부른 내 목소리에 이렇게까지 반응을 해 주는 황제라니. 사랑이 참으로 무섭기는 했다.

자신의 위신과 안위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연, 그래, 힘든 것이냐? 내가 안아 줄까?”

상처받은 것은 본인이면서 그가 입에 올리는 말은 나를 걱정하는 말이었다.

“남들이 보면 비웃습니다. 저는 이만 혼자 갈 테니 폐하께서도 돌아가 주십시오.”

“누가 감히 내 궁 안에서 나를 비웃는다고, 그대는 그런 걱정 하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그저 확인만 하면 됩니다. 폐하께서 신경 쓰실 일 아닙니다.”

황제는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황제를 버려둔 채 걸어갔다.

황제는 더는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베스.”

궁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베스를 불렀다.

당연히 베스는 금방 돌아온 나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나에게 다가왔다.

“네, 마마. 무슨 일 있으십니까?”

“궁의, 궁의를 불러 줘.”

“네 마마.”

베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나갔다.

내가 어디 아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마마, 궁의가 금방 도착한다고 합니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어디 안 좋은 거는 아니어서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베스가 눈에 띄게 안도하는 것이 보였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모습에 나는 마음이 따스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베스에게 잘해 줘야겠다는 다짐은 덤이었다.

“마마, 궁의가 도착한 듯싶습니다.”

“얼른 들어오라고 해 줘.”

베스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문을 열었다.

궁의는 나에게 깍듯한 인사를 한 후 조심스레 다가왔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사실 불편한 데는 없었기에 말하기 애매했다.

그렇다고 대뜸 배 안에 아이가 있는지 물어보기에도 이상했기에 나는 한참이나 우물쭈물한 채로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궁의는 검사부터 하겠다고 한 후 나의 몸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다른 증상은 없으십니다.”

그 말에 조금은 안도했다.

베스 또한 내 행동에 의문이 들었는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마,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숨기지 말고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마마의 건강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니 어떤 이상한 점이 있으시면 무조건 말씀해 주십시오.”

궁의 또한 나를 바라보며 어서 말을 해 달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임신할 수 있대.”

너무 직설적으로 말한 탓인가, 베스가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궁의는 별로 놀라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궁이시니 당연히 가능하십니다.”

궁의의 말에 베스는 더더욱 놀란 얼굴로 궁의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래.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남자인 내가 임신할 가능성이 있다니, 이건 후궁이라서 가능성이 있는 거랑은 또 다른 문제였으니까.

“그래서 내가 아이를 가졌는지 알고 싶어서 불렀어.”

“혹시 증상이 있으셨습니까?”

“아니.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는걸.”

“그러셨군요. 마지막 관계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보고받았습니다. 그리고 혹시 관계 중에 노팅을 하셨습니까?”

“그게 뭔데?”

“폐하와 마마는 일반 남녀처럼 임신을 하시진 않습니다. 우수한 알파와 우수한 오메가이면 예전에는 노팅이 없이도 가능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만, 아주 오래전의 일이라 정확한지는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일반 알파와 오메가가 아이를 가지려면 필수적으로 노팅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노팅은 한마디로 폐하와 마마가 깊숙한 곳에서 한참 동안 이어져 있는 행위를 말합니다. 머리 쪽이 주먹만 하게 커진다고 들었습니다. 받는 입장에서는 매우 버겁다고도 알고 있습니다.”

어떤 건지 대충 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나와 황제가 그런 행위를 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첫 관계는 그저 황제도 나도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했으니까.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네. 알겠습니다. 아직 아기님이 들어 있을지 아닐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에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게 언제쯤이지?”

“빨라도 3주는 걸릴 것입니다.”

“그렇군. 만약에 생기기 전에 안 생기게 하는 방법 같은 건 없을까?”

제발 있었으면 좋겠다는 얼굴로 궁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궁의가 갑자기 비 오듯 땀을 흘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더불어 문이 벌컥 열리더니 황제가 화난 얼굴로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돌아간 줄 알았는데 나를 쫓아온 듯싶었다.

“이만 되었다. 궁의는 이만 물러가도 좋다.”

황제는 궁의에게 눈길을 한 번도 주지 않은 채 문을 연 그 순간부터 나만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 공간에 나만 존재하는 양.

