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제가 폐하의 검술 스승이었던 것은 기억이 나십니까?”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하긴 나는 기억이 없었으니까. 그랬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하나도 기억이 안 납니다. 그때 사고 이후 기억이 없어졌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공작은 죄스러운 얼굴로 나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는 폐하께서 아주 어릴 적부터 그분의 검술 스승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강건하고 반짝이는 분이셨지요. 저는 가르침의 즐거움을 느끼며 폐하와 하루를 보냈습니다. 즐거웠습니다. 미래에 제 주군 되실 분의 어린 시절을 지켜본다는 것은, 그의 성장이 나의 보람이 되는 것은 더없는 즐거움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그 즐거움을 본인 아들이 아니라 황제와 나눈 것 같았다.
내 눈초리가 사나운 것이 잘 전달이 되었는지 공작이 흠칫거렸다.
그러곤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마마께서는 태어나지도 않으셨습니다.”
아, 나는 머쓱해서 고개를 숙였다.
“흠흠. 그런데 문제는 폐하께서도 어리셨던 것입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뛰어나도, 좋은 스승들이 뒷받침해 줘도 부모가 필요한 아이셨으니까요. 하지만…… 선황제 폐하와 선황후께서는 살가운 분들이 아니셨습니다. 부모가 필요한 어린아이의 손을 냉혹하게 뿌리치실 수 있는 분들이셨습니다.”
말을 이어 가는 공작은 꽤나 쓸쓸해 보였다.
“선황제 폐하를 좋아하셨습니까?”
“부모로서는 좋은 분이 아니셨을지 몰라도 주군으로서는 멋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걸 가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좋은 아버지가 아닌데 어떻게 멋있을 수 있습니까?”
황제의 일이다 보니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내 마음에 황제가 들어와 있는 이상 황제의 일은 남 일이 아니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좋은 아버지가 아니셔서 그런 분을 보호자로 두고 계셨던 폐하는 애정을 많이 갈구하셨습니다. 그런 잘못된 갈구는 폐하를 황폐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때때로 정신을 놓기도 하셨습니다. 제가 그때 폐하의 곁을 떠나는 것이 아니었는데 저도 한 아이의 아버지이다 보니 자리를 비웠습니다.”
공작은 죄책감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러셨군요. 저는 사랑받았는데 저로 인해 폐하가…….”
“아닙니다, 마마. 마마의 잘못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어른들이 했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아이는 아이에 걸맞게 커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걸 뒷받침해야 하는 것이 어른인데, 그것조차 못 한 어른이 죄책감을 가져야지 마마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마십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맞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다시 뵈었을 때 폐하는 지금의 모습이었습니다. 더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습니다. 그저 폐하의 뜻대로 움직이는 검이 되는 것밖에는. 그렇게 내가 움직여 폐하의 뜻에 도움이 되어 드린다면……. 그렇게 해서 폐하를 방치했었던 벌이 사라진다면 어떤 것이든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제 아들을 내놓으란 명이라도요…….”
“그러니까 아버님도 선황제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분이셨군요. 본인의 아들의 손을 놓으셨으니까요.”
“네. 저는 마마께서 목숨을 끊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제가 남자라는 자각조차 없다는 말씀이십니다. 그 정도로 공작님에겐 아드님의 가치가 없었다는 말씀이십니다. 제가, 아니 공작님의 아들이 생각을 가진 인간이고, 더더욱 사랑하는 다른 이를 선택할 권리가 있고, 그것을 존중해 줄 만큼만 배려해 주셨다면 목숨은 끊지 않았을 것입니다.”
화가 났고 안쓰러웠다.
나라의 안위와 개인의 안위를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들에게 한 번이라도 마음을 물어봤었더라면, 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제가 오만했습니다. 그저 아비가 아닌 공작으로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마께 씻지 못할 죄를 지었습니다. 마마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이제부턴 아버지로만 살아가고 싶습니다. 욕심이라 비난하셔도 좋고, 저를 비겁하다 때리셔도 좋습니다. 폐하는 이젠 제가 돌봐야 할 아이가 아니고, 저는 제 모든 것을 폐하께 바쳤습니다. 되찾아 올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마마의 등 뒤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아버지로, 마마께서 행복해지시는 길에 보탬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아비라서 너무 미안하구나.”
모른 척하고 싶었다.
나는 공작이 잘못을 사죄하는 본인이 아니었다.
정작 들어야 할 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작이 사죄를 할 줄 아는 이라 다행이었다.
어디에선가라도 그가 공작의 사죄를 듣길 바랐다.
“사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춤곡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내가 춤곡을 알 리가 없었다.
내가 눈치 없이 그냥 있을 때 공작이 나를 잡아끌었다.
“연회의 꽃은 춤이지요. 우리가 너무 안에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첫 춤은 폐하께서 추실 것입니다. 당연히 마마께서 곁에 있어야 하지요.”
나는 얼떨결에 공작에게 이끌려 홀로 나왔다.
황제가 나를 보자마자 나에게 다가왔다.
