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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안배-23화 (23/60)

23화

“오늘도 그러고 있을 셈이냐?”

투명한 형체가 내 앞을 왔다 갔다 서성거렸다.

지금까지 아무런 형체도 없었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보여서 깜짝 놀랐었는데 며칠 지나니 이것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신이 저렇게 허연 뭉치로 돌아다니는 것도, 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도 이제는 받아들였으니까.

“오늘도 여기에 계실 겁니까?”

신은 혀를 쯧쯧 찼다.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것은 그대밖에 없을 거야. 그래, 오늘도 그대가 안 움직이면 나 또한 그대 곁에 있으려고 한다.”

“세계를 움직이시는 데 별로 바쁘지 않으신가 봅니다.”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당연히 바쁘지. 하지만 그대가 나와 한 약속 따위는 집어치운 것 같아서 말이다.”

신은 며칠 동안이나 저 약속을 매일 매 순간 입에 올렸다.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몸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랬습니다. 하지만 결과가 보이는 일에 더는 매달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나는 오늘도 그대 옆에 있어야겠구나.”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저 창밖을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 황제는 나에게 오지 않았다.

때때로 황제의 시종이 왔다 가는 것 같았으나 굳이 나에겐 오지 않고 베스를 통해서만 말을 주고받았다.

오늘도 시종이 왔다 가는 듯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그때 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의 선택에 도움이 되게 선물을 줄까 한다.”

“너무 많은 것을 받아서 더는 필요치 않습니다.”

“안다. 하지만 일단 들어 보고 거절하든지 말든지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신은 내가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호기심에 어디 들어나 보자, 라는 심정으로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희 가족. 전에 분명 말했을 텐데…… 가족을 보여 줄 수 있다고. 거기에 이번엔 조건을 달지. 영상처럼이 아니라 딱 한 번 그대가 만나 볼 수 있게 해 주마. 그런데도 필요치 않으냐?”

또다시 가족을 걸고 들어오는 딜…….

“너희 가족을 보여 주마. 다른 세상에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겠지만 딱 한 번 그대 가족들에게도 기억을 돌려주마. 진짜 상봉을 할 수 있게 말이다. 그런데도 거절하겠느냐?”

정말로 거절 따위를 입에 올릴 수조차 없었다.

나는 신이 지금 당장 지옥 불에 뛰어들라고 해도 기꺼이 받아들였을 테니까.

계속 가족을 인질처럼 물고 늘어지는 신이 미웠지만, 지금 현재는 신 외에 매달릴 수 있는 곳도 존재하지 않았다.

후우,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정자세로 앉았다.

“제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만한 선물에는 그만한 대가가 있기 마련이지요. 왜 제가 황제를 막아야만 하는지 알려 주십시오.”

“…….”

“이유를 알려 주시지 않아도 저는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유를 알려 주시면 좀 더 열심히 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진지한 모습에 신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너희들이 말하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란다. 그저 이 세계를 관리하는 관리자일 뿐이지. 그러니 나는 인간의 운명에는 관여할 수 없단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인외 존재가 인간의 운명에 관여를 한다면 막을 책임이 있지. 그걸 막으려고 내가 존재하는 것이고, 만약…….”

“인간 외에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는 나를 보면서도 그런 질문을 하다니. 나 또한 인외 존재인걸. 그대들에게는,”

“그렇군요. 그럼 막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되겠느냐. 지구처럼 되겠지. 아니, 그보다 더할 것이다. 지구는 핵이 폭발한 것이니까. 어쩌면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의 컨트롤을 벗어난 것에 영혼이 있을 자리가 없어진 것이니 다른 세계에서 살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전쟁으로 희생한 영혼들은 업보를 함께 지기에 비참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단다. 즉, 이 세계에 발붙일 영혼이 남지 않을 수도 있다.”

충격적이었다.

나는 그저 공자에 후궁의 신분이기에 이번 생에서는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 두 번째의 세계마저 멸망을 맞이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어느새 내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나는 내가 우는 줄도 몰랐다.

이것은 사기 환생이었다.

아니, 사기 빙의라고 해야 하나?

억울했다.

“저에게 왜 이러십니까?”

먹먹한 목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나의 억울함이 신에게 충분히 전달이 될 만큼.

“……그대만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그때 제 영혼을 죽이시지 그러셨습니까?”

“안 그러길 잘했지.”

신의 가벼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인간도 아닌 그에게서 인간의 감정을 찾는 내가 한심했다.

나만 혼자 슬프고 진지했다.

이런 나를 신은 얼마나 우습게 생각할까…… 라는 생각이 드니 더더욱 비참했다.

“우습지 않다.”

“생각을 읽지 마십시오.”

“그러마. 그런데 왜 그렇게 슬퍼하는 것이냐? 방금 전에도 그대는 죽음을 입에 올렸는데, 어차피 이 세계가 멸망해도 그대는 그저 죽기밖에 더하겠느냐. 그런데 왜 그런 얼굴이지? 새로운 세계가 마음에 들었느냐? 아니면 네 배필이 마음에 들었느냐?”

