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의 안배-40화 (40/60)

40화

오늘은 청순한 콘셉트가 아닌 화려한 콘셉트의 9후궁이 응접실이 마치 자신의 방인 양 당당하게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공자님.”

저 공자라는 말도 저 여인이 아니면 쓸 일이 없었다.

“별로 오랜만 같지는 않습니다만.”

“에이, 역시 공자님은 재미없다니까요. 공자님, 한 지붕 아래에 살면서 이렇게 몇 날을 못 보면 오랜만이랍니다. 다른 후궁들은 매일 만나는걸요. 아, 맞다. 폐하의 총애는 혼자 받으시니 이런 건 별로 필요 없으려나요?”

말만 들으면 비꼬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을 보니 그녀는 그저 즐거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화난 얼굴도 비꼬는 얼굴도 봤었다.

첫 만남에 화를, 다음 만남에 비꼼을……. 그러니까 결론은 그녀는 비꼬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즐거울 뿐.

한숨을 쉬며 나는 대답했다.

“즐거우신가 봅니다.”

“어머. 역시 공자님은 저를 잘 아시네요. 다른 사람들은 보통 비꼬는 걸로 듣던데. 호호.”

알면서도 저런 식의 대화를 하는 것이 그녀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녀의 성격이 글러 먹은 것이 분명했다.

뭐, 내가 데리고 살 것도 아니고 뭔 상관이냐 싶어 나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오늘은 어쩐 일이십니까?”

“그래도 오랜만에 인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요? 그리고 우리가 꼭 용건만 있어야 만나는 사이도 아니고요.”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여인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저러다가 제풀에 지치겠지 싶어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역시 재미가 없으시다니까. 이 정도 했으면 발끈하는 것이 정상인데 이렇게 놀리는 맛이 없어서야.”

“제가 기쁨조는 아니니까요. 그보다 그때 아이는 잘 있습니까?”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은 존재였다.

처음에는 황제의 아이일까 의심도 했었는데 지금은 그런 의심은 하지 않는다.

다만 황제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낳은 여인이 어떻게 이렇게 당당히 후궁 자리에 있을 수 있는지, 또한 여인이 아니라 인류애 자체가 없는 황제는 왜 이 여인을 자신의 그늘 아래 두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공자님께서 그 아이를 묻는 것은 처음이네요.”

지금껏 장난스러운 얼굴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굳은 얼굴에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엄마의 얼굴이었다.

“제가 괜한 질문을 했군요. 앞으로도 꺼내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그것이 옳았다.

“아니에요. 이 황궁 안에서 그 아이의 안부를 입에 올릴 수 있다고 생각조차 못 했거든요. 그래서 조금 놀란 것뿐이랍니다. 그 아이는 그럭저럭 지낸답니다. 잘 지내지는 못할 거예요. 방 안을 벗어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니까요. 세상에 드러나면 안 되는 아이라……. 그때 공자님을 뵈었을 때가 그 아이의 첫 외출이었답니다.”

저것은 나에게 죄책감을 심어 주기 위한 말이 분명했다.

그러니 나 때문에 첫 외출을 망쳐 두 번째 외출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안 그래도 되는데 양심에 찔리는 것을 보니 나 또한 죄책감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어찌했든 가까이할수록 불편해지기만 하는 여인이었다.

“죄책감을 가지라고 한 소리가 아니에요. 그 부분은 내 문제이니까요. 그저 안부를 물으시길래 대답을 한 것뿐이에요.”

“그렇다기에는 이미 제가 들은 게 있어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만.”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요.”

나는 괜히 물었다는 생각을 하며 과거의 나를 욕하고 있었다.

“그래도 공자님과 이런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좋네요. 앞으로도 종종 물어 주세요. 그 아이의 안부요. 그 아이의 이름은 아델리아랍니다. 그저 아델이라고 불러 주세요.”

아델리아. 이쁜 이름이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빠를 묻고 싶었지만, 폭탄 같은 여인을 건드리기가 무서워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아직 묻지 못했다.

그때 그녀가 내 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목이 타서 마시다 보니 내 잔이 비었는지도 몰랐다.

주인인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손님인 그녀가 하고 있었다.

정말로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었지만 나는 괘념치 않고 따라 주는 차를 마셨다.

“그전부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우리 공자님이 저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니 정말 신이 나네요.”

신기한 장난감을 발견한 듯한 얼굴을 하는 그녀의 눈을 피해 차에 시선을 고정했다.

“폐하가 없을 때만 찾아오시는데 어떻게 오는 것입니까? 설마 황제궁에 사람을 심었습니까?”

어찌 보면 아주 위험한 질문이었다.

황제궁에 사람을 심는 것은 자칫하면 반역에 속할 수도 있는 부분이니까.

하지만 신려는 완전 평온한 얼굴이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요? 제가 이 궁에서는 가장 힘이 없답니다. 시종도 시녀도 거느리지 못하고 가진 것이라고는 몸을 보호해 줄 기사 단 하나라는 것은 궁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답니다. 그리고 저는 무희 출신이라 받쳐 줄 친정 또한 없지요. 그런데 제가 무슨 수로 사람을 심을 수 있을까요?”

틀린 점이 없었다. 그러면 혹시 그녀는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일까?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니었다.

어둠이 있고 신이 있다면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 또한 존재하지 않을까?

