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황제 시점에서…….
황제는 자신이 데려온 후궁이 호수에 몸을 던졌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후궁이 되는 것보다 죽음을 택한 이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당연한 것 아니냐는 생각도 황제는 절대로 못 할 위인이었으니까.
오늘도 변함없이 황제의 귀에는 속살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말을 안 들으면 마치 큰일 날 것만 같았다.
목소리는 어느 날 갑자기 들렸다.
그날은 여전히 연약하고 여전히 다른 아이들보다 무능한 자신에게 선황과 황후가 다녀간 날이었다.
선황과 황후는 자신이 자식임에도 경멸하는 눈빛을 지우지 못했고 손을 올리는 것 또한 주저하지 않았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눈동자에 다른 감정이 비치길, 자신에게 쏟아지는 폭력들이 그저 빨리 사라지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때 외로운 그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야. 죽이면 되는데 왜 기다리고만 있니?]
죽인다고?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를? 내가?
생각만으로도 오한이 들고 두렵고 무서웠다.
목소리는 처음엔 한 번만, 다음 날엔 두 번, 그다음 날엔 조금 더, 더, 더…… 더 문장을 뱉어 내었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자신에게 말 걸어 준 목소리의 명령을 따르기 시작했고, 손에 피를 묻혀 갔다.
피를 묻힌 첫날은 괴로웠고, 두 번째는 무서웠고, 어느덧 셀 수 없을 만큼 피를 묻혀 괴로움과 두려움이 없어질 때쯤 그것들은 무감정이 되어 자신을 덮었다.
그렇게 큰 아이가 지금의 황제였고, 황제는 자신의 감정도 다른 사람의 감정도 거대한 벽안에 가둬 둘 수 있었다.
마치 그것은 감정의 무덤과도 같았다.
황제의 호기심은 죽을 뻔한 후궁이 깨어나자 더욱더 커졌다.
자신의 후궁이 남자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저 어느 날 충성만을 외치는 공작이 짜증 났고, 그의 충심을 시험코자 자식을 바치라 하였다.
보좌관이 후궁은 어렵고 다른 방법을 찾겠다는 말에 그저 후궁으로 앉혀 놓으라고 지시를 했던 것이었는데 그게 남자여서 어렵다는 얘기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보좌관이 너무 유능해서 법도 바꿔 버렸으나 그게 별로 싫지 않은 자신이 놀라울 뿐이었다.
관 속에서 일어나는 공작의 아들은 신비로웠다.
금빛을 띠는 노란 머리는 당장이라도 흩날릴 것처럼 부드러워 보였고, 감겨 있던 눈이 떠지자 드러난 초록색 눈동자는 가장 생동한 숲을 연상케 할 만큼 부드러웠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갈수록 느껴지는 청량함과 해방감은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황제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성인이 되고 알았다.
자신만 듣는 목소리는 이제 익숙해졌기에 참을 만했지만, 본능이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해결이 안 되었다.
식욕은 있지만 맛이 안 느껴졌고, 수면욕은 있지만 감각이 날카로워져 자주 깨기 일쑤였다.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성욕이었다.
누구를 안아도 해방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런 자신이 처음으로 누굴 보는 것만으로도 해방감이 느껴진다는 것이 신기했다.
또한 귓가의 목소리 때문에 자신의 남자 후궁이 더욱더 궁금해졌다.
[도망가야 해. 가까이 가지 마.]
목소리는 계속해서 외쳤다.
저 목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죽여, 찔러, 베어 내, 이렇게 폭력적인 말만 내뱉었었는데 처음으로 다른 말을 했다.
물론 황제는 그 말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본능이 마치 네가 찾고 있던 것이 저기라는 듯 가까이 가게 만들었으니까.
황제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밉보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황과 황후가 죽은 후 처음으로 든 생각에 실소를 흘렸지만, 새로운 후궁이자 공작의 아들인 블리 연 가히 제드, 라는 이에게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목소리는 몇 날 며칠 동안이나 황제를 괴롭혔다.
황제는 목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도망가라고 소리를 지르다가 또는 죽이라고 하는 것을 들어 줄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때마다 자신이 느꼈던 해방감과 더불어 멍하게 쳐다보는 녹색 눈동자가 떠올라 살인 충동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 처음으로 참은 충동이었다.
황제는 자신이 착각한 것이라면 가히 제드를 죽이려고 했지만, 그에게 느꼈던 해방감은 다시 찾았을 때도 그대로였다.
황제는 블리 연 가히 제드를 처음엔 숨어서 다음엔 당당히 계속해서 찾아갔다.
하지만 제드는 황제를 싫어했다.
자신은 아직 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또한 제드는 후궁이라는 신분에도 여자를 만났다.
물론 아무리 예쁘게 생겨도 그가 남자임을 자신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래도 후궁이면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따지려고 했던 것인데, 자신의 후궁은 잘못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다.
더더욱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자신에게 따질 자격조차 없다고 대거리하는 그의 목소리였다.
