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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안배-44화 (44/60)

44화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쌓였던 피로를 푸느라 거의 침대 안에만 있었다.

먹는 것도 방에서 해결했다.

교황이나 신전 사람들도 모두 친절하고 내가 무엇을 하든 가만히 내버려 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래서야 황궁에서와 다를 바가 없구나……. 나는 자괴감에 빠지기 전에 얼른 기운이나 차리려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축 처지는 몸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신이 내 몸에 신력을 거의 들이붓다시피 하는데도 전처럼 개운하지가 않았다.

왠지 신은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나에게 말해 주지 않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혹시 나 죽을병 걸렸나?

의심에 의심이 더해 가는 그때쯤 나는 슬슬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정말 죽을병 걸렸나 싶었던 그때, 신력이 강력한 때에는 불치병도 고쳤다고 했던 황제의 말이 생각났다.

신력이 그 정도로 대단하다면 한낱 인간도 아니고 신이 쓰는 신력이니 내가 죽을병 걸려도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내가 진짜 죽을병 걸렸는데 신이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있을 리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이니까.

“제가 왜 이러는지 언제쯤 알려 주실 겁니까?”

나는 답답해서 창턱에 앉아 있는 새를 향해 물었다.

“혹시 저 죽습니까?”

“아니, 내가 있는데 그럴 리가.”

신이 상큼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내가 왜 이렇게 말라비틀어진 배춧잎처럼 시들시들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답 안 해 주실 겁니까?”

“그대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텐데.”

그러니까 지금은 대답해 줄 생각이 없다는 말이었다.

저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말해 주면 어디 덧나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말하기 싫다는 신의 머리채를 잡을 수 없었기에 나는 그저 한숨만 쉬었다.

오늘도 나에게 들어온 음식 중에 과일만 대충 먹었다.

그마저도 한 입씩 물고는 더는 못 먹었지만 말이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교황의 눈엔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마치 어린 손주를 보는 할아버지의 눈빛 같아서 몹시 거북했다.

아마 그는 내가 신전과 맞지 않아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순간 든 생각에 정말 그렇나 싶었다.

하지만 내 몸이 이렇게나 신력을 먹어 대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그럴 리가 있나 하는 의문 또한 함께 들었기에 그저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혹시 따로 드시고 싶은 것이 있으십니까?”

먹고 싶은 거? 글쎄, 김치찌개나 된장찌개가 먹고 싶긴 했다.

뭐 지구에서도 가끔 먹고 싶었는데 한국을 떠나 산 지가 오래되었고, 직업 특성상 인세와 떨어진 곳에서 살다가 보니 겨우 생일 같은 때만 먹고 지낸 음식이었다.

하……. 생각하니 더 먹고 싶네…….

황제가 배신했을 때보다 더 슬퍼져 나는 기가 막혔다. 심지어 저절로 눈물까지 찔끔 나왔다.

내가 미치긴 미쳤나 보다.

음식 못 먹어서 눈물까지 나오다니……. 나는 자괴감에 얼굴을 덮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교황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결연한 그 목소리에 더욱더 자괴감이 들었다.

교황이 그런다고 해서 이 세상에 없는 음식을 구해다 주지는 못할 터였다.

그리고 나는 며칠 후…… 참지 못하고 내가 직접 식당으로 가 김치를 만들고 김치찌개를 해 먹었다.

맛이 어땠냐고? 진짜 욕 나올 정도로 맛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은 적이 없었던 탓이다.

불행했다고 하는 데 비해 너무 편안한 삶을 산 것 아니냐고? 그럴 수도 있다.

내가 취직한 곳은 거의 국제 공무원 같은 꿀 보직이었고, 숙식 또한 제공되는 곳이었다.

물론 라면 정도는 내가 끓일 수 있었지만, 김치와 같은 난해한 음식을 내가 만들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한 결과 나는 음식이라 할 수 없는 배추식을 그냥 그대로 먹었다.

왜냐고? 지금까지 구역질을 해 대던 다른 음식과는 달리 그 맛없는 것을 속에서 잘 받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젠 이놈의 배 속까지 이상해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눈물겨운 식사를 끝마쳤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다음부턴 음식들을 아주 맛나게 먹었다.

나는 그러한 내 몸 상태를 보며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가장 유력한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의심을 품었다면 확신이 필요하기에 나는 교황을 찾아 나섰다.

신전 안에서 내 위치를 아직 공표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들이 나에게 예를 갖췄다.

나는 부담스러운 마음을 느끼며 교황이 있는 곳으로 안내받아 걸음을 옮겼다.

그때 아는 이를 만났다.

“성자님, 오랜만입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성기사단장이었다.

“예, 오랜만입니다. 몸은 뭐 괜찮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황님을 좀 뵈러 가고 있습니다.”

그런 나를 성기사단장은 안쓰럽게 바라봤다.

“제가 안내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거절하려고 했는데 그 질문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나를 안내하던 사제를 향한 것임을 알게 되자 조금은 민망했다.

“바쁘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성자님이 가장 우선입니다. 그렇기에 절대 바쁘지 않습니다.”