그래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걸 감안하고서도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신려 님은 미래를 보십니까?”

내 말에 신려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배까지 부여잡은 채 웃기 시작했다.

순간 부끄러움에 온몸이 빨개지는 것 같았다.

미친 소리를 들을 각오로 한 질문이긴 했지만 저런 반응이라니, 아무리 나라도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신경질적으로 그녀에게 쏘아붙였다.

“그만 웃으십시오. 오해했다면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정말 최근에 이렇게 웃어 본 적이 없는데, 덕분에 실컷 웃었답니다. 공자님이 재미없다는 말은 취소예요. 상상력이 정말 풍부하시네요. 재미있게 웃었으니까 진실을 알려 드릴게요. 첫 번째 질문이 반은 사실이에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기까지만이랍니다. 양해해 주세요.”

그녀의 말대로 뒷배도 자신의 사람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녀가 황제에게 사람을 심는다.

뭔가가 이상했다.

혹시 돈이 많나? 무희를 하면서 번 돈으로 황제궁의 사람을 샀나?

가장 신빙성이 있는 답을 도출하고 나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도 대답은 해 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 질문은 해야 했다.

“폐하의 안위를 위협할 정도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는지 신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공자님은 공자님의 안위가 아니라 폐하의 안위부터 물으시네요. 마치 폐하를 사랑이라도 하는 것 같으시군요.”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한데 같은 후궁의 위치인데 황제의 총애를 나 혼자만 받는 입장이니, 저런 반응이 나오면 안 되었다.

황제가 나를 따를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저런 반응이 아니었다.

설마…….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난가?

나는 후다닥 의자를 뒤로 물렸다.

가뜩이나 황제가 이런 문제엔 민감한데 괜히 문제가 될까 무서웠다.

그래서 서둘러 주절주절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뱉었다.

“저기 신려 님, 신려 님은 충분히 아름다우십니다. 그러나 당신도 저도 알다시피 우리는 후궁의 위치입니다. 그건 우리는 이미 임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더더욱 신려 님에게는 아리따운 아기님도 계시지요. 제가 듬직하고 잘생기고 믿음직한 것은 알겠지만 아직 아빠가 되기에는 거 뭐랄까요…… 철이 없다고 할까요? 저도 뭐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부담스럽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하지요…….”

신려는 가만히 나를 보기만 할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래서 쐐기를 박았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거절입니다!”

단호하게 말했는데 그녀는 담담히 앉아 있었다.

상처받은 표정도 아니었다.

그리고 한참 후…….

“풋, 하하하하.”

그녀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웃어 댔다.

제길…… 이번에도 잘못 짚은 모양이었다.

방정맞은 뇌와 방정맞은 입의 합작품에 이번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만 웃으십시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도통 웃는 것을 그만둘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주전자에 있는 차를 다 마실 기세로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도대체 어떤 사고를 해야 그런 결론에 달하나요?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네요. 음…… 공자님께 죄송하지만 저는 공자님을 그런 마음으로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호기심이 있는 것은 맞지만, 저는 호기심과 목숨을 바꿀 만큼 어리석은 존재가 아닌걸요. 그저 폐하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궁금한 것뿐이었답니다.”

하……. 그럼 그저 평범하게 질문할 것이지 괜히 인상을 굳혀 가지고는 사람이 오해나 하게 만들고…….

나는 애꿎은 그녀를 탓했다.

“그래서 대답은요?”

“대답해야 합니까?”

괜히 심술이 났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궁금하잖아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의 연장선이라 생각해 주세요.”

“예, 사랑합니다.”

뭐 사랑이 죄도 아니고 말 못 할 것이 무엇이냐 싶었다.

하지만 나의 대답에 신려는 정말로 상처받은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 걱정 또한 함께 있었다.

누구를 향한 걱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에 대한 것인지, 황제에 대한 것인지…….

“그렇군요. 사랑이군요. 하긴 공자님은 저와 위치가 다른 분이니 다른 결과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공자님, 공자님도 궁 안의 소문을 알고 있으시겠지요?”

알다마다 오전에 성기사단장이 친히 알려 주고 갔는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답지만 무희인 저와 신분은 확실하지만 후계를 생산하지 못하는 공자님, 우리 둘은 다르지만 같은 것이 존재하지요. 저의 신분은 저를 아비 없는 아이를 낳게 하고 그 아이를 자유로부터 고립시켰습니다. 고작 사랑이라는 것이 저에게 가져온 것들이지요. 그렇다면 공자님의 사랑은 공자님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걱정이랍니다. 그게 저처럼 아픈 것이 아니길 진심으로 바라요…….”

쓸쓸한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

신분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사람치고는 솔직히 황제의 후궁까지 올랐기에 뭐라고 할까 하다가 미친 황제니까 가능하구나 싶어 일단은 그만두었다.

“걱정은 잘 알았습니다. 폐하께서 이젠 돌아올 듯싶기도 한데 용건은 말씀 안 하실 겁니까?”

그녀가 슬프고 쓸쓸하다고 해서 나까지 그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오메가다. 여성체인가 남성체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궁에서 말하는 약점은 나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있으니까.

“아, 제가 온 용건 말이지요. 호호, 사실은 성자가 나타났답니다.”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신에게서 아무 말도 듣지 못했는데…… 뜬금없이 성자라니? 혹시 사기인가? 만감이 교차하는 소식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