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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안배-26화 (26/60)

26화

오늘도 황제궁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나는 덕분에 황제 집무실 코앞까지 아무런 방해도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폐하를 찾아왔네.”

문 앞에서 마주친 시종장에게 말했다.

시종장은 나에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뭐 따로 알리지 않아도 될 만큼 우리가 친해졌나 보다 하고 들어선 순간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왜냐고? 왜냐하면…… 방 안이 난장판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경악에 서린 얼굴로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시종장은 사람 좋은 얼굴로 문을 다시 닫고 나갔다.

나는 난장판이 된 방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때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삐걱거리는 목각 인형인 양 힘겹게 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는 잔뜩 흐트러진 채로 검을 들고 서 있는 황제를 발견했다.

검은 눈동자에 초점이 잡혀 있지 않은…….

“……폐하?”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다.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황제가 검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마기에 물들었구나.”

어깨에서 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기요?”

“그래. 이러니까 내가 이곳을 볼 수가 없었지.”

황제는 미쳐 날뛰려고 하고 있었다.

누군가와 이야기하면서……. 마치 나와 같았다.

보이지 않는 신이랑 대화하는 나랑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정신이 멀쩡한 반면 황제는 제정신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으나 어떻게 좀 해 보세요!!”

나는 다급하게 어깨에 있을 법한 신을 행해 소리쳤다.

“그대가 해야지.”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황제가 가장 안정될 때가 언제였느냐?”

그러게 언제였지? 내가 황제와 있을 때는 항상 안정되어 있었다.

그랬기에 내가 없는 곳의 황제가 이런 모습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아무거라도 좋으니 해 보거라.”

기가 막혔다.

신이 코앞에 있는데 인간인 내가 해야 한다니…….

“그대만이 할 수 있는 거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대로 황제에게 안겼다.

검을 들고 있는 황제가 무섭고 난장판이 된 집무실처럼 나 또한 저렇게 되어 버릴까 겁이 났지만, 그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그가 괜찮아지기를 바랐다.

황제의 행동이 멈췄다.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황제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던 황제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황제의 손에서 슬며시 검을 빼서 바닥에 던졌다.

쿠당탕탕.

방 안에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연?”

“네, 폐하.”

“그대가 어찌 이곳에?”

황제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괜찮습니다, 폐하. 괜찮습니다.”

나는 황제의 떨리는 몸을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황제의 손이 내 등에 닿았다.

잔뜩 떨리는 채로……. 나는 계속해서 괜찮다는 말을 반복해야만 했다.

황제에게 하는지, 놀란 나에게 하는지 잘 모른 채로 몇 번이고 계속 속삭였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떨리던 황제의 몸이 진정이 되었고, 나 또한 어느 정도 진정했다.

“폐하, 괜찮아지셨으면 이만 놓아주십시오.”

처음에는 내가 황제를 껴안았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은 황제가 나를 꽉 껴안고 있었다.

절대 놓을 수 없다는 듯이.

“숨이 찹니다.”

정말로 숨이 찼다.

황제의 팔에 힘이 풀리는 듯했으나 나를 떼어 놓지는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황제를 밀어냈다.

“우리 대화가 필요할 것 같은데 아닙니까?”

황제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죄지은 아이인 양 가만히 서 있었다.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대화할 준비가 되지 않으셨다면 기다릴 수 있습니다. 단, 제 곁에 있으셔야 합니다.”

방금 전의 행동을 통해 황제가 안정되기 위한 조건은 내가 황제와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건 뭐 살아 있는 폭군의 신경안정제나 다름없었다.

“무슨 일 있으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황제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서 있기만 했다.

대화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황제의 손을 이끌고 앉을 자리를 탐색했으나 실패했다.

의자는 다 부서져 있었고 소파는 갈가리 찢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하시지요.”

나는 황제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종장과 보좌진들이 서 있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시종장은 나에게 방을 안내했다.

어찌 보면 나를 사지에 밀어 넣은 형국인지라 꼴 보기 싫다가도 그만큼 나를 믿는다는 것이었기에 나는 그저 앞서서 길을 안내하는 시종장의 뒤통수를 노려보기만 했다.

나는 일단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황제를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생각 없이 들어오긴 했는데 침실이었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뭐 정신이 해롱대는 황제가 뭘 할 것 같지는 않아서 얌전히 침대로 데리고 갔다.

“좀 괜찮으십니까?”

아직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황제가 어이가 없어 나는 그와 일부러 눈을 맞추려고 무릎을 꿇었다.

“폐하, 좀 괜찮으신 것 같은데 저 좀 보십시오.”

“보고 있다.”

눈은 멀리 천장을 보면서도 얼굴을 붉힌 채 대답하는 황제가 조금은 귀여워 보였다.

“아직 대화할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까?”

“아니 준비되었다.”