나에게 정치나 들먹이던 성기사단장이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기도 뭐해서 그저 성기사단장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아까까지도 입 다물고 있었음에도 어색하지 않았는데 안내하는 사람 하나가 바뀌자 분위기가 매우 어색했다.

“신전에서 지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성기사단장이 어색했는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침묵을 깬 것을 보니 그 또한 편치 않은 것이 분명했다.

“글쎄요. 와서부터 계속 누워만 있어서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성기사단장은 그저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입술만 달싹일 뿐 뭐라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왠지 그 행동이 나에게 미안해하는 것 같아 나는 서둘러 다음 말을 이었다.

“단장님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허약한 몸을 가지고 있는 제 잘못입니다. 그러니까 방금 전에도 단장님이 실수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단장이 편한 것은 아니지만 그저 몇 번 본 게 다인 그가 나에게 뭘 저렇게 쩔쩔매는가 싶어 한 말이었는데, 단장의 눈빛이 깊어졌다.

마치 황제가 나를 보던, 어떤 것을 욕망하는 눈빛과 같았다.

미친…… 지금 왜 황제 따위를 떠올리는 거냐고!!

나는 오염될 뻔했던 뇌를 씻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길을 걸었다.

다행히 내가 불편해하는 것이 티가 났는지 성기사단장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 정도 눈치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때 교황의 방 앞에 다다랐다.

똑똑똑.

성기사단장이 문을 두드렸다.

“예, 들어오세요.”

온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몸도 불편하실 텐데 부르시지요.”

교황은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기다리지 못할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나는 권하지도 않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예,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교황은 그런 나를 나무라지 않은 채 차를 따라 주었다.

“교황님은 혹 제 몸 상태가 왜 이런지 알고 계십니까?”

당황할 거라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교황은 담담한 얼굴을 했다.

“아시는 모양입니다. 혹시 제가…… 제가 생각하는 게 맞습니까?”

“성자님이 생각하시는 것이 아이에 관한 것인가 물으신다면 예, 맞습니다.”

몸 안에서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심장인지, 황제에 대한 미움인지 아니면 미련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다 떨어져 나갔으면 좋았으련만 무엇이든지 남아서 심장 한구석을 아프게 찌르고 있었다.

“아이를…… 제가 낳아야 할까요?”

목소리가 떨려 왔다.

“생명은 존엄합니다. 생명을 거두는 것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설사 신일지라도 목숨은 함부로 거두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래, 생명을 살린다는 신전에서 내가 너무 철없는 질문을 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하…… 최악이네…….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얌전히 태교만 하면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새 생명이라. 참으로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바로 튀어나왔다.

황실에서 나오며 이보다 최악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것보다 더 최악이었다.

마음 떠난 남자의 아이나 품고 대체 어쩌란 말인가…….

이렇게 된다면 나는 태어난 아이를 볼 때마다 황제를 떠올릴 것이었다.

숲 하나 보고도 황제가 생각나는데 그의 핏줄인 아이는 오죽하겠는가…….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라 방 안이 싸늘해진 것을 나는 느끼지 못했다.

다만 다그치듯 묻는 교황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멸망이라니요……? 성자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나 뭔가 천기누설 같은 거 했나, 순식간에 교황의 방 안에 모셔져 있는 신의 자그마한 조각상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뭐 그런 건 아니었는지 조각상 안에 있는 신이 얌전히 있었다.

왜 저렇게 해괴한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곳이 그저 신의 힘을 비축해 주는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제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아마 제정신이 아니라 헛소리를 한 것 같습니다.”

“이 늙은이가 아무 도움이 못 돼서 그렇습니까? 이 한 몸 바쳐서라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알고 계신 것을 이 늙은이에게 알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 이 입이 방정이었다.

멸망을 막으려면 황제를 저지해야 한다.

유혹은 실패했고, 전쟁은 이미 진행 중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런데 교황이 뭘 할 수 있을까?

그때 신이 조각상에서 나왔다.

“그대에게 너무 큰 짐을 지었구나. 혼자 말고 둘이라면 그 짐도 가벼워지지 않겠느냐?”

인제 와서……? 퍽이나 생각해 주는 척하는 신을 나는 고깝게 바라보았다.

“그대는 참 신에게 불경하구나. 뭐 몰랐던 것도 아니니 봐주마.”

“예예.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말하라는 말씀이지요?”

“그래. 그대가 괜찮다면 말이다.”

“안 괜찮을 일이 있겠습니까? 뭐 신께서 말씀하시라니 말을 해야지요……. 사실은…….”

나는 교황과 성기사단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의 말이 이어질수록 표정들이 다양해지는 그들을 보며 나는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의 기나긴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때 그들은 울고 있었다.

교황은 소리까지 냈고, 깔끔한 미남인 성기사단장은 처연미를 뽐내면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순간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앞의 두 사람은 한참을 울었다.

그것이 내 삶에 대한 안쓰러움이었는지, 멸망에 대한 두려움이었는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물에 위로를 받았느냐고 묻는다면…….

YES……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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