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드디어 미치셨습니까?”
헉. 말을 마치자마자 스스로가 놀랐다.
정말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겉으로는 태연히 앉아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미쳤지. 처음부터 난 그대에게 미쳐 있었던 것을. 이제야 알았나?”
확실히 미친놈이었다.
내가 비꼬는 모습에 이렇게 좋아할 줄은. 혹시 그쪽인가 마조…… 그런 거?
하긴 황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나와 첫날밤을 보낼 때 꽤나 난폭했던 것만 봐도 충분했다.
나는 위험한 취향을 가진 황제를 과연 만족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소름이 돋아 팔을 쓸었다.
아무리 좋아해도 나는 맞는다거나 때린다거나 하는 취향은 맞춰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추운가?”
황제는 그런 나에게 자신의 옷을 벗겨 덮어 주며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냥 계속 그쪽에 계시지 왜 오셨습니까?”
“그러게. 안 왔어야 하는데 이런 그대의 모습을 보려고 왔다.”
“굳이 안 오셔도 괜찮습니다.”
“그대가 정말로 괜찮은 얼굴이었다면 진심으로 상처받았을 거야. 다행이 아닌가. 그대가 이렇게 화가 난 얼굴이어서.”
“혹시 그쪽 취향이십니까? 때리거나 맞는 쪽으로 쾌감을 느낀다든지.”
내 말이 끝나자마자 황제가 미친 듯이 웃었다.
그러다가 나를 향해 두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나는 때리는 것을 좋아하진 않는다. 죽이는 거라면 모를까. 그리고 그대는 더더욱 때릴 수도 죽일 수도 없지.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나은걸.”
황제는 정말로 사랑스러운 이를 쳐다보듯 나를 바라보며 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왜 제 화가 난 모습이 마음에 드신다는 겁니까?”
“그거야 그대가 질투해 줬으니까. 그대가 나에게 마음이 향한다는 증거인데, 내가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없지 않나.”
화르르륵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젠장 망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적나라하게 들키고 나니 온몸이 붉어질 만큼 부끄러워졌다.
“아, 아닙니다. 질투 아닙니다!”
다 들켰음에도 일단은 부정하고 보았다.
그런 내 모습을 황제는 웃는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그대가 정 그렇다면 아닌 걸로 하지.”
“정말 아닙니다만.”
“그래, 알았대도.”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면서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서 좋으셨습니까?”
“뭐가? 질투한 거 아니라고 하지만 질투를 해 준 그대가?”
“아닙니다.”
“그래, 알았다니까. 그런 걸로 친다고.”
“아니 그런 걸로 치는 게 아니라! 되었습니다. 아니라는 제 말은 그러니까 질투한 게 아니라는 것이 아니고 1후궁과 있었던 것이 좋았냐는 물음이었습니다.”
말을 끝내고서야 아차 싶었다.
이런 질문이라니…… 누가 들어도 질투하는 질문이었으니까.
능글능글하게 대답할 것이라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황제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진짜 좋으셨나 봅니다.”
“아, 아니다. 진짜 아니야.”
“그런데 왜 그렇게 긴장하셨습니까? 말까지 더듬으시고,”
“그게 그러니까 그대에게 아직은 말하지 못한다.”
“왜 말을 못 하실까요? 뭐 그렇게 비밀스러운 일을 하셨다고요. 그리고 폐하, 좋으셨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1후궁이나 30번째 후궁이나 폐하의 밤 시중을 든다는 것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폐하의 마음이 저에게 있든, 저의 마음이 폐하에게 있든 말이지요.”
말을 할수록 마음이 아파 왔다.
평생 이 마음을 속에 안고 살아갈 내가 불쌍했다.
내가 이 세계의 멸망을 막든 안 막든 나는 황제의 30번째 후궁이었으니까.
만약 아이를 낳는다면 후궁에서 황후로 승격을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황제의 또 다른 부인들과 한 남편을 모셔야 한다는 사실 자체는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사실은 내 말에 황제가 당연히 상처는 받지 않겠지만, 그래도 내 편이라는 달콤한 말이 듣고 싶었다.
결단코 나는 내 말에 상처받는 황제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사실을 직시한 내 말에 잔뜩 상처받은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그러려던 게 아니었다. 변명이지만 그대를 먼저 만났었다면 절대로…….”
“폐하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이렇게 되어 버렸는걸요. 그저 저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아무렇지 않습니다. 아니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질투, 그래 질투를 한 것 같습니다. 남자가 속이 좁게 말입니다. 하지만 되지도 않을 일에 기력을 빼먹을 만큼 어리석지도 않습니다.”
나는 상처받은 얼굴의 황제를 달래려고 말을 꺼냈지만, 결과적으로 울고 있는 황제와 마주해야 했다.
“왜, 왜 우시는 겁니까?”
“내가 싫어졌나?”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싫어질 거였으면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아…… 고백을 해 버렸다.
울고 있던 황제는 두 눈을 커다랗게 부릅떴다.
“나를 좋아한다고?”
황제의 목소리가 떨렸다.
꼭 그래야만 한다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내 착각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연히 그의 기대에 충족해 주는 대답을 했다.
“네, 좋아합니다.”
이번엔 확실하고 굳건한 답을 들려주었다.
