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황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에서 웃으면 안 되는데 많이 웃겼다.
사실 말하자면 내가 잠자리를 많이 피하기는 했다.
왜냐하면 다음 날에 내가 많이 힘이 들었으니까. 페로몬과 신력으로 할 때는 그나마 괜찮은데 끝나고 나서가 문제였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니까.
내가 여인이라면 황제의 품에 안겼다는 것이 문제가 안 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사나이였다.
고로 많이 부끄러웠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싫었다는 말이 아니었다.
나도 좋았다. 그리고 좋고 싫고를 떠나서 감히 황제를 아래에 깔겠다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
“제가 싫어하는 것 같았습니까?”
“아니…….”
“그럼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그대는 원래 여인을 좋아했으니까.”
그래…… 그러긴 했지.
“그럼 폐하께서는 태어났을 때부터 남성을 성적으로 좋아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대가 처음이다.”
뭔 자랑이라고 저렇게 당당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지금까지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저도 처음입니다…….”
놀라는 황제와 그를 보는 나, 왠지 엄청 민망했다.
“정, 정말인가?”
말까지 더듬으며 좋아하는 황제를 보니 뭔들 어떠랴 싶었다.
“예. 몸도 마음도 폐하가 처음입니다. 그러니까 혼자 억울해하지 마십시오. 뭐 폐하는 워낙에 폐하의 여인들이 많으니 몸은 제가 처음인지 의문이지만 저는 그렇게 속이 좁은 사람이 아닙니다.”
“나도 다 그대가 처음이다. 나의 침실에 들어온 여인이 살아 돌아간 일은 없으니까.”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본인의 정절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는 황제를 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문제의 요점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눈만 끔뻑거리는 황제를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폐하를 굳이 제가 밑에 깔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그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잠자리는 충분히 만족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눈치 보지 마십시오.”
황제가 무지무지 감동받은 얼굴을 했다.
“그렇게 감동받을 거 없습니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을 땐 꼭 저에게 오시는 겁니다. 안 그러면 저 서운해합니다.”
“그래. 그렇게 하겠다.”
그리고 나는 슬쩍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어쩌면 지금이 최적의 순간일 수 있겠다 하는 판단이 들었다.
“폐하, 혹시 전쟁을 그만둬야 한다면 그만두실 겁니까?”
“무슨 뜻이지?”
“그저 갑자기 든 생각입니다. 제가 넘겨짚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때 지켜야 하는 약속이 전쟁이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하는 대상이 그 환청이라면 전쟁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그만두고 싶지 않다는 뜻 같았다.
하지만 사나이 한 번 대화를 시작했으면 최소한 전쟁을 끝내겠다는 확답 정도는 들어야겠다 싶어서 그대로 밀어붙였다.
“전쟁을 해야 하는 이유가 환청이라면……. 혹 전쟁을 끝내는 이유를 저로 하면 안 되겠습니까?”
제발 알았다고 대답을 해라…… 라고 속으로 엄청 빌었다.
“베갯머리송사를 듣는 기분이군. 정계에 나서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그대 아비가 전쟁은 싫다고 했나?”
나는 혹시나 황제의 기분을 거슬렀나 싶어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다지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제 생각이었다고 말씀드렸는데 기분 나쁘셨습니까?”
“아니, 그저 그대가 이런 걸 묻는 것이 처음이라 궁금한 것뿐이다. 그대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들어준다고 했는데 들어줘야지.”
“정말입니까? 약속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래. 약속하마.”
이렇게 쉽게? 지금껏 이 말을 꺼내려고 얼마나 돌고 돌았는지를 생각하니 억울했다.
진작에 이럴걸,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나는 황제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유 없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설사…… 이유가 있다고 해도 거짓말은 연인 사이에 하면 안 되는 거였으니까.
그렇게 나는 황제와 알콩달콩한 나날을 보냈다.
눈 뜨면 함께 집무실에, 눈을 감으면 함께 침실에서 뜨거운 밤을 보냈다.
그리고 가장 크게 변한 점이 있다면…….
“마마, 좋은 아침입니다.”
“예, 단장님도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어쩐 일로 황궁에 오셨습니까?”
언제 봐도 정갈함의 표본 같은 얼굴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마께서 신전을 방문해 주셨으면 한다는 교황 성하의 서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거 혹시 데자뷔입니까? 어제도 그제도 똑같은 용건으로 오신 것 같은데요?”
인공지능처럼 얼굴에 표정 하나 없던 성기사단장의 얼굴에 곤란함이 깃들었다.
아니, 용건을 들고 온 것은 본인이면서 왜 곤란한 얼굴은 자신이 한단 말인가…….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오늘도 대답이 같으십니까?”
“예. 같습니다. 저는 이 황궁을 못 떠납니다. 용건 있으면 교황께서 오시라고 하십시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성기사단장이 정말로 곤란한 얼굴을 했다.
나는 그가 왜 그러는지 알았다. 다름 아닌 황제가 교황의 방문을 막고 있었다.
성기사단장까지만 황궁 방문을 허락했다.