“뭘 그렇게 오래 나가 있나. 몸이 춥지는 않고?”
“제가 발코니에 있는 걸 아셨습니까?”
“그대에 대한 걸 내가 모르는 것이 어디 있나. 그대의 아비와 시간을 가지는 듯해 참고 있었다. 안 그랬으면 그대가 내 눈에 안 보이는데 내가 안 찾아다녔겠나?”
나는 황제의 솔직한 말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첫 춤은 폐하께서 추셔야 한대요.”
“그래. 그래서 조금만 늦게 나왔으면 그대를 찾아 들어갔을 거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나와 한 곡 추겠나?”
황제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음…… 제가 춤을 출 줄 모릅니다.”
“괜찮다. 아무도 뭐라고 할 이가 없으니까. 그저 그대는 나에게 몸을 맡기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뭐 그렇다면야.”
나는 황제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누가 남자 포지션이고 누가 여자 포지션입니까?”
“그게 중요한가?”
“네, 제게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황제는 내 손을 잡은 채 중앙으로 걸어가며 쿡쿡 웃었다.
“그것이 중요하다면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 나는 어떤 것이든 상관이 없다. 그대와 함께하는 것이 중요할 뿐.”
홀의 한가운데서 황제와 나는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나는 황제가 한 말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 황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두근두근 두근.
심장이 주책없이 뛰었다.
황제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봐드리겠습니다. 폐하께서는 품위를 지키셔야죠. 저는 후궁이고요.”
“내가 지킬 품위가 없어서 괜찮으니 그대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뭐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세간의 모든 이들에게 술안주로 던져 주고 싶지 않았다.
“저는 두 포지션 다 모르니 그저 폐하께 몸을 맡기겠습니다. 다른 이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른 시작하시죠.”
“그래. 잘 부탁한다.”
황제는 그길로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노래가 시작되었다.
아주 은은하고 느릿한, 절대 숨이 흐트러질 리 없을 만큼의 노래가, 세간에서는 연인들을 위해서만 부른다는 노래가…….
“폐하께서 지시하신 겁니까?”
“노래를 묻는 것이라면 그래, 내가 지시했다.”
“황궁에서는 황궁만의 무도곡이 있는 줄로 압니다.”
“내가 황제인데 안 되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뭐 그렇긴 하지
“별로인가?”
황제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요. 좋습니다. 분명 전에 들었던 가사는 슬픈 내용이었는데 곡만큼은 따뜻했으니까요.”
“그래. 죽음도 갈라놓지 못할 것이라는 부분이 참 마음에 들더군.”
뭐 황제의 집착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 저런 말에 놀랄 내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듣고 있기에는 어딘가 불편해 주제를 돌렸다.
그사이 노래는 끝났고 황제는 나와 손을 맞잡은 채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
황제가 워낙에 미친 짓을 많이 해서인지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황제의 행동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1후궁을 포함한 몇몇 후궁들이 나에게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올 뿐이었다.
“신전분들과 대화는 잘되신 것 같습니다.”
“그래. 뭐 오랜만에 그들도 박해받지 않을 위치에 설 수 있으니 최선을 다하겠지.”
신서를 태운 것뿐이 아니라 신전 자체를 박해한 것 같았다.
“신전분들은 어떤 분들이셨습니까?”
“글쎄. 그저 신에 미친 이들이지. 그들은 신력이라는 것도 가지고 있다더군. 옛날에는 어떠한 불치병이라도 신력만 있으면 살렸다고 들었다. 죽은 생명을 살리거나 아예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것 외엔 신력이 다 했다고……. 하지만 그것도 다 옛날이지. 성녀나 성자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 몇백 년이 되었으니까.”
신력이라…… 신기했다.
지구는 아무리 유신론자들이 많고 종교가 많아도 신력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추상적으로 믿고 있을 뿐이었다.
믿음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신력이 존재하니 신의 유무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성자나 성녀가 나타나면 다시 신전의 영광이 살아날까요?”
“그렇겠지. 하지만 사람들은 신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면 신관들의 신력들이 나날이 줄어들 리가 없으니까. 교황의 신력이 성자가 사라지기 전 가장 말단 신관의 신력보다도 약하다고 하니까. 그저 자신들을 버린 신이 다시 돌아오길 바라고 있지.”
“신전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아니. 그들은 신이 자신들을 버린 적이 없다고 믿고 있다. 뭐 이유에 대해선 그들도 말 못 할 입장이면서 뭔 믿음이 그렇게 확고한지.”
비웃음을 흘리는 황제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신은 존재한다. 그런데 신의 힘이 약해졌다.
하지만 내가 만났던 신은 결코 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럼 정말로 신이 이 세계를 버린 건가? 이것도 사실 옳은 생각이 아니었다.
정말 버릴 이라면 나를 이곳에 보내서 멸망을 막게 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 그렇구나. 멸망과 신의 힘은 관련되어 있구나. 그리고 그 힘은 신의 힘을 방해할 만큼 거대하구나…….
신을 만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