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다음 날 일어나자 황제가 나를 꼭 껴안고 있었다.
후궁이 당당히 황제의 침실에서 일어난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을 만큼 민망했다.
왜냐하면 태초의 상태로 나와 황제가 껴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서둘러 옷을 걸친 후 황제를 깨웠다.
“폐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황제는 일어난 것 같은데 눈을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함께 식사하려고 했는데 안 일어나시면 제 궁으로 가 혼자 먹겠습니다.”
번쩍하고 황제의 눈이 떠졌다.
“얼른 준비하고 함께 식사하시지요.”
“정말? 나와 함께 식사해 줄 건가?”
당연한 거 아닌가? 라는 생각과 함께 그동안 그를 밀어낸 내 과거도 함께 떠올랐다.
하긴 황제는 항상 나와 함께 있고 싶어서 애걸복걸했는데 내가 너무 무관심했구나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덧붙였다.
“폐하가 드시는 음식이 궁금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 드시는지 저는 모르니까 늘 드시던 곳에서 먹었으면 합니다. 물론 폐하도 함께요.”
나의 말에 그의 얼굴이 화사하게 빛났다.
능글거리던 웃음이 아닌 아이같이 맑은 웃음이었다.
저렇게 해맑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하여 충격을 받을 새도 없이 황제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나는 당황스러워 물었다.
“그저 손을 잡은 것이지.”
“미치셨습니까. 절대 싫습니다.”
내 반항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손을 놓지 않았다.
“내 궁 안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손도 못 잡으면 너무 슬플 거 같군. 그러니까 그대가 양보해. 나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너무 영악했다. 이럴 때 내 고백을 이용해 먹다니.
“비겁합니다.”
“알고 있다. 그대에 한해서는 비겁함도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그대에게 항상 비겁했으니까. 인정하는 셈 치지, 뭐.”
그래, 마음대로 해라. 이젠 거의 초인이 된 심정으로 황제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황제에게 비겁하다고 말해도 괜찮다고 하는데 더 뭐라고 하기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남사스럽게 황궁에서 황제와 나란히 손잡고 밥 먹으러 가게 되었다.
항상 느끼고 있지만 여전히 식탁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차려져 있었다.
예전이라면 그저 스쳐 보냈을 것들이 이제 와선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내 입에 음식을 넣는 데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황제에게 음식을 올려놓을 줄도 알게 되었다.
“연. 그대는 정말이지…… 너무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나.”
이젠 저 호들갑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능청스럽게 대답도 할 수 있다.
손잡고 황궁을 누볐는데 능청을 못 떨 리가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루아침 일도 아닐 텐데요.”
능청은 내가 떨었는데 부끄러움은 황제의 몫인 듯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왜 그러십니까?”
나는 혹시나 내가 너무 오버했나 싶어 조심스레 물었다.
“하……. 그대는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귀엽기까지 하면 내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다.”
아……! 이번 거는 너무 심했다.
의연하게 앉아 있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온몸이 오그라들다 못해 사라져 가는 느낌이었다.
“폐하, 그만 식사합시다.”
나의 정색한 목소리에 황제 또한 정숙한 채로 대답했다.
“그러지.”
나는 피식 웃은 다음 고기 위주로 황제의 밥그릇에 음식을 놓아 주었다.
물론 황제는 내 입에 음식을 넣어 주었다.
황제는 내가 올려 준 음식이 있을 때만 자신의 입에 음식을 가져갔기에 첫술만 올려 주려고 했던 계획과는 어긋났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몽글몽글한 기분이 발끝부터 올라와 달달한 느낌을 주었다.
“그 크흠, 오늘 뭐 일정 있나?”
“아니요. 없습니다.”
“그럼. 오늘 나와 하루 종일 함께 있어 줄 수 있나?”
내가 있어야 괜찮아지는 사람임을 알기에 당연히 그러려고 했다.
“저는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습니다만 폐하는 아니었나 봅니다.”
“아, 아니다. 혹시나 그대 마음이 바뀌었을까 봐 물어본 것이다.”
나는 황제의 저런 눈치가 이젠 보고 싶지 않았다.
전에는 내 눈치를 본다고 해도 나를 그만큼 생각해 주는구나 싶었던 마음이, 내가 황제를 좋아하니까 그 눈치가 불편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눈치를 본다는 것은 정말로 마음이 아픈 일이었다.
“그러자고 했으니까 당연히 그럴 겁니다. 그리고 제가 폐하와 함께 있고 싶어서 있겠다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안절부절못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 곁에 있겠습니다.”
황제는 이젠 목까지 붉어진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더니 아주 개미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그, 나와 침실도 함께 쓰는 건가?”
아, 생각 못 했다.
왜냐하면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혹시 따로 써야 하나?
내가 고민한다고 풀리는 것은 아니기에 황제에게 물었다.
“혹시 따로 써야 합니까?”
황제가 붉어진 얼굴로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그저 그대가 함께 쓰고 싶은지 묻고 싶었다.”
“네. 폐하께선 저를 사랑하시지요. 아니십니까?”
황제는 내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급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긍정으로.
“아니다. 사랑해. 완전 사랑한다!”
