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황궁에서 연회라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이에요. 제가 황궁에 들어왔을 땐 뭐 텃세다 뭐다 하느라 아예 교류 자체를 안 했었지요. 그런데 그냥 연회도 아니고 신전과 함께하는 연회라니…… 폐하께서 즉위하시고 처음 있는 일이라 모두가 신났답니다.”
앞에서 저렇게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9후궁이었다.
나와 떨어지기 싫어하던 황제는 아침부터 해야 할 일이 많이 부득이하게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황제궁에 찾아온 이가 9후궁이었다.
도대체 저 여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몹시 궁금했다.
한없이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온갖 정세에 빠삭하고, 후궁인데 황제의 총애는 바라지 않는다.
모든 후궁이 가문의 뒷배가 있는데 유일하게 가문이 없으며, 모든 후궁이 귀족인데 이 여인만 유일하게 무희이다.
무희란 춤과 노래를 파는 여인이라 폭군 황제가 아니었으면 후궁 자리에 앉기 어려웠을 것이다.
죽고 못 사는 사이도 아니고, 인질로 잡을 만한 가문도 없는 그녀를 황제는 왜 후궁으로 들였을까?
“공자님, 제 말 듣고 있나요?”
나는 화들짝 놀라 9후궁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놀라시는 거예요? 연회가 기쁘지 않으신가요?”
“당연히 저도 기쁩니다. 신기하기도 하고요.”
“그렇죠? 그래서 저는 궁에 와서 처음으로 치장이란 걸 했어요. 저 어때요?”
뭐, 그녀가 이쁜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꾸며 놓으니 정말로 이쁘긴 했다.
궁의 그 어떤 여인도 9후궁만큼 이쁜 여인은 없었다.
요염함과 청순함이 공존하는 인간이라니, 아마 신의 사랑을 듬뿍 받고 태어난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했다.
“저 어떠냐고 물을 사람이 공자님밖에 없지 뭐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보지만 마시고 얼른 말씀해 주세요.”
“물어보지 않으셔도 예쁘십니다.”
“정말요? 궁에만 박혀 있어서 혹시나 미모가 빛을 발했을까 봐 두려웠는걸요.”
“설마요. 언제나 예쁘실 것 같으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안 그래도 예쁜데 저렇게까지 환하게 웃으니까 웬만한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공자님의 입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 특히나 기쁘네요. 하지만 폐하 앞에서는 절대 하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저와 공자님 둘 다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녀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이런 염려를 하는 그녀는 후궁보다는 보좌관이라는 직책이 더 어울려 보였다.
“마마,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이만 가셔야 합니다.”
베스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베스의 눈이 9후궁에게로 향해 있었다. 눈초리가 매서운 채로.
“이런 우리 시종님에게 이야기가 들렸나 보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데.”
역시 베스는 황제의 사람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그녀를 미워할 리 없었으니까.
“이만 가시지요, 마마.”
“그래, 가자.”
연회라는 것에 생전 처음 와 봤다.
온 사방이 반짝거리고 사람들이 되게 많았다. 그리고 음식 또한 풍부했다.
“어. 저기 계시는 분이 공작님 아니세요?”
언제 옆에 왔는지 9후궁이 나에게 속삭였다.
뒤에 있던 베스가 눈치 주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여느 부자간처럼 사이가 안 좋으신 건 아니죠? 공작님의 자식 사랑은 세간에 다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걸요.”
“소문난 대로 저를 많이 사랑해 주십니다.”
그녀는 내 대답을 듣자 웃으며 나를 떠밀었다.
안 그래도 공작에게 다가가긴 할 거라 별 저항 없이 미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마마, 오랜만입니다.”
가까이 가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공작이 먼저 알아보고 다가왔다.
하긴 후궁 중엔 내가 남자라 눈에 띄긴 했다.
“네, 공작님. 오랜만입니다.”
내 어색한 대답에 공작은 많이 서운한 눈치였으나 그보다 반가움이 더 컸는지 그저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궁 안의 생활은 괜찮으십니까?”
“네, 폐하께서 잘해 주십니다.”
뭐 궁 안에 나와 황제의 소문이 쫙 났으니 궁 밖이라고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공작 또한 내가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보니 이것이 부모의 마음인 듯싶었다.
“공작저에 들를 시간이 혹시 있으십니까?”
“아, 제가 안 가서 서운하셨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사과하자 공작이 급히 말렸다.
