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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안배-31화 (31/60)

31화

황제의 말에 1후궁도 제법 타격이 컸는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뒤늦게 황제도 아차 싶었는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 또한 타격이 만만치 않아 애써 담담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폐하, 후궁 마마들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적막만 흐르는 방 안에 후궁들의 도착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황제를 돌아볼 생각도 안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젠 가도 되겠습니다.”

내 목소리가 어땠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그대로 문으로 향했다.

내 상처 입은 얼굴을 황제에게 보여 줄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정서가 불안정한 사람인데……. 그런데 왜 내가 상처받았지. 버림받은 건 내가 아닌데…….

황제는 원래 저런 사람이었는데 인제 와서 상처받는 내가 이상했다.

“연, 잠깐 이야기 좀 해.”

당장 이야기하지 않으면 사람 하나 죽일 만큼 섬뜩한 목소리였다.

“1후궁은 시종장이 잘 안내해 줄 거야.”

황제는 1후궁 쪽으로 고개 하나 돌리지 않고 말했다.

나와 황제 둘만 커다란 응접실에 남아 있었다.

나는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황제에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런 나에게 황제가 다가오더니 으스러지게 안았다.

“제발 그런 눈 하지 마.”

“전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 뒤로 슬픔을 감추지 말라는 말이다.”

애써 감췄는데 황제에게 들켜 버렸다.

그렇다고 황제의 품에 안겨서 울기에는 내가 왜 슬픈지 몰랐으므로 그러지 않기로 했다.

“저 진짜 아무렇지 않습니다. 물론 아까는 조금, 아주 조금 슬펐었는데 지금은 정말로 괜찮아졌으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미안하구나.”

정상에 앉아 있는 황제가 나에게 사과했다.

늘 그렇지만 이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우월감이 생겨나 곤란해지고 있었다.

“진짜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이만 가십시다, 폐하. 다들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저희가 초대하고 기다리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더라도 그들은 기꺼이 기다릴 텐데.”

“네.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기다림을 줄여 준다면 다들 폐하께 감사할 것입니다.”

황제는 기어코 또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가 그대를 어찌 이길까. 가도록 하지.”

황제는 내 손목을 살며시 쥐더니 깍지를 껴 왔다.

“음, 이건 썩 좋은 모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안 가면 이 방에서 나가지 않을 것이다.”

퍽 단호한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꼭 잡은 채로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식당에 도착하니 29명의 후궁이 앉아 있었다.

와우, 정말 아름다움 꽃밭이네……. 나는 왜 황제가 아닌가.

나는 왜 남자인 황제를 좋아해서 이렇게 사는가 하는 회의감이 살짝 올 뻔했지만, 앞의 여인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기에 애먼 생각은 머릿속 어딘가로 날려 보냈다.

저마다 값진 것으로 꾸민 것을 보니 모두들 오늘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았다.

“어서 들지.”

황제가 앉자마자 음식을 집어 들어 내 접시에 놓아 주었다.

총 29쌍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폐하, 혼자 먹을 수 있습니다.”

“내가 주고 싶어 그러지.”

29쌍의 눈동자에 적의가 서리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구미호 하나 쳐 내자고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위험한 여우들을 다 불러들이다니…….

황제 이놈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에게 저녁밥거리로 던져 주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제가 먹겠습니다.”

이를 사리물고 말을 해서야 황제가 음식 나르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제야 29쌍의 눈동자가 황제에게로 옮겨 갔다.

과연 황제는 황제인 건지 저런 관심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도 진짜로 밥이나 먹자고 오진 않았는지 그저 시늉만 할 뿐 진짜로 식사하는 사람은 나와 황제뿐이었다.

아니, 두 사람 더 있었다. 1후궁과 9후궁이었다.

9후궁도 신기한 사람이긴 했는데, 1후궁도 만만치 않았다.

9후궁은 굳이 뭐 황제에게 잘 보일 생각도 없는지 꾸민 건지 안 꾸민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요염한 여인이 수수하게 입으니 청초하기까지 해서 여기 있는 여인들 중에서 가장 빛이 났다.

“지금껏 이렇게 모이게 한 적이 없었는데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준비했다. 한데 뭐 그렇게 썩 편하지들 않은 것 같으니 다시는 안 만들도록 하겠다. 그러니 눈치들 그만 보고 식사들 해. 그렇게 안 먹으면 주방장이 슬퍼할지도 모르니까.”

안 보는 척하면서 다 보고 있었는지 황제가 쓸데없는 말을 길게 늘어놓았다.

그리고 사람 목을 무 썰듯 써는 사람이 주방장이 슬퍼할 것을 걱정하다니 참으로 웃긴 말이었지만, 오죽 할 말이 없었으면 저럴까 싶어 가만히 있었다.

“폐하, 그래도 저는 좋았습니다. 그러니 저는 자주 불러 주세요.”

1후궁이 싱긋 웃었다.

그녀는 참으로 회복력도 빠른 것 같았다.