내가 찾아가서 하려던 고백은 아니지만, 물론 황제가 와서 울고불고해서 나도 모르게 내뱉은 고백이라고 해도 황제에게 확신을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다시 말해 줄 것이다.
놀라서 크게 홉뜬 황제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울지 않으시길 바라서 한 것인데 이렇게 우시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좋아서. 그대가 너무 좋아서 그래.”
황제가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는지 잘 모르겠지만, 뭐 결론만 놓고 보자면 나쁜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어제 1후궁의 궁에 있지 않았다. 그저 잠깐 들렀다가 온 것뿐이다. 그러다가 일이 있어서 궁에 가지 못한 것이고. 그대의 반응을 보려고 시종을 보낸 것은 맞으나 혹시나 정말로 그대가 오해할까 봐 이렇게 온 것이다.”
황제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나의 어깨에 기댄 채 주저리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런 변명에 나는 마음이 풀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황제가 멈칫했다.
“그대에게 위험한 일은 아니다.”
“그럼 폐하께는 위험한 일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걱정하는 건가?”
“네, 걱정하는 겁니다.”
황제가 또다시 놀란 눈을 했다.
이 인간은 내가 좋아한다고 고백한 걸 진지하게 안 들은 것이 분명했다.
아니라면 이렇게 안 믿긴다는 듯한 눈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그게 그대가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 궁 안에서 나를 걱정하는 것도 그대밖에 없을 거고.”
황제의 얼굴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그러니까 걱정하는 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하는 일은 전쟁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먼저 알은체하는 것과 황제가 직접 말을 꺼내는 것은 매우 달랐다.
왜냐하면 내가 말을 꺼내는 것은 감히 국정에 간섭한다는 느낌을 준다면 황제가 직접 꺼내는 것은 조언이라고 느낄 테니까.
“그저 예전에 한 약속을 지켜야 하는 일이다.”
이건 또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누구와 도대체 무슨 약속을 했다는 걸까? 어릴 때 약속인가? 그럼 혹시 뭐 그런?
나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황제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은 채 자신과 눈을 마주하게 했다.
“결단코 그대의 몸과 마음에 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 폐하께는요?”
“나도 괜찮아지려고 하는 거다. 그러니까 나는 괜찮다는 말이다. 그대를 이렇게 만났는데, 이제야 숨이 쉬어지는데 내가 안 괜찮아질 일이 뭐가 있겠나.”
결국 어떤 것도 확실하게 듣지 못했다.
자세히 듣고 싶었지만, 그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기에 나 또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황제는 일이 있어 자신의 궁에 돌아가야만 했다.
가기 싫다는 얼굴로 한참이나 미적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방을 나섰다.
“신님, 신님.”
나는 조용히 신을 불렀다.
“왜 그러느냐?”
“으아악.”
혹시나 해서 불렀는데 귀에서 소리가 나서 깜짝 놀랐다.
“그대가 불러 놓고 그렇게 놀라면 섭섭하구나. 난 또 그렇게 애타게 찾길래 내가 있는 걸 알고 있는 줄 알았다.”
“정말로 관음증 있습니까?”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이 입으로 나오고 말았다.
신의 형체가 앞에 있었다면 화가 났는지 아닌지 볼 수라도 있을 테지만, 그저 목소리만 들려오니 오싹함이 배가 되었다.
다행히 신은 화가 나지는 않았는지 살기가 느껴지진 않았다.
“뭐 전에도 말하지 않았느냐. 그대를 지켜보는 것이 꽤나 재미있다고, 그것이 관음증이라고 그대가 느낀다면 그런 걸 거야. ”
진짜 다행이었다.
신이 화가 나서 나에게 벌을 내린다면 그것은 영혼에게 내리는 영벌일 테니까. 그렇다면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새삼 나에게 항상 무른 신이 고마워졌다.
“그런데 이 나라 국교가 있습니까? 신전이 있는 것을 보니 국교가 있는 것일 텐데. 지금까지 이름도 모르고 도움을 받았습니다. 신님이라고 계속 부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제야 그런 것이 궁금한 것이냐?”
“네.”
“직접 책을 찾아보는 방법도 있는 것을,”
“그래도 본인에게 듣는 것이 가장 좋지 않겠습니까? 책이라고 해 봐야 역사일 텐데……. 제가 역사를 배워 봐서 아는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을 너무 아름답게 포장하더라고요. 진실성이 약간 떨어진다고 할까요? 그런데 이렇게 산 증인이 딱 계시는데 제가 책을 읽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군, 그래도 신서에 관한 건 웬만해선 그대로 다 기록되어 있다. 황실의 역사라면 모를까 신서를 조작하는 인간은 없단다. 그러니 그대가 알고 싶은 것은 진실일 게다.”
“저기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와중에 죄송합니다만. 혹시 형체가 있게 나타나실 수는 없습니까? 전부터 생각한 것인데 보이지 않으니까 꼭 유령하고 대화하는 기분입니다.”
기가 막힌 듯 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정말 신성모독을 자주 하는구나. 뭐 내가 그대에게 부탁한 것도 있으니 그쯤이야 들어줘야지. 그래 이 모습이 좋겠구나.”
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이 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눈이 부셨다.
그리고 내 손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