왜 교황의 방문을 거절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나에게 호들갑을 떠는데 가뜩이나 불안증을 가진 황제가 그 꼴을 또 보려고 할 리가 없었다.
“이렇게 계속 말씀드리는 저도 면구스럽습니다. 그럼에도 한 번만 더 교황 성하를 만나 주십까 청합니다. 황궁에서 마마의 입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 신전이 도움이 되면 되었지 나쁘지 않으실 겁니다.”
어이가 없었다. 성기사가 내 처지를 걱정해 주다니…….
나는 썩은 얼굴로 성기사를 바라보았다.
정결한 몸가짐과 그렇지 못한 입을 바라보며 나는 물었다.
“그럼 신전에서는 내 처지를 잘 안다 치면 제가 아이를 가지게 해 주실 수 있습니까. 가문도, 황제의 사랑도 다 가진 제게 지금 흠……이라고 하는 소문은 그것뿐입니다.”
“예. 마마께 그것이 필요하시다면 신전에서 들어주실 겁니다. 신전입니다, 마마.”
허……. 이미 나는 그 신전 도움이 없이도 신의 사랑 덕에 뭐 노력만 한다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
뭐 이미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밤낮없이 붙어 있는데 아이가 들어서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 뭐 노팅도 몇 번이나…… 했고…….
그러니까 저 성기사의 말이 같잖게 들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 단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세속적인 말을 아무렇게나 입에 담으십니다. 아, 신전이 쇠퇴한 게 사람들이 타락해서라는 말이 있던데 사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정치판에도 뛰어들려고 하시고 말입니다. 더더욱 성기사단장이라는 분께서 말입니다.”
당황한 그가 뭐라 하려는 걸 막았다. 내가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는지 그가 무릎을 꿇었다.
“뭐 하는 짓입니까?”
화가 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릎을 꿇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래서 무지무지 당황했다.
그때 성기사의 입이 열렸다.
“마마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저 한 번만 저희를 봐 달라고 하려는 것이 의도가 과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생긴 것만큼 사과 또한 깔끔했다.
원래 잘못을 저지르는 인간이 아닌, 잘못을 저지르고도 모른 척하는 인간만이 미운 법이다.
저렇게 바로 사과까지 하는데 더 옹졸하게 있을 수도 없었다.
“일어나십시오. 화내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목적 달성을 축하합니다. 폐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대신에 저를 이렇게까지 괴롭힌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일어나 옷매무새를 바로잡는 성기사단장에게 쐐기를 박았다.
황제의 허락이 필요한 사안이었지만 웬만한 건 다 들어주니까 이번에도 들어줄 것이었다.
“이야기 다 끝났나?”
황제가 문을 연 채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방금 들어왔다.”
“다 끝냈습니다. 제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습니까?”
“아니……. 그것보다 오후에는 내가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은데…….”
황제는 요즈음 종종 저렇게 혼자 자리를 비웠다.
뭘 하는지 물어야 하는데, 나의 위치가 후궁이다 보니 너무 관여를 하는 모양새가 좋지 않아 묻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가 저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아직 볼일이 남으셨습니까?”
우리를 보고 있는 성기사단장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제국의 태양이 영원하기를. 마마, 다음에 뵙겠습니다.”
인사하고 나가는 성기사단장을 볼 새도 없이 황제가 다가왔다.
그가 나의 양 볼을 잡은 채 나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는 항상 키스를 할 때면 부드러울 때보다 이렇게 격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늘 그렇듯 묵묵히 받아 주었다.
나와 떨어져 있을 때 그의 불안이 안정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되는데, 황제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아무리 사랑해도 24시간을 붙어 있으면 숨이 막히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주어지는 개인 시간이 꿀같이 달콤했다.
화끈한 시간을 보내고 함께 식사 후 황제는 볼일을 보러 갔다.
나는 멍하니 침실에 앉아 있었다.
이 얼마나 쓸모없는 인생이란 말인가……. 신세 한탄 한 번, 끊어질 것 같은 허리 걱정을 한 번 하고 나니 베스가 들어왔다.
“마마, 9후궁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역시 이 여인의 정체가 심상치 않았다.
어떻게 황제가 없을 때를 귀신같이 알고 찾아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들어오시라고 해라.”
“그것이…….”
“왜?”
“폐하께서 침실에는 마마 외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침실 안에는 황제의 페로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공간에 나도 다른 사람을 들이자니 조금 찜찜하긴 했다.
“그래…… 응접실로 모셔. 금방 간다고.”
“예, 알겠습니다.”
나는 몸에 대충 아무거나 걸치고 응접실로 향했다.
뭐 전 같으면 아름다운 여인을 만날 때 당연히 외형에 신경을 썼겠지만, 지금은 그럴 일 없었다.
이젠 그 어떤 아름다운 여인을 앞에 가져다 놓아도 마음이 두근거리지 않았다.
나는 완전히 게이가 된 것이다.
하지만 후회 같은 것이 들지 않았다.
원래부터 나는 이렇게 될 운명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