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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안배-48화 (48/60)

48화

“폐하.”

시종장이 죄인처럼 서 있었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 살아 있는 이라면 당연히 시종장이었다.

시종장은 황제에게 시종장 그 이상이었다.

항상 그의 곁에서 진심으로 나를 모시는 사람이었다.

다르게 말한다면 이 황궁 안에 살아 있는 유일한 황제의 편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황제는 그런 시종장마저도 베고 싶은 것을 참아야만 했다.

“연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

말을 하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검을 들고 있는 손이 앞의 노인을 베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연이 죽은 것도 아니니 다시 찾아다 이번엔 꽁꽁 묶어 놓기만 하면 된다.

이런 생각 하나로 참을 수가 있었다.

“마마께서는 폐하께서 출정하신 날 이 궁을 떠나셨습니다.”

시종장이 엎드렸다.

저렇게 목만 보이면 정말로 베어 버리고 싶어졌다.

그리고 황제는 그러한 시종장의 뒤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연의 시종을 볼 수 있었다.

그래, 사실은 저것이 잘못한 것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반려가 아끼는 것을 알고 종종 없애 버리고 싶었던 것도 혹시나 미움받을까 봐 손대지 못하고 있었는데, 자기 주인 하나 지키지 못했으니 살아 있을 가치가 없었다.

그렇게 비척비척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시종장이었다.

“폐하, 마마께서 아끼는 이입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이 아이의 휴가를 명하셔서 궁에 있지도 않은 아이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래…… 그랬었다.

혹시나 마음이 약한 자신의 반려가 전쟁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을 두려워할까 봐 겁이 났었다.

그래서 연에게 비밀 따위 만들지 않는, 황제의 명이라고 해도 자신의 주인을 따르는 저 건방진 시종이 혹여나 입을 잘못 놀릴까 봐 그랬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 그렇게 하마. 그렇다면 그날 주인이 나가는 것도 모른 채 노닥거린 너희들의 목을 다 베어 버리면 되겠군. 그러면 되겠나?”

황제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당장이라도 그의 칼날이 눈앞에 있는 아무나의 목을 베어 버릴 것 같았다.

방 안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자신의 목이 떨어질 것을 아는 이도 모르는 이도 다들 침묵했다.

하지만 그 누구의 목도 떨어지지 않았다.

“크하하하하하.”

황제가 미친 듯이 웃어 젖혔다.

그러더니만 검을 질질 끈 채 뒤돌아섰다.

이윽고 시종장은 재빨리 뒤의 사람을 내보냈다.

황제가 뒤돌아선 것은 살려 두겠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찾아라. 찾아서 데려와라. 그러지 않으면 이 황궁에 개미 한 마리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황제의 뒤에서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존명!”

황제는 그길로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침실은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듯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을 청소했느냐?”

뒤에 있는 사람을 향해 황제가 눈동자를 번뜩이며 물었다.

“시종장님이 하지 말라고 하셔서 이 안의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청소를 지시할까요?”

“아니. 이 안에 들어오는 것은 그 무엇이든 살려 두지 말아라. 황명이다.”

“예. 알겠습니다.”

황제는 온기가 남아 있지 않은 침대로 향했다.

침대 머리에는 연이 입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침의가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소중하게 손에 들었다.

미미한 페로몬 향이 남아 있었다.

“하아…… 연…… 어디에 있는 것이야. 어디에……. 내가 그렇게 곁에 있어 달라고 말했건만 왜 나를 버린 것이냐고…… 연. 흐으윽.”

황제는 이제는 듣지 못하는 옷의 주인을 향해 끊임없이 물었다.

그리고 침의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연의 향기가 묻어 나오는 그것에, 그 향기가 사라질까 소중하게…….

“도망갈 수 있으면 해 보거라. 나는 기꺼이 따라갈 테니, 그대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

황제는 눈을 번뜩였다.

눈물이 고인 검은 눈동자에 빛까지 더해져 살기가 한층 더 번뜩이는 것 같았다.

“시종장입니다.”

“…….”

“수도에 있는 모든 금발 머리를 잡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직 찾았다는 소식이 없습니다.”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

황제의 목소리에 고저가 없었다.

그저 눈동자와 페로몬만이 그가 화가 났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페로몬을 맡지 못하는 이들도 황제 가까이에 갈 수 없을 정도로 황제의 페로몬이 날뛰고 있었다.

“예. 그들을 돌려보내도 되겠습니까?”

‘내 것이었던 것이 도망갔는데 모든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살아 있는 것이 거슬리는구나…….’

황제의 생각이 끝나자마자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죽이라고 했잖아. 말을 안 들으니 이젠 영영 손에서 벗어난 거야.]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지금은…… 목소리에 잡아먹힐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이렇게 정신을 놓는다면 왠지 연과는 영원히 끝이라는 생각이 온 머릿속을 채웠다.

‘닥쳐, 조용히 해. 너 때문이잖아. 네가 그렇게 나를 연과 떼어 놓으려고 하지 않았어도 지금쯤 그는 내 품에 있었을 거다.’

황제는 이제야 원망의 화살을 누구에게 돌려야 하는지를 명백하게 깨달았다.

자신을 망치고 있었던 목소리를 이제야 마주할 용기가 생긴 것이다.

그래. 처음부터 자신이 단단했더라면 연을 잃어버릴 이유도 없었을 것이었다.

황제는 끓어오르는 자괴감에 미칠 것만 같았다.

