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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안배-29화 (29/60)

29화

데자뷔가 아니라 똑같았다.

어제와 다른 점 하나 없이 나는 오늘도 테이블에서 황제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어제처럼 또 불이 붙어 꼼짝없이 침대행일 것 같아 나는 슬금슬금 황제에게 거리를 뒀다.

“연, 어디 불편한가?”

황제가 다급하게 물었다.

불편한 게 없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밤새 잠든 기억 없이 아침을 맞이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옳은 말만 했다가는 불쌍한 척하는 황제의 꾐에 넘어갈지도 몰라 나는 고개를 양옆으로 저으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니면 내가 싫어졌나?”

저 인간은 레퍼토리가 저게 스위치인 것 같다.

저걸 달래다 보면 근 이틀 동안 시달린 일을 또 반복할지도 몰랐다.

나는 황제의 불쌍한 척하는 모습과 맞닥뜨릴 자신이 없어 내 접시에 시선을 고정한 뒤 단호하게 말했다.

“계속 말씀드렸듯이 절대 싫어하지 않습니다. 한 번만 더 같은 주제를 꺼내 드시면 그러길 바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화났나? 내가 잘못했다. 절대 다시 입에 올리지 않겠다. 그러니 눈을 피하지 말아 줘.”

“네. 화내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그냥 식사를 하십시오.”

“그래. 알겠다.”

황제는 혹여라도 내가 다시 거리라도 둘까 걱정스러운지 서둘러 식사를 했다.

사실 속으로는 화가 하나도 안 났는데, 다시 침대에 잡힐까 봐 얼굴을 펴지 않은 채 음식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달그락달그락 그릇 부딪치는 소리만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크흠.”

한참 나를 살피던 황제가 할 말이 있는 듯 목을 가다듬었다.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그 저기, 오늘 하고 싶은 것이 있나?”

없어도 있다고 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골머리를 굴려도 이 세계에 와서 한 일이라곤 먹고 논 것뿐이라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우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황제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면 오늘 내가 일하는 곳에 함께 있을 건가?”

생각지도 못했다.

침대로 가자고 할까 봐 이유를 천 개는 넘게 생각했는데 저렇게 건전한 부탁이라니…….

입 밖에 안 내길 천만다행이었다.

아니면 수치사로 죽은 사람들 중에 내 이름도 분명히 올라갔을 테니까.

“네, 함께 있겠습니다.”

봄에 꽃이 만발하듯 황제의 얼굴이 화사하게 빛났다.

저게 저리도 좋아할 만한 일인가 싶었지만, 본인이 좋다고 하니 내가 왈가불가할 것도 없었다.

아까까지 입맛이 없었었는데 지금은 먹을 만한 것이 침대가 무섭긴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집무실에 들어서니 이미 앉아 있던 보좌관 셋이 우리를 맞이했다.

황제의 옆자리에 황제 의자보다 더 호화롭고 안락한 의자가 하나 있었다.

설마…… 내 자리인가?

황제가 자신의 자리에 착석하자 한 자리가 남았다.

호화로운 자리였다.

“연, 이곳에 앉으면 돼.”

황제가 확인 사살했다.

나는 황제가 이끄는 대로 호화롭고 안락한 의자에 앉았다.

내가 누워도 문제가 안 될 만큼 커다란 의자였다.

“피곤하면 누워서 자도 된다.”

“네. 알아서 하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일을 하셔도 됩니다.”

“그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라.”

“네, 알겠습니다.”

나는 자리에 앉은 채 황제의 책상 위에 있는 책을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보고해.”

황제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저런 목소리를 내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승리하는 전쟁법’

그래, 멀쩡한 서적이 있을 리가 없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 장을 넘겼다.

“동부 쪽에는 이미 군사를 배치했습니다.”

“서부는?”

“남부 쪽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는 생생한 전쟁 준비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몰랐다.

“주변국들의 동향은?”

“긴장 상태입니다.”

“계속 주시해.”

“존명.”

그 후로도 보고는 계속되었다.

항상 똑같았다.

전쟁 준비, 전쟁 현황, 전쟁 연습…… 전쟁이 빠지지 않았다.

말이 전쟁이지 약소국에는 침략이었고 일방적인 폭력일 터였다.

어떻게 하면 저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인지 계속 생각했다.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조금 쉬었다 하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깨어 보니 황제가 휴식을 제안했다.

보좌관들이 나가고 황제게 나에게 다가왔다.

“너무 지루했나? 혹시 좋아하는 부류의 서적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말해도 된다. 가져다줄 테니.”

‘폭군을 길들이는 방법’이라든가 ‘미친개를 조용히 시키는 방법’ 같은 책들이 있다면 좋겠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있을지도 의문이고.

“그럼 신에 대한 것들을 읽고 싶습니다.”

“신?”

“네. 우리 제국은 태양의 신 솔 님을 모시니까 모시는 신에 대해서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제의 얼굴은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왜지? 신을 싫어하나? 혹시 환청이랑 관련된 건가? 괜히 신에 대한 것을 읽겠다고 했나? 가장 무난한 거 아니었어?

머릿속에서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그때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있다가 가져오라고 하마.”

쓴 약을 삼킨 것인 양 잔뜩 찌푸린 얼굴로 황제가 말했다.

저 모습을 보니 확실히 싫어하는 것 같았다.

“혹시 신을 싫어하십니까?”

