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철저하게 배신당했다. 화가 미친 듯이 끓어올랐다.
아까까지 설마,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닐 거야, 라는 부정도 계속 이어 갔다.
왜냐하면 나와 약속했으니까. 사랑한다고 지껄인 그 입으로 나에게 약속했으니까.
나는 철저하게 기만당하고 배신당했다.
“괜찮으신가요? 공자님”
신려가 나를 염려했다.
괜찮냐고? 아니, 괜찮지가 않았다.
나와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 황제는 결론만 놓고 보자면 나에게 속삭이던 사랑도 결국엔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으니까.
만에 하나 중요했더라도 언젠가는 헌신짝처럼 버려질 그런 것이었다.
그래,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고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 조상님들의 말이 틀린 점이 없었다.
물론 그게 지구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국경도 아니고 생을 건너서 알게 된 것이 가장 기가 막히긴 했다.
“하아…… 알고 싶었던 것이 너무 충격적이라……. 일단 신려 님, 죄송한데 다음에 다시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신려는 살짝 걱정하는 표정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을 기약했다.
방 안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교황과 성기사단장을 내보내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이 제국에서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는 유일한 이들이었기에…….
결론만 놓고 보자면 교황의 뜻은 관철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신전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으니까.
꿈도 희망도 사랑도 없는 황궁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았다.
세계 멸망은 어떻게 하냐고?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 내가 무슨 미친 짓을 해도 황제는 전쟁을 멈추지 않을 텐데…….
그러니까 나는 황제가 모르는 곳에서 세계가 망하는 꼴이나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신도 내 마음을 이해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 계약 자체도 내가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지 꼭 막으라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신탁 자체도 내가 하려는 일을 보좌하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애써 나를 위로하며 고개를 들었다.
“교황님, 전에 저에게 하셨던 말씀 유효합니까?”
“무엇이든지 성자님의 뜻대로 하시면 될 것입니다.”
교황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성자라고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그저 황제에게 도움이 되지 인류에는 도움이 안 되었으니까.
“신을 뵐 수 있고 신의 목소리를 전달받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저희들에겐 그저 빛 그 자체입니다.”
“성자라고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숨겨 달라고 하는 것이니까요.”
조금 뻔뻔한 부탁이었지만 저들이 처음부터 원한 것은 내가 신전에 가는 것이었으니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성자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다 된다고 말하는 교황을 보니 그제야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래,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마음이 짓밟혔다고 생각하니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일어나 성큼성큼 걸었다.
같잖은 마음 따위는 이미 황제의 배신에 짓밟혀 조각도 남지 않았다.
문을 여니 베리어가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황제가 궁을 비우는 때에 없어진 베스가…… 타이밍이 참 그랬다.
“베리어.”
“예, 마마.”
베리어가 고개를 숙였다.
“베스가 정말 휴가 간 것이 맞나?”
베리어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내가 지금 아주 빡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거든.”
베리어는 내가 왜 화내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진짜 나는 지금 굉장히 화가 난 상태였으니까.
“예, 휴가 간 것이 맞습니다. 폐하께서 휴가 가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래……. 그 말에 그나마 베스에 대한 미움이 없어졌다.
황제가 베스를 빼돌렸다는 것은 베스가 나를 진심으로 모셨다는 소리였으니까.
이 황궁에 그래도 내 편 하나쯤은 만들어 놓은 것 같아 허무함이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베리어, 베스를 불러 줄 수 있나? 휴가 중이라 미안한데 급하게 물을 것이 있어서. 그리고 자네는 베스가 찾아갈 때까지 오지 않아도 괜찮아.”
베리어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으나 내가 강경하게 말하자 알겠다고 물러났다.
그리고 나는 교황이 준 사제복을 입고 황궁을 벗어났다.
황궁을 벗어나는 것이 이렇게 쉬울 줄 몰랐던 탓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공작님께 서신을 드릴 것입니까?”
교황이 마차 안에서 물었다. 그러고 보니 공작이 있었다.
연회 이후 만나지 못했는데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걱정할 터였다.
하지만…… 공작은 충신이었다.
황제의 신임 때문에 자기 아들을 후궁의 자리에 보낼 만큼 냉철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황제가 추궁한다면 내 위치를 말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제국의 검이라고 불리는 공작 가문이니 지금쯤 황제와 함께 전장에 있을 확률이 더 높았다.
그리고 굳이 그걸 확인까지 하고 싶지 않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차 밖으로 풍경들이 지나갔다.
내가 이곳에 와서 밖에 나온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때는 정신이 없어 잘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이렇게 보니 참으로 신기했다.
그리고 황궁 외 거리에서 사람을 보니 무언가 울컥하기도 했다.
나는 내가 그동안 갇혀 지냈음을 이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마차가 멈춰 섰다.
“무슨 일이냐?”
교황이 물었다.
밖에서 웅성웅성한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 중에 살려 주세요, 가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긴 신전 마차가 지나가니 그럴 만도 했다.
“어린아이를 안은 여인이 마차를 막아서서 살려 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교황은 내 눈치를 봤다.