이따위 환청이 아니라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느껴지는 자신의 반려에게 더 귀를 기울였다면, 지금쯤 자신이 웃고 있었음을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를 환청 따위로 보다니. 어리석은 놈, 너는 그놈에게 속고 있는 거다. 나는 실체가 없는 환청 따위가 아니다. 나는…….]

“네가 뭐든 상관이 없으니 제발 닥치고 있어. 안 그러면 네놈도 죽여 버릴 거다.”

시종장이 흠칫하는 것이 보였으나 황제는 상관이 없었다.

자신이 미쳤다는 소문은 계속 부풀기만 할 뿐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다들 감옥에 집어넣어 버려라. 그래…… 연은 피를 싫어하는 것 같으니 죽이지는 말고, 그저 다들 잡아넣어라.”

연을 말했을 적에 황제의 목소리가 순간 온화해졌다는 걸 시종장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시종장은 바로 황제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저 온실의 꽃처럼 얌전하기만 한 줄 알았던 남자 후궁에게 황제가 저렇게까지 빠질 줄 알았더라면 자신이 좀 더 신경 썼을 터였다.

하지만 그저 한때의 놀이라고만 생각했기에 그 후궁이 황궁을 떠나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서슬 퍼런 황제가 사랑이라니……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지난날의 실책을 곱씹으며 시종장은 걸음을 빨리했다.

황제의 안녕이 황실의 안녕이고, 황실의 평안함이 제국의 평안임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그였다.

매일매일 살얼음판 같은 황궁 생활이 이어졌다.

그것은 후궁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늘도 누군가의 목이 나왔다고 합니다.”

후궁 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동안 황궁에 봄바람이 부는 줄 알았는데 또다시 피바람이 부는가 보네요.”

목소리에 맞장구치는 목소리에 1후궁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열세 번째 후궁께서는 오해 가득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우리 황궁에 봄바람이 분 적이 있었던가요?”

싱긋 웃고 있었음에도 그녀의 말의 진위를 모르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남자인 후궁보다도 후계를 생산할 수 있는 1후궁의 편에 서야 함을 이 자리에 있는 거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1후궁께서는 봄바람이 부는 것을 원치 않으신가 봅니다.”

싸늘한 침묵이 맴돌았다.

감히 1후궁의 말에 토를 다는 이가 누구인지 서로가 쳐다볼 뿐이었다.

그때 같은 목소리가 또 울려 퍼졌다.

“이 안에서 전의 숨 막히던 상황을 기억 못 하는 이가 있나요? 저는 그때보다도 지금이 더 좋다고 느꼈답니다. 물론 봄바람이 누구였는지. 왜 봄꽃이 졌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바람을 다시 몰고 올 이도 우린 모두가 알고 있지요.”

1후궁의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는 9후궁께서는 다른 이를 모시는 것에 익숙해 보이십니다. 이렇게 뒤에서도 품어 줄 정도면…… 정이라도 통한 줄 알겠습니다.”

“흠…… 우린 모두 폐하를 모시는 이들이지요. 그러니 모시는 거에 익숙한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하지만 폐하의 마음이 누구에게 가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네요. 뭐 모른다면 그거야말로 백치 아니겠어요? 아, 폐하의 정은 모두가 알다시피 한 사람에게만 통한답니다.”

이번에도 9후궁은 아무 거리낌 없이 말했다.

솔직히 그녀는 후궁들에게 별로 유감이 없었다.

할 일 없이 예쁘게 차려입고 그냥 차만 마시는 그녀들이 그저 우습게만 보일 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면서 자신들이 뭐라도 되는 양 득의양양할 때면 귀엽게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 사랑하는 이를, 그것도 자신이 유일하게 친우라고 인정한 이를 건드리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역시 주제를 모르는 이들과는 함께 있으면 안 되겠군요. 제 위신도 함께 바닥을 치는 것 같아서요. 이제부터 9후궁은 이곳에 오지 않아도 된답니다. 혼자서 뼈저리게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깨닫도록 하세요.”

“이 황궁은 폐하의 것인데, 이곳에 오고 말고는 제가 정한답니다. 제가 싫으시면 1후궁께서 떠나도록 하세요. 저희는 다 같은 후궁, 들어온 순서에 따라 권력이 달라진다면 제가 기꺼이 따르도록 하겠지만, 이 황궁 안에서 그런 명령을 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한 분 폐하뿐이랍니다. 그러니 저에게 그따위 명령은 하지 마세요. 같잖으니까.”

화를 내지도 않고 조곤조곤 받아치는 신려의 말에 모든 후궁이 얼어붙었다.

지금까지 얌전히 있던 그녀가 이렇게까지 하는 모습에 모두가 정말로 신려와 연이 정을 통했다고 생각하던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1후궁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며 황제에게로 향했다.

한 번도 이곳에 발걸음 한 적이 없었던 황제이기에 놀랍기도 하지만, 그 걸음의 진위를 가려 보려 무던히도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황제는 그대로 1후궁을 지나쳤다.

그리고 황제가 걸음을 멈춘 곳은 9후궁 신려의 앞이었다.

“연과 마지막으로 함께한 이가 그대라고 들었는데, 소상히 보고해라.”

보고였다. 그것은 주군이 신하에게 내릴 수 있는 명이었다.

“존명.”

신려 또한 후궁이 아닌 주군에게 신하로서 갖출 수 있는 예를 표했다.

그녀의 무릎 한쪽은 바닥에 있고, 그녀의 오른쪽 손은 가슴께에 올려져 있었다.

완벽한 신하의 자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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