“음…… 글쎄…… 싫어한다기보단 믿지 않는 편이지.”

“그런데 내키지 않는 걸로 보이셔서요.”

황제는 고민하는 얼굴로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사실 싫어하는 쪽이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신과 관련된 서적을 다 없애라고 했다. 아마 신과 관련된 서적은 신전 이외에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네?”

이건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극혐하는 것이 아닌가? 뭐라고 물어보기도 무서웠다.

도대체 황제는 양파도 아니고 사연이 자꾸만 나오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그래도 신전에 사람을 보내면 서적 정도는 금방 가져올 거다.”

그렇겠지. 황제가 사람 보냈는데 안 줄 리가 없지. 아닌가? 혹시 신전과 사이가 안 좋으면 어렵지 않나? 궁금하면 물어봐야지.

“신전과는 사이가 좋으신가 봅니다.”

“아니.”

단호박이세요? 너무 단호한 대답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사이가 안 좋으면 서적을 넘겨받기가 어렵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괜히 생각 없이 말했다가 신전하고 제일 처음으로 전쟁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전쟁을 막으려고 이곳에 앉아 있다 자칫 더 부추기게 생겼다.

“책 구하기 어렵지 않으십니까? 저는 그저 아무거나 봐도 괜찮습니다. 지금 이 책도…… 별로 나쁘진 않습니다.”

뜸을 들이긴 했으나 전쟁보다는 차라리 전쟁에 관한 책들을 읽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 애써 책까지 끌어안으며 좋은 척했다.

“아니다. 그대가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것이 생겼는데, 사이 안 좋은 것 따위가 뭐라고 못 구해다 주겠나. 그대는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 금방 가져다줄 테니.”

매우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눈앞의 황제는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하는 사람이라 그저 아무 탈 없이 한 권의 책이라도 무사히 배달되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황제는 하루 종일 일을 했다.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처리하고 간간이 보고를 받고, 항상 내 앞에서는 한량 같았는데 저렇게 멀쩡하게 일하는 황제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에게 항상 바쁘다고 했을 때마다 저렇게 눈코 뜰 새 없이 일했을 황제를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직인가?”

황제는 간간이 보좌관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물음의 의미는 간단했다.

아직 신전에 보낸 이들이 도착하지 않았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어떻게 알았냐 하면 저 말을 할 때마다 꼭 나를 돌아보며 죄인 같은 웃음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 읽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간단한 호기심이었습니다.”

내가 말을 끝마치자마자 황당한 듯한 보좌관들의 시선이 날아왔다.

아, 미친 황제 앞에서 행한 언행의 가벼움을 나도 후회 중인데, 저런 시선까지 받으니 억울하기까지 했다.

신전과 황실이 사이가 안 좋은 걸 내가 알고 그랬겠냐고!

어느 순간부터 황제는 서류에 사인하던 것도 멈추고 보좌관들의 보고도 흘려들으며 서슬 퍼렇게 앉아 있었다.

따다닥 타다닥.

이 소리는 손가락 튕기는 소리였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은 긴장감이 방 안에 돌고 있었다.

“저기 폐하.”

타다닥거리는 소리가 뚝 멈췄다.

황제의 눈이 나를 향했다.

당장 뭐라도 태워 버릴 것 같던 눈은 나와 마주치자마자 온화하게 변했다.

“뭐가 필요한가?”

미친놈이 폭발하기 전에 뭐라도 해야겠기에 불러 세웠을 뿐이었다.

하지만 얼른 방도를 생각해 내야만 했다.

방 안에 있는 모든 눈들이 얼른 생각해 내라고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다들 누굴 보는 것이냐?”

얼음을 뿌리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를 보던 눈들이 일제히 자신이 하던 일로 옮겨 갔다.

“감히 내 사람을 넘보는 것인가?”

황제의 손이 검집으로 향했다.

왜 서류를 보는 곳 위에 검이 올라와 있나 하고 의문스러웠는데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저렇게 미쳐 날뛰는 용도로 필요한 것이었구나 하고.

“폐하.”

강에는 강으로 맞서야 하는 법. 약으로 나가니까 황제에게 씨알도 안 먹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황제보다 더 목소리를 낮게 깔고 그를 불렀다.

다행이었다.

효과가 있었다.

“그래, 연.”

황제가 허둥지둥 일어나서 나에게 다가왔다.

“저것들이 불편하게 했나? 없애 줄까?”

본인이 가장 불편하게 했으면서 다른 사람 탓이나 하는 황제를 나는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당연히 황제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혹시 저에게 화나셨습니까?”

“절대 아니다.”

“아니 화가 난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아니라니까.”

황제는 언제 서슬 퍼렇게 굴었나 싶게 온순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며 서성거렸다.

나를 안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데 왜 저는 저에게 화를 내지 못해서 다른 분들에게 화내는 걸로 보일까요? 혹시 제게 화난 것을 다른 이들에게 푸는 것이 아니십니까?”

“정말로, 절대로 아니다. 다시는 안 그러마. 내가 그러면 그대가 이렇게 나의 뺨이라도 때리거라.”

황제는 내 손을 슬며시 잡은 채 자신의 볼로 가져갔다.

다행히 내가 손에 힘을 줬기에 황제의 뺨을 때리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혹시나 이 일로 불충이나 반역이나 이런 소리가 나올까 봐 주변을 돌아봤으나 이미 방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종장도 그러더니 눈치가 매우 빠른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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