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의 안배-42화 (42/60)

42화

“마마, 기침하셨습니까?”

나는 일어나자마자 들리는 목소리가 황제가 아닌 것에 한 번, 그리고 벗고 있는 나를 보고 또 한 번, 그리고 가까이에 있는 베스에 의해 또 한 번 놀라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여인들처럼!

“꺄아아아악.”

“죄송합니다, 마마.”

베스가 사죄를 했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쿵쿵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베스를 바라봤다.

“무, 무슨 일인데 아침부터 여기 있는 건가?”

베스는 나를 잘 보좌해 주었다.

항상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나의 의중을 잘 맞춰 주었다.

결단코 그가 내 침실에 이렇게 허락도 없이 들어온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왠지 얼굴은 베스인데 분위기가 다른 것 같았다.

감정 없는 얼굴이 나를 처음 만났을 때의 베스 같았다.

지금의 베스는 종종 나를 향해 안타까운 눈빛을 했기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뒷골이 오싹했다.

“베스가 아니구나?”

놀란 듯 상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황제궁의 시종 베리어입니다.”

“베리어? 그럼…….”

“예, 베스는 저와 쌍둥이 형제입니다. 저희 형제가 황족을 모실 수 있어 영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긴장한 것과는 다른 결말에 허탈해졌다.

“베스는?”

“당분간 휴가라 제가 보좌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폐하께서 명하셨습니다.”

휴가라…… 그래, 이곳은 베스의 직장이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일어났다.

“나는 시중들 것이 별로 없으니 아침에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만두었으면 좋겠군.”

“명심하겠습니다.”

베리어는 바로 물러났다.

베스와도 이 정도로 말 섞어 본 적이 없어 생소한 아침이었다.

몸을 대충 씻고 나오자 진수성찬이 나를 반겼다.

하지만 어디에도 황제는 없었다.

밥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들러붙은 것 같던 황제가 식사 시간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나를 침대에서 혼자 눈 뜨게 했다.

“폐하는?”

베리어가 우물쭈물했다.

아까까지 인공지능인 양 딱딱하게 대답하던 사람은 어디에 갔는지 곤란한 얼굴로 허둥거렸다.

“두 번 물어야 답을 할 것인가?”

“폐하께서 식사를 마치시면 알려 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래……. 그런 폐하께서는 밥 먹기 전에 내가 본인의 위치를 물을 걸 생각 못 하셨나 보구나.”

나의 차가운 목소리에 베리어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당분간 궁을 비우셨습니다.”

궁을 비워? 나는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궁을 비울 때는 딱 하나 그가 잠행을 나갈 때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만 허락된 시간이었다.

그런데 당분간이라는 전제 조건이 붙었다는 것은 공식적인 출궁이었다.

도대체 어떤 급한 일이어야 궁을 비운단 말인가……?

나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애써 쳐 냈다.

“이유는 무엇이라 전하라고 하셨나?”

“돌아오시면 직접 말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말로 입맛이 싹 달아났다.

하지만 먹지 않으면 이 비실비실한 몸은 견디기 어려울 테니 모래알을 삼키는 심정으로 입에다 음식을 욱여넣었다.

“식사가 끝나면 9후궁에게 이곳에 와 달라고 연통을 보내라.”

“예, 알겠습니다”

내가 식사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베리어가 고분고분 대답했다.

황제가 떠난 궁에 머무는 나는 도대체 무어라고 말해야 하는지 기가 막혔다.

그리고…… 아직 황제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나보고 곁에 있어 달라고 했던 황제였다.

하지만 나에게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본인이 먼저 곁을 떠났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지금 나는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응접실에 앉아 9후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밖의 말을 듣지도 않고 말했다.

“들어오시라 해라.”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들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9후궁이 아닌 교황이었다.

“성자님을 뵙습니다.”

교황이 한쪽 무릎을 굽혔다. 뒤에 있는 성기사단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내 귀에서는 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구나.”

황제가 없는 황궁에 그가 싫어하는 인물들이 들이닥쳤다.

“누구의 허락을 받고 오셨습니까?”

나는 나를 성자라고 칭하는 이를 보자마자 욕이 나오는 것을 참고 침착하게 물었다.

“폐하께 허락을 받았습니다.”

허……. 나를 이곳에 놓고 가면서 그래도 부탁이랍시고 들어준다 이건가? 마치 이건 먹고 떨어져라 할 때의 행동 같아서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저를 만나러 오시면서 제 허락은 필요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저절로 뾰족한 목소리가 나왔다.

“성자님께서 허락한 만남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셨다면 죄송합니다.”

죄송하다 말하면서도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더욱 화가 치밀어 나답지 않게 소리 질렀다.

“그놈의 성자, 성자, 그만하십시오. 저는 되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앞에 있는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너무 흥분했구나. 진정하려무나.”

신의 손길이 머무른 듯 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리고 조금 있다 새의 형상이 내 눈에 보였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신에게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때 교황이 다급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신께서 이곳에 계십니까?”

나는 신과 교황을 번갈아 보았다.

이렇게 눈앞에 두고 나에게 묻는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 눈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그대를 성자라고 칭하는 이유이기도 하지. 어찌 한낱 인간이 나를 보고 듣고 하겠느냐?”