저렇게까지 소리 지를 일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나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저 또한 폐하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는 엄연히 폐하의 후궁이십니다. 뭐 다른 분을 품겠다고 하면 전 같으면 어쩔 수 없지 했겠지만 이제는 화를 낼 겁니다. 저는 다른 사람이랑 폐하를 공유하고 싶지 않습니다.”
동그랗게 뜬 황제의 눈동자를 마주 보면서 분명하게 못을 박았다.
“저를 사랑하신다면 저와 한 침대를 쓰는 한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 몰랐는데 제가 매우 옹졸하고 질투심도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고 싶으시다면 분명히 하십시오. 저를 버리시고 가시는 겁니다.”
“절대! 절대 그럴 일은 없다.”
황제는 희게 질려서 대답했다.
내가 헤어지잔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벌써 상상이라도 한 듯 몸까지 떨었다.
“그러니 만약이라는 말입니다. 뭐 보통 사람이라면 한 번은 용서해 줄지 모르지만 저는 절대 아닙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 상황과 저를 놓고 저울질했을 때 그 상황을 선택했다면 저보다 그것이 더 소중했다는 말이니까요. 그 순간 사랑을 놓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저는 한 번이라도 배신했다고 느껴진다면 폐하를 놓을 것입니다.”
황제가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다가오더니 나를 와락 껴안았다.
“약속하마.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버리기 전에 나를 베고 가.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나 또한 나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니.”
뭐 죽일 정도면 사랑이 남은 거라 그러고 싶지 않다고 대답해야 맞겠지만, 맞닿은 황제의 몸이 너무 떨려 와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밥 먹다 말고 한참을 그렇게 안고 있으니 머쓱했다.
뭐 먹을 만큼 먹어서 배부른 것도 있었지만 입맛도 떨어졌다.
하지만 황제는 아닐지도 모르니 웅얼거리며 물었다.
“폐하. 그,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해 죄송합니다. 마저 식사하시겠습니까?”
황제는 나를 안은 채 고개를 저었다.
“너무 놀라서 못 먹겠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그대 탓도 아닌걸. 그리고 충분히 먹었다. 연, 그대는?”
“저도 뭐 배가 부르긴 합니다.”
“그럼 응접실에서 차나 함께 하겠나?”
“네, 좋습니다.”
황제는 또 내 손을 잡아 왔다.
뭐라 하는 것이 맞았지만 저렇게 부끄러워하면서도 좋아하니 그게 뭐 대수인가 싶어 그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응접실로 향했다.
유치원 풀잎반 친구 사이도 아니고 실내에서 이렇게 해야 하나 현타가 왔지만, 창백한 황제의 얼굴에 홍조가 낀 걸 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사랑하면 바보가 된다더니 나를 두고 조상들이 한 말 같았다.
눈치 빠른 시종장 덕에 응접실에 앉자마자 향기가 좋은 차를 마실 수 있었다.
“바쁘신 거 아닙니까?”
“하루 정도는 괜찮다.”
예전 같았으면 일 때문에 눈치 줬던 보좌관들이 없는 것을 보면 저 말이 맞는 것도 같았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오지 못할 정도로 바빴던 황제이기에 썩 믿음이 가지는 않았다.
아무렴 어때, 사랑하는 사람과 차 한잔 정도는 기울여야지.
나는 속으로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때 황제가 매우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내가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유혹하는 건…… 그래, 아니겠지.”
내 눈을 보자마자 황제가 말을 바꿨다.
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페로몬이 흘러나간 것 같았다.
숨 쉬듯이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렇게 나도 모르게 그를 곤란하게 만들 때가 있었다.
내 페로몬이 황제를 곤란하게 만들면 뒤이어 나 또한 곤란해진다.
왜냐하면 저렇게 터질 듯 붉은 얼굴을 한 황제의 페로몬이 나를 유혹하기 때문이었다.
“유혹은 저기 폐하께서 하시는 것 아닙니까?”
황제는 나를 그윽하게 쳐다보면서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페로몬 또한 거두지 않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눈치 빠른 시종장이 이번에도 다른 사람들과 나가 버려 이 방 안엔 황제와 나 둘뿐이었다.
이 방 안에서 일을 치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 속에 놓였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온 지성인으로서 침실도 아닌 다른 곳에서 굳이 그러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해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
황제의 눈에 실망의 빛이 어렸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제야 황제의 페로몬이 사라졌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물론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겨 버렸지만 애써 괜찮은 척했다.
그리고 일어나는 순간 바로 황제에게 안기게 되었다.
가까이 온지도 느끼지 못할 만큼 황제의 행동은 민첩했다.
그는 나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를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대가.”
나는 말 못 할 곳이 불편했지만, 다행히 황제가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린 탓에 티가 나지는 않아 참을 수 있었다.
“네, 그랬습니다. 제가.”
“그럼 내 마음대로 하겠다.”
뭐를? 설마 이곳에서 일을 치르자고? 그럼 싫어하지는 않겠지만 좀 곤란하겠는데? 속마음이 전달되기를 바라며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황제의 어느 스위치를 눌렀는지 황제가 바로 나에게 입술을 들이댔다.
이거 뭔가 데자뷔 같은데…… 언제 이런 일이 있었던가?
그런 나의 생각은 곧 저 멀리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위안인 건 황제가 나를 안아 든 채 키스를 하며 침실로 갔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