황제의 말에 궁의가 서둘러 짐을 챙겨 나갔다.

베스 또한 궁의의 뒤를 따라 조용히 방을 나갔다.

불탈 것같이 이글이글한 눈동자가 나를 뚫어지듯 쳐다보았다.

도대체 그가 왜 저렇게 화가 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산책을 하지 않아서 그런 건가? 아니면 내가 너무 황제에게 예의를 차리지 않은 건가?

아까까지만 해도 머리가 뒤죽박죽이라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나는 황제가 화가 난 이유를 되짚어 보고 있었다.

황제가 차라리 나에게 화를 내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그저 가만히 뚫어지게 보고만 있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돌아가신 것 아니셨습니까?”

먼저 말을 건넨 건 당연히 나였다.

내 물음에 황제는 눈가를 붉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니 무슨 사람이 툭하면 울어? 나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가만히 손수건을 내밀었다.

“일단 앉으십시오.”

황제는 내가 끄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에게 물을 건네주며 마주 앉았다.

“미안.”

한참 후 황제가 내뱉은 말은 사과였다.

“잘못하신 것도 없는데 왜 사과를 하십니까?”

“나에게 화가 난 거 아니었나?”

“제가 화가 났다고 생각해서 사과를 하신 겁니까?”

황제는 침묵했다. 긍정한다는 뜻이었다.

화가 난 건 자신이면서…….

“화는 폐하께서 나신 것 같습니다만.”

이번에도 황제는 침묵을 고수한 채 한숨만 내쉬었다.

나는 가만히 황제의 대답을 기다렸다.

“내 아이를 낳기 싫나?”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그의 아이를 낳기 싫으냐니, 나는 아직 황제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하지 못했는데 아이라니…… 싫다기보다는 무섭다는 것이 맞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 대답은 사실 황제의 기분이 풀어졌으면 해서 나도 모르게 뱉은 답이었다.

“나는 그대가 너무 좋다. 그래서 그대가 내 옆에 있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그대가 내 위에서 무엇을 하든 나는 가만히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대가 정말로 내 아이를 원하지 않으면 슬프고 서운하긴 하겠지만 기다려 줄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대가 내 아이를 낳아 준다면 무척이나 기쁠 것이다.”

황제가 이렇게까지 아이를 원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렇게 아이를 원하는 그가 아직 아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도 참으로 이상했다.

“그렇게까지 아이가 필요하시면 다른 분을 안으시면 됩니다. 폐하는 후궁이 많으시니까요.”

후궁이 30명이나 되는데 고작 아이 한 명을 낳아 달라고 말하는 황제가 안타까워 한 말이었다.

곧 황제가 서슬 퍼런 얼굴로 나를 보지만 않았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제가 뭐 실수한 게 있습니까?”

“그대는 정말로 너무하다. 내가 언제 아이가 필요하다고 했나?”

아니 방금 전까지 나보고 아이를 낳아 달라고 한 인간이 저렇게 말하니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아니셨습니까?”

“하아…… 당연히 아니다. 내가 필요한 건 그대의 아이지. 그대가 나보고 아이를 못 낳는 이가 어떻게 황후 자리에 앉냐고 그러지 않았나. 그대는 이제 아이를 낳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미래의 황제가 되겠지. 이제 알겠나? 나는 지금 그대가 낳은 아이를 이 나라 황제로 만들겠다는 의미다.”

사랑하면 같이 있고 싶고, 사랑하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다고들 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다 주고도 더 주고 싶은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

아마도 황제는 나를 좋아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라면 저렇게까지 애절한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그래.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그저 부정만 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그대까지 나를 부정한다면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황제는 그 말을 끝으로 힘없이 일어났다.

밖에는 황제를 보필하는 이들이 가득 늘어서 있었다.

늘 그렇듯 황제가 돌아가니 내가 있는 궁이 텅 빈 것 같았다.

이런 것들을 보고 느낄 때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두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사랑이 떠났을 때의 내 모습이 지금 이 궁처럼 버려진 느낌을 받을까 봐. 나에게 늘 목이 마른다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등을 돌리는 황제가 영원히 나만을 바라보리란 믿음이 나에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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