“저도 인간입니다.”

“그래. 내가 선택한 인간이지.”

당신도 인간이었지 않느냐, 라고 묻고 싶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 인간을 뛰어넘어 신의 위치에 오른 인외 존재가 되어 버렸기에.

그때 교황이 엎드렸다.

“위대하신 태양의 신 솔 님께 신의 종 성 젤라피오 인사드립니다.”

신이 있는 방향이 아닌 나에게 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신이 보이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쪽 아니고 이쪽입니다.”

내가 방향을 제시해 주자 교황이 더욱더 놀란 얼굴을 했다.

하긴 신의 형상까지 보는 것은 몰랐을 테니까.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신의 대리인이라고 미친 듯이 굴던 그가 형상까지 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소름이 돋았다.

괜히 알려 주었나 싶어 후회까지 들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아까까지 분명 화가 났었는데 지금은 화가 많이 사라졌다.

신의 효과가 있는 듯싶었다.

“신탁을 받았습니다. 내용은 성자…… 마마께서 하시는 일 모든 것이 신의 뜻이니 받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랬군요. 그래서요?”

“그래서 성…… 마마를 신전에 모셔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신분이 신분이신지라 성자님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내 의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이라도 말입니까.”

나는 충직한 심복처럼 말하는 교황을 비웃으며 쏘아붙였다.

“성…… 마마님께서 하시는 일에 보탬이 되려면 아무래도…….”

“도움이 될 것이란 말씀이지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호칭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예, 성자님.”

교황은 기쁘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 보니 9후궁보고 오라고 해 놓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 선약부터 챙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제가 선약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잠시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나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응접실을 나섰다. 그리고 바로 9후궁을 볼 수 있었다.

“저를 마중 나오신 건가요? 이렇게까지 반갑게 맞아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신려는 오늘도 한결같았다. 아름답고 자유로워 보였다.

궁 안에 갇혔는데 저런 모습을 할 수 있다니 경이롭기까지 했다.

“사실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툭 치기만 해도 나오는 소문 항아리라고 해도 이리 사람을 세워 두시기만 할 건가요?”

어딘가를 데리고 가긴 해야 했다.

그런데 이곳은 황제궁이고, 황제가 없을 때 내가 막무가내로 어딘가를 써도 되는지 알 수 없었기에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교황보고 밖에서 기다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때 신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런 저 말고 다른 손님이 또 있으신가 보네요. 이를테면 신전에서 오셨다든가 하는 거 말이에요.”

그녀는 정말로 모르는 것이 없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안에 계신 분들만 괜찮으시다면 저는 합석도 좋답니다.”

그녀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합석은 바로 이루어졌다.

응접실에 교황과 신려 그리고 나까지 세 사람이 빙 둘러앉았다.

성기사단장은 극구 서 있겠다 우기고는 나와 교황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뭐 본인이 저렇게 하고 싶다는데야……. 나는 이 이상한 조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테이블의 한가운데에는 신이 앉아 있었다.

접시 위에 앉아 있으니 조각 같았다. 새 조각…….

“불경한 생각이구나.”

신이 나의 머리 위로 올라와서 부리로 나를 쪼아 댔다.

아픔이 없는 것을 보니 그저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송구합니다.’

속으로 사과를 마친 후 나는 신려를 바라보았다.

“아까 여쭤보고 싶다 한 것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우아하게 차를 마시던 그녀가 싱긋 웃었다.

“이리 귀한 자리까지 마련해 주셨는데 당연히 되지요.”

모두의 눈이 내 입을 향했다.

나는 큼큼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폐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아십니까?”

나는 그녀가 ‘저도 황궁 안에 있었는데 어찌 알겠습니까.’라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방 안에 무거운 침묵만이 돌았다.

뭐야 이건? 황제의 행보를 왜 나만 모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교황의 입이 열렸다.

“그 문제라면 이 노인도 알고 있습니다, 성자님.”

성자님…… 아까 혼자 있을 때 불렸을 땐 그저 부담스러웠는데 다른 사람이 있는 데서 그 말을 들으니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붉어졌을 얼굴을 애써 가라앉히며 교황에게 물었다.

“어떻게 아십니까? 교황 성하도 황궁에 사람을 심으셨습니까?”

교황은 손을 내저었다.

“절대 아닙니다. 황궁에 사람을 심는 것은 숨길 게 많은 이들이 하지요. 저는 신을 모시는 몸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특한 짓을 하겠습니까?”

그런 사특한 짓을 한 신려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모른 척하며 교황의 말에 집중했다.

그도 신려가 사람을 심었다는 것을 알고 말한 것은 아닐 테니까.

“다만 폐하께서 어디에 가셨는지 모르는 이는 이 제국에 없습니다. 성자님께서만 모르시는 듯합니다. 뭐 폐하께서 그리하라 이른 거겠지요. 하지만 저는 왜 성자님의 눈과 귀를 막아야 했는지 궁금합니다. 늘 폐하께서 하시던 일을 하러 갔음에도 말이지요.”

이유는 뻔했다.

전쟁…….

“남부 쪽에 전쟁을 치르러 가셨습니다.”

미친 개자식! 망할 놈! 너를 믿은 내가 미친놈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