저렇게 금방 괜찮아져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보면…….

“…….”

황제가 그녀를 무시했다.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얼굴의 웃음은 지우지 않았다.

저런 건 배워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표정 관리를 잘했다.

그렇게 절대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저녁이 끝나고 황제의 궁은 조용해졌다.

이제 24시간 황제와 함께 있어야 하는데, 첫날부터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앞으로가 걱정스러웠다.

“불편했나?”

“네,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들을 다 궁에서 내보낼까?”

정말로 무책임한 발언이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그거야 당연히 그대가 계속 신경 쓰니까. 그리고 궁에 여자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니,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대가 여인을 좋아한다는 것을 나는 참을 수가 없으니까.”

지극히 황제다운 이유여서 화를 낼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보내고 싶다고 하실 수 있는 부분이긴 합니까?”

“당연하지. 내가 말했잖느냐. 강제로 데리고 온 것인데 돌려보낸다고 하면 다들 좋아하지 않을까? 그대라면 어떻겠느냐.”

한참을 생각할 것도 없었다.

“뭐 전이라면 당연히 돌아갔겠지만. 폐하께 몸도 마음도 다 준 지금은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황제의 얼굴이 밝아졌다.

“고맙다.”

“아니면 뭐 제가 폐하 두고 어딜 가겠습니까?”

“나는 항상 내가 그대를 잡아 두고 있다고 여겼거든. 이제부터는 그대도 원한다고 생각해도 되겠나?”

“네, 제가 원해서 폐하 곁에 있는 겁니다.”

“그럼 내보내는 거로 해 볼까?”

“후궁들 말입니까?”

“그래.”

정말로 내보낼 기세였다.

“만약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글쎄, 그것까진 나도 잘 모르겠구나. 뭐 어떻게든 되겠지. 설마 미치광이 황제의 후궁들이라고 박해라도 당할까.”

전혀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이야기였다.

하긴 이 나라에서 여성의 위치는 높지 않았다.

지구라면 이혼이 흠이 아니겠지만, 이곳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기에 이혼한 여성이 잘 살 수 있는 환경일 리가 없었다.

더더욱 후궁이었던 여인들이 재혼을 할 수 있을 리도 없었고, 더욱 무서운 것은 과연 황궁에서 쫓겨나다시피 온 그녀들을 팔아넘긴 그들이 받아들이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확신이 없는 지금은 그저 그녀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황제의 마음이 확실한 상황에서 불쌍한 영혼들을 죽음의 벼랑으로 떠밀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번거롭지 않습니까.”

황제는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번거롭긴 하지. 그래도 그대가 신경이 쓰이니까 그까짓 번거로움은 충분히 감안할 만하다.”

어떻게 이렇게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인지, 이미 황제의 대답만으로도 후궁들을 굳이 궁에서 내보낼 필요성이 없어졌다.

그리고 가뜩이나 미친 폭군 소리를 듣는 황제에게 나의 사소한 질투심 때문에 오명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런 문제로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폐하도 저를 존중해 주십시오.”

황제는 내 말의 진위를 확인하듯 내 눈을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다. 그대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마.”

그렇게 우리는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벌써 함께 자는 것에 거부감이나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보이지 않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으…… 좀 춥네…….

황제랑 함께 잠자리에 들어서 따뜻했었다.

그런데 한기가 느껴져 눈을 뜨니 함께 누웠던 황제가 보이지 않았다.

이러니까 그렇게 춥지.

이불이 있는데도 따뜻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온기가 없어서였다.

언제부터 인간의 온기를 찾았다고. 참으로 간사한 내 마음을 꾸짖으며 나는 방에 없는 황제를 찾아 나섰다.

“아니. 내가 없으면 불안해하면서 도대체 이 밤에 어디로 간 거야?”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황제가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황궁에서 납치되었을 리도 없고, 집무실에도 없고, 혹시나 배고파서 식당에 왔나 싶어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다른 후궁의 궁에 갔나?”

입으로 내뱉었다가 곧 내 입을 때렸다.

낮에 다시는 후궁에 대해 질투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지 만 하루도 안 지난 시점에서 방정맞은 입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 없었으니까.

설사 후궁전에 갔더라도 다른 이유 때문이겠지, 남녀가 흔히 하는 번식행동을 하진 않을 것이니까.

도대체 어딜 간 것인가. 온 궁을 이 잡듯 뒤져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궁의 제일 음습한 곳 어딘가가 눈에 띄었다.

경비병도 없이 그냥 음침한 곳인데 왜인지 가고 싶었다.

문은 생각보다 쉽게 열렸고, 그 안에서 경비병과 맞닥뜨린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보통 경비는 밖에서 서지 않나?”

경비병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폐하께서 이곳에 계시나?”

뭐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황제의 페로몬 향이 이 안에 가득했으니까. 나에게 늘 하던 구애의 페로몬이 아닌, 오직 공격만을 하려고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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