내가 자신의 부군 될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절대 그를 정말로 연애 감정 그런 걸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방만한 그에게 여인을 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했다.
그런데 그는 남자 좋아하십니까? 라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나 나에게 던졌다.
‘내가 남자 좋아하냐고? 절대 아니었다. 나는 남자가 아니라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나를 좋아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죽이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전쟁을 해야 한다고 부추기는 목소리를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랬는데…… 분명 그랬는데 황제는 요즘 사는 것이 그렇게 지루하지 않았다.
정확히 저 오만방자하고 자기밖에 모를 것 같으면서도 자신에게 남자를 좋아하냐고 묻는 블리 연 가히 제드라는 이름을 가진, 찬란하면서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상큼하면서 사랑스러운 녹색 눈을 가진 자그마한 후궁 때문이었다.
처음엔 분명 호기심이었다.
그저 호기심이 분명히 사라지면, 거슬리는 감정이 남는다면 없애 버릴 생각도 했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왜 그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지도 아직 몰랐다.
남자 좋아하냐는 말에 왜 대답을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고, 일하는 중간중간 멍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서 짜증이 나는데도 짜증을 낼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인 것 같았다.
그가 나를 처음으로 똑바로 쳐다본 그때. 그의 녹색 눈동자가 나를 쳐다볼 때, 오로지 그의 눈에 나만 담겼을 때부터 나는 그가 무슨 짓을 하든 화를 못 낼 운명이었던 것 같았다.
자존심 따위는 없었다.
내가 그런 것을 내비치기에는 내 삶이 너무 고단했고, 나는 언제든지 이 삶을 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한 나에게 해방감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 꽃이 예쁘다는 걸 알게 해 준. 나의 사랑스러운 연에게 자존심…… 그런 것을 내비칠 수 있을 리 없었다.
끊임없이 매달렸다.
윽박지른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다.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는 그의 눈을 바라볼 때마다 과거의 저를 죽이고 싶었다.
그에게 나쁜 첫인상을 남겼던 그때의 황제 자신을 말이다.
그렇게 정성을 들이던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연이 세상 다시없을 달콤한 향기를 풍기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이상야릇한 숨을 쉬고 있었다.
머리로는 분명히 다가가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본능이 머리를 이겼다.
그리고 황제는 그날 연을 안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만 황제는 너무 행복했다.
처음으로 느껴 보는 행복감이었다.
그의 싱그러운 향이 자신을 감싸면 이 세상 어떤 일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연이 깨어나면 비난할 줄 알면서도 너무 좋았다.
너무 좋아서 그의 눈이 자신을 비난한다 해도 괜찮을 만큼 황홀한 경지에 올랐다.
하지만 연은 깨어난 후 황제를 피해 다녔다.
이건 괜찮지 않았다.
화를 내더라도 비난하더라도 미워하더라도 황제 자신의 옆에서 해야지 피해 다니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연에게는 원래 자존심 따위를 내려놓았기에 사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끊임없이, 또 끈질기게 따라다닌 끝에 그의 마음을 얻어 냈다.
처음으로 신에게 감사했다.
지금까지 황제를 괴롭힌 알파라는 형질이 짜증스러웠는데 그 덕분에 연과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았다.
그리고 자신의 페로몬 아래에서 예쁘게 흐느끼는 반려를 볼 때면 마음속에 충만함이 차오르곤 했다.
황제는 그렇게 오만하게도 블리 연 가히 제드, 자신의 반려를 손에 철저하게 옭아맸다고 생각했다.
고작 마음 한 자락 얻은 것으로 본인의 것이라고 자만했다.
평생 곁에 있겠다고 말한 그것 하나를 믿고 있었다.
궁을 떠날 때도 많이 불안했다.
사실 할 수 있으면 데리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연은 전쟁을 싫어했다.
워낙 심성이 약한 이라 전쟁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했다.
매일 사람의 목을 썰던 미친 살인마 폭군이라고 불리는 이와 살을 맞대고 살면서 고작 전쟁을 무서워하는 것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본인은 모를 것이다.
그래서 불안감을 애써 누르고 궁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번 전쟁은 사실 황제가 준비한 마지막 전쟁이나 매한가지였다.
사실은 모든 나라를 발아래 놓을 생각이었지만, 연과 함께 있는 날이 너무 행복해 그런 생각을 접어 두기로 했다.
하지만 그간 준비한 것도 있었고, 마침 남쪽에 있는 야만인들이 제 주제도 모른 채 계속 날뛰기에 더는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리라 마음먹은 것이었다.
연이 궁을 떠났다는 거지 같은 소식을 들을 줄 알았다면 절대 떠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처음 소식을 받았을 때 황제는 자신이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저 빨리 궁에 돌아와야 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궁에는 자신의 반려가 없음을 확인시켜 주듯 그의 향기 한 조각 머물러 있지 않았다.
굳이 다시 묻지 않아도 떠났다는 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