내가 뭐가 된 것도 아니어서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중에 신전으로 찾아오라고 해라. 지금은 성자님이 계시니…….”
나는 서둘러 교황의 말을 잘랐다. 굳이 나 때문에 아프다고 하는 어린아이를 몰라라 하고 싶지 않았다.
“전 괜찮습니다.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시다면 주셨으면 합니다.”
말을 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정말 내가 뭔가라도 된 것처럼 명령을 한 것 같아 찜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교황의 감명받은 것 같은 얼굴을 보자 괜찮구나 싶어 가만히 있었다.
“그럼 잠깐만 기다려 주시지요. 금방 끝내고 오겠습니다.”
교황은 결연한 표정으로 마차를 나섰다.
마차 안에서 교황이 나올 줄을 몰랐는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때 새의 모습을 한 신이 교황의 자리에 나타났다.
“괜찮은 것이냐?”
참으로 일찍도 물어본다.
“아니요. 안 괜찮습니다.”
“그래. 그대는 늘 씩씩해서 괜찮은 줄 알았다.”
신의 말에 순간 울컥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새 황제에게 이 정도로 마음을 빼앗겼는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함께 슬픔까지도 찾아왔다.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쓱 닦았다.
그래……. 사람 마음이 어떻게 칼 같을 수 있겠어. 자르겠다고 하면 뚝 잘리고 그러겠냐고. 이건 그냥 억울함에 나오는 눈물이야. 오늘만 울 거야. 오늘만…….
그런 나를 보다 못한 신이 토닥토닥해 주었다.
볼일을 마치고 마차 문을 열던 교황이 멈칫했지만 그는 조용히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마차는 조용히 길을 달렸다.
수도를 벗어나니 자연이 우리를 반겼다.
그래, 이렇게 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살다 보면 마음도 정화되고, 그러다 보면 거지 같은 놈은 잊히겠지,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얼마 못 가 날아가 버렸다.
황제에게서 어슴푸레 나던 싱그러운 향이 생각이 났다.
탁한 나뭇재 향이 아닌 자연 그대로였던 나무 향, 이 자연에서는 그놈이 더 생각날 것 같았다…….
아니야. 지금은 배신감에 이런 감정이 드는 것뿐이야. 세상에 남자는 많고, 그리고 세계가 멸명하면 황제 따위가 생각날 턱이 없었다.
그 말은 나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았으니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그랬기에 나는 그저 안일하게 마차에 앉아서 신전을 향해 갈 수 있었다.
“성자님.”
내가 더는 울지 않자 교황이 나를 불렀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신서에서는 교황이 성자의 밑은 아니었다.
뭐 신력은 성자가 더 많았지만, 교황이 최고 권력자였기에 성자도 교황에게는 꽤 깍듯했던 걸로 기억했다.
그런데 이 교황은 나에게 너무나도 저자세로 나왔다.
“예, 말씀하십시오.”
나는 지금까지 저지른 무례를 되새기며 꼿꼿한 정자세로 앉았다.
그러고 보니 신전에 의탁하러 가는 주제에 지금까지 너무 거만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어 저절로 깍듯한 대답이 나왔다.
또한 유교 보이로서 너무 어른에게 버릇이 없었던 것도 같아 살짝 후회까지 들었다.
이건 그러니까 절대로 내가 머물 곳이 없어서 저자세로 나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유교 보이니까 이제라도 예의를 차리는 것이었다.
“혹시 신께서 이곳에 함께 있습니까?”
교황은 정말 굽신거리며 물었다.
나는 내 어깨에서 나를 토닥거리는 신을 흘끔 쳐다보았다.
어떻게 알았지?
“예. 그런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신력이 성자님 주변을 에워쌌습니다. 그 어떤 사악한 힘도 성자님에겐 닿지 못할 만큼 말입니다. 정말 성자님은 신의 사랑을 받으시나 봅니다.”
아…… 아까부터 마음이 진정되는구나 싶었는데 신의 뜻이었나 보다.
하긴 신력이 있으면 내 몸의 기력도 빠르게 돌아오곤 했으니까, 뭐 진정시키는 것쯤은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신의 사랑을 받으면 뭐 해, 인간의 사랑 하나 쟁취 못 하는걸…….
또다시 울적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나는 감사하다는 짤막한 인사만 건넨 다음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교황이 나에게 굽신거리는 것이 신에게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니 방금 전까지 깍듯하게 대하려던 다짐은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적당히 무례하지 않게 적당히 예의를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성자님, 신전에 도착했습니다.”
교황의 목소리와 함께 멀리서부터 나 신전이요 하는 웅장한 건물이 보였다.
“이곳부터는 신의 영역입니다.”
그래, 그래 보인다.
새의 형상을 한 신이 빛이 나기 시작했으니까. 나는 창 너머로 내가 지금부터 살 곳을 바라보았다.
부디 이곳에서는 잊고 싶은 기억 같은 것을 만들지 않기를……. 인류가 조금 더 강해서 황제에게 강하게 맞서 멸망이 조금 더 늦춰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의 신전 생활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