“그럼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황제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저렇게까지 힘이 들면 나중에 들어야겠다 싶어서 입술을 달싹이는데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예전부터 계속 환청과 환각에 시달렸다. 뭐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뭐 평범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 선황은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지만 정략혼을 했고,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나온 자식이 아닌 나를 선황은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선황후는 혹시라도 황제 자릴 내가 다른 곳에 뺏길까 봐 엄하게 키웠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꼬박꼬박 선황과 선황후라고 칭하는 황제는 많이 아파 보였다.

“뭐 그런 이야기지. 사랑을 갈구하며 살다 보니 어느 날부터 목소리가, 그다음에는 어렴풋한 모습이. 그게 사실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그것이 없었다면 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정신이 망가졌을 거다.”

“그랬군요. 그럼 전에 말한 약속은 그와 한 약속인 겁니까?”

“그래. 그와 한 약속이다.”

“어떤 약속을 하셨는지 물어도 됩니까?”

“음…… 내가 가장 강해지는 거. 그래서 아무도 선황과 황후처럼 나를 막 대하지 않는 거.”

말만 들으면 좋은 거였다.

하고 싶은 거 하며 살라는 거였으니까.

“혹시 그가 폐하께 전쟁도 하라고 했습니까?”

황제의 눈이 커다래졌다.

맞는구나.

“어떻게 알았지? 내가 혹시 말한 적 있나?”

“아니요. 그저 그럴 거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는 뜨끔해서 얼버무렸다.

그렇다고 신과 함께 당신이 전쟁을 못 하게 막으려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군. 그런데 그대는 여기까지 어쩐 일이지?”

“왜요. 제가 온 게 싫으십니까?”

“아니, 절대. 그저 그대가 혹시나 나를…….”

나는 황제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절대 안 싫어합니다. 이젠 알 만할 때도 된 것 같습니다만.”

황제는 입 막은 내 손을 혀로 핥았다.

“으아악.”

미친! 너무 놀라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왜 그렇게 놀라나?”

황제는 이번엔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

뭔 남사스러운 짓을 이렇게 한담? 내가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자마자 돌변하는 황제가 몹시 웃겼고 사랑스러웠다

“정말 괜찮으신가 봅니다. 그럼 아까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어서 말해 주십시오.”

황제는 쓴 것을 삼킨 표정으로 맥없이 내 손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런 황제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황제는 그제야 웃는 얼굴로 나를 마주 보았다.

“계속되던 환청이 그대를 만나고 사라졌다. 그런데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그대와 함께 있지 않으면 들렸다. 지금까지는 참을 만했는데……. 참 이상하지. 왜 인간은 한 번 가져 본 것을 놓지 못할까? 이것도 탐욕과 관련된 건가? 나는 마침내 안락한 삶을 찾았는데 이것을 욕심이라고 한다면 나는 어찌해야 할까?”

대화의 흐름이 계속 이상한 데로 흘렀지만, 너무 절절하고 슬퍼 보여 나는 그저 들어 주는 쪽을 택했다.

“그저 마지막 약속을 했다. 더는 안 나타나는 대신 처음에 약속했던 대로 이 세상을 그의 발밑에 놓아 주기로. 그렇게 해 주는 게 맞는 거 같아서 그러기로 했는데. 갑자기 나한테 화를 내더군. 다른 때와 다르게 그저 죽이라는 말이 아니라 다 죽이라고, 문 열고 들어오는 건 다 죽이라고.”

황제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다.

나는 맞잡은 손을 더욱 꼭 잡아 줬다.

“다른 땐 아무 생각 없이 그가 하라는 대로 검을 들었는데 오늘따라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안 그러길 얼마나 다행인지. 여느 때처럼 검을 휘둘렀다가 거기에 그대가 조금이라도 다쳤더라면 나는 살 수가 없었을 거다. 그러고 보니 그대를 들여보내 준 이들도 가만두면 안 되겠군.”

“괜찮습니다. 그래서 폐하가 괜찮아졌으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저는 기쁩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됩니다.”

황제는 내 말에 우리가 맞잡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이마를 내 어깨에 기대었다.

“그래. 그러도록 하마.”

“예. 그래서 아까처럼 되셨던 겁니까?”

“아니. 내가 반항하니까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힘이 느껴졌고. 그 후로는 잘 기억이 안 난다. 그저 정신을 차려 보니 그대가 나를 안고 있었다. 사실 두려웠는데 지금 이렇게 그대의 위로를 받고 있어서 행복하고.”

나는 어깨 위에 올라와 있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몹시나 안쓰러웠다.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이제부턴 제가 늘 곁에 있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아픔도 기쁨도 행복도 그리고 사랑도 함께해요. 폐하.”

나는 멋지게 웃었다.

그리고 다른 의미로 눈 돌아간 황제에게 입술을 먹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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