아, 그러게. 내가 왜 이렇게 슬프지? 나는 이 세계에 와서 좋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그냥 죽는 것밖에 더 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발작적으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 나는 소중한 것이 생겨 버렸구나. 나는 황제를 좋아하는구나. 나는…… 싫다고 하면서도 결국에는 황제에게 스며들고 말았구나. 나는 사랑이 고팠구나. 나는 이젠 나를 사랑하는 황제를 더는 밀어내지 못하겠구나…….

나의 생각이 전해졌는지 신의 바람이 나를 감쌌다.

황제가 보고 싶어졌다.

“어서 가 보렴. ”

“제가 가도 될까요?”

“당연하지. 그대도 알잖느냐. 더 나빠질 것이 없다는 것을.”

“내가 폐하에게 다가가면 폐하께서 더 불행해지지 않을까요?”

“글쎄…… 당사자에게 물어보려무나.”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스.”

“네, 마마.”

“폐하께서 어디 계시지? 당장 폐하를 뵈러 가야겠다.”

베스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왜 그러지?”

“그게 마마, 폐하께서는 궁에 계시지 않습니다.”

“뭐?”

순식간에 의욕이 사라지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어디 계시는데?”

“그, 그게”

“왜 내가 알아선 안 되는 건가?”

베스의 프로페셔널이 무너진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이마가 자연히 찌푸려졌다.

그제야 베스는 제대로 몸가짐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마마, 폐하께서는 1후궁님의 궁에 계십니다.”

“거긴 왜?”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아까 폐하께서 보낸 시종이 그렇게 전해 왔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어제저녁 그곳에 머무르셨다고 합니다.”

인공지능인 양 또박또박 말하던 베스는 마지막 문장을 말할 때 거의 죽어 가듯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그래…… 그랬구나.”

심장이 철렁했다.

무언가가 발밑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명확한 감정을 이제야 알아 버렸는데 배가 이미 떠나 버렸을까 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알았다. 폐하가 폐하의 궁으로 돌아오면 내가 가도 되는지 물어봐 줘.”

당장 달려가고 싶었으나 혹시나 황제가 싫어할까 그러지도 못했다.

나는 이렇게나 나약한 존재였다.

황제가 본인의 궁에 돌아갔다는 소식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오늘 하루를 넘기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황제에게 갈 생각을 못 했다.

왜냐하면 나는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었으니까.

“마마.”

베스가 저녁도 먹지 않은 나를 걱정스레 불렀다.

아마 베스는 내가 질투해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의 짐작대로였다.

나는 황제가 아름다운 1후궁과 전날 밤 밤새 뭐 했는지, 그가 얼마나 절륜했는지 따위를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내가, 여자인 1후궁이 아닌 남자인 황제에게 이러한 생각을 품을 거라고 상상이나 해 봤겠는가.

“난 괜찮으니까 베스 할 일 해.”

“제가 하는 일이 마마를 보필하는 것입니다.”

“좀 쉬고 싶다는 말이야. 얼른 가 봐.”

그때 복도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베스가 엄한 목소리로 뛰어온 시종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나무랄 것 같았던 베스가 얼굴을 펴며 나를 향해 돌아섰다.

“마마.”

“나도 들었다.”

베스의 눈에는 다행이라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오히려 불편했다.

황제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망설이는 나의 모습에 베스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문 앞에는 수척해진 얼굴로 나를 원망스레 쳐다보는 황제가 있었다.

“그대는 정말로 괘씸하다.”

누가 누구한테 할 말인데? 순간 울컥했다.

다른 여인을 품고 온 주제에 나에게 저런 말을 하는 황제가 몹시나 미웠다.

나는 내가 정말로 후궁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이제야 자각했다.

나는 공자의 신분이 아니라 황제의 총애를 기다려야만 하는 후궁이었다.

“그렇습니까.”

생각보다 목소리가 무덤덤하게 나갔다.

조금 전까지 마음이 무너지는 듯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내가 어제 어디에 있었는지 전해 듣지 않았나?”

아니,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서운해 오히려 괜찮은 척하는 것이었다.

그랬는데……. 황제의 저 말에 순간적으로 인내심이 뚝 끊기고 말았다.

“좋으셨습니까?”

절로 비꼬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에게 내가 단 하나뿐인 반려가 아니라는 점도, 그가 귀한 황손을 많이 생산해야 하는 황제라는 점도, 내가…… 그를 독점할 수 없는 을의 위치에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라고?”

황제는 기도 안 찬다는 목소리로 나에게 되물었다.

목소리에서 찬 기운이 뚝뚝 묻어났다.

“좋으셨나고 물었습니다.”

전이라면 벌벌 떨었을 황제의 차가운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나의 오만함에 나 스스로 놀랄 정도였으니까. 이젠 황제에게 비꼬는 말이나 따지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놀랄 것이라는 나의 생각과는 달리 황제는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더없이 즐거운 듯 환하게, 태양보다도 더 눈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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