“마마께서 마음의 짐을 가지시라고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그저 아비가 마마께 집밥을 대접하고 싶어서 여쭤본 것입니다. 나이가 드니 이런 욕심이 생가는 모양입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공작님께서 진작에 신경 써 주셨다면 이 몸이 얼마나 기뻐했…… 아, 죄송합니다.”
나도 모르게 속내를 내비친 나는 말끝을 흐렸다.
지금껏 나는 이 생각을 하고 살았던 것이다.
공작에 대한 원망을……. 진짜 가족도 아닌데 원망을 하다니…….
이것은 내가 아니라 몸의 영혼이 불쌍해서일 거라고 애써 나를 위안했다.
“아닙니다.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불편하시다면 안 오셔도 좋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워낙에 궁 출입에 예민하신지라 혹시 나오시는 건 가능할지 물어본 거였습니다.”
“아, 그래서 자주 오시지 않으셨군요.”
“네. 혹시 제가 오지 않아서 서운하셨습니까?”
글쎄……. 이 세계에 내 가족이 없다는 걸 아는데 서운했을 리가…… 없는데 저 말을 듣는 순간 서운한 것 같았다.
아무리 황제에게 인질로 보낸 아들이라도 많은 관심은 아니더라도 가끔은 찾아올 줄 알았는데, 옛날처럼 구박이 아닌 총애를 받는데도 안 찾아오는 공작에게 나는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것을 보고 염치가 없다고 했던가?
“아닙니다. 바쁘신 걸 다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제국이 안녕한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걸 일일이 서운해하기에는 저는 이미 아버님의 품을 벗어났습니다.”
공작이 내 말에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상처받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죄스러워졌다.
그래서 궁핍하게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제가 폐하께 공작저로 갈 수 있냐 여쭤보겠습니다. 아직 후궁이 궁을 떠나 본가에 간 일이 없는지라 승인을 받아야 할 사항인 것 같습니다.”
“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마마, 다리 아프시겠습니다.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데 저쪽에 앉으시겠습니까?”
공작의 눈은 걱정으로 가득 찼다.
나는 어딘가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공작이 가리킨 자리로 이동했다.
적당히 구석지면서 적당히 눈에 띄는 자리에 만족하면서 의자에 앉았다.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황제와 새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신전 쪽 사람인 것 같았다.
앉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황제는 급히 무엇을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나와 마주친 순간 황제의 눈이 초승달이 되었다.
황제가 눈도 안 보일 정도로 웃자 모두가 사색이 되었다.
공식 석상이든 비공식 석상이든 미친 짓만 하는 황제가 웃는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웃는 방향이 나인 것을 알고는 소문의 진실성을 확인했는지 다른 의미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왠지 부끄러워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곳에서 사라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연 연회이다. 모두 즐기도록.”
황제의 짧은 한마디가 끝나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공작 또한 나의 앞에 앉았다.
“폐하께서 마마를 총애하시긴 하시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숨기지 않으시는 것을 보면요. 마마께서 목숨을 끊으려고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앞이 까마득했었는데 이렇게 총애도 받으시고, 마마께서도 같은 마음이신 것 같아 이제야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입니다.”
그래, 이 이야기를 먼저 했어야 했다.
사실 이 몸의 주인은 그날 이후 죽은 게 맞았으니까.
“폐하께 들었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후궁은 모두 인질이라고요.”
공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 말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몸의 주인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는 들려줘야 할 것 같아서, 아무도 요구를 하지 않았지만 허락받지 않고 사용하는 내 입장에서는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마마.”
공작이 애달프게 나를 불렀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저도 인질이었는지, 저를 그렇게 보내야 했을 만큼 공작님의 안위가 중요했는지, 그리고…… 저에게 미안은 한지 계속 묻고 싶었습니다.”
공작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제서야 이곳에서 꺼낼 주제가 아니었음을 깨닫고 후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저 나는 급히 공작을 이끌고 발코니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다 늙은 아비를 울리는 아들이라니. 다른 사람들이 봤다간 불효라고 욕을 한가득 퍼부었을 것이다.
“나이를 먹으니 주책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슬렀는지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처음 봤을 때보다도 훨씬 주름이 많이 늘어나 있었다.
그만큼 고생이 심한 것 같았다.
그 고생이 자식을 보내서인지 일이 많아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자식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마마께서 생각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사실은 변명뿐인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들어 주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이 몸의 주인이 듣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