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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안배-49화 (49/60)

49화

황제는 무감각한 눈으로 신려를 내려다보았다.

황제의 숨겨진 패 하나를 버리면서도 전혀 아까운 얼굴이 아니었다.

“무엇을 하였나?”

“공자님께서는 그날 폐하께서 어디로 향했는지 물으셨습니다.”

황제의 눈썹이 살짝 찌그러졌다.

공자님? 하지만 당장 문제 삼을 것은 그것이 아니었으므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말했나?”

신려는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제가 말씀드리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릴 의도는 있었습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뭐? 왜 그랬느냐?”

황제가 비웃음이 깃든 질문을 던졌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지만, 누구도 황제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으므로 이러한 사실은 알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신려는 변명을 하지 않았다.

“내가 두 번 묻는 것을 좋아했던가?”

황제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한 목소리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는 배려는 지금까지라는 압박이 담겨 있었다.

“친우이기 때문입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 내뱉은 한마디였다.

친우라…… 친우라……. 황제는 한참이나 말을 되뇌었다.

제 손아귀에 있는 줄 알았던 자신의 사랑스러운 반려는 이곳저곳에 자신의 편을 만들어 놓았다.

당장 그와 관련된 이들을 다 없애고 싶은 마음과 그에게 소중한 이들이니 인질로 남겨 놓아야 한다는 마음이 충돌하고 있었다.

“찾아라. 안 그러면 내가 무엇을 할지 나도 모르겠으니, 주군으로서 명령이다. 가장 잘하는 일이니 시일이 얼마 안 걸리겠지. 아직 쓸모가 다하지 않기를 바란다.”

황제는 진심으로 그것을 바란다는 듯 낮게 속삭였다.

“존명.”

신려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 물러났다.

그리고 황제는 남아 있는 그 누구에게도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냉정히 뒤돌아섰다.

그곳에는 필요에 의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폐하.”

1후궁이 뒤늦게 황제를 불렀다.

황제가 잠시 걸음을 멈춘 채 1후궁을 돌아봤다.

하지만 그뿐이라는 듯 황제는 다시 가던 길을 그대로 가 버렸다.

황제가 간 길을 뚫어지게 보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텅 빈 황제의 눈동자에 자신 따위는 담기지 않았다는 것을, 아니 담길 자리가 없었다는 것을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

“폐하, 귀족들이 다 모였습니다.”

정기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오늘도 침실에서 연의 침의를 안은 채 텅 빈 눈동자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제는 페로몬이 다 사라져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에도 황제는 계속해서 향기를 쫓았다.

“폐하…….”

시종장이 또다시 황제를 불렀다.

“그래, 가야지. 나의 반려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누구도 감히 뭐라고 하지 못하게 길을 예쁘게 닦아야 하니까.”

황제는 침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연, 다녀오마. 금방 올 거니까 또 도망가면 안 된다.”

애달픈 눈을 한 채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종장은 그런 황제를 감히 걱정도 못 한 채 그저 뒤를 따를 뿐이었다.

미친 폭군의 밑에서 감히 황제의 말에 토를 다는 이가 아직 존재할 리 없겠지만, 그런 생각을 입에 담지도 못했다.

황제가 회의실에 도착하자 모든 귀족이 벌떡 일어났다.

그들의 눈에는 그저 두려움만이 존재했다.

“오늘은 쓸 만한 것들을 입에 올리길 바라지.”

무감각한 눈으로 회의장을 쓱 둘러본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러자 귀족들은 또다시 사색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공작이 남부에 내려가 있는 지금은 황제에게 충언을 올릴 이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폐하, 군자금으…….”

“다 아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새로운 것이 있나?”

그러자 겨우 입을 열었던 귀족의 입이 겁먹은 조개인 양 꾹 다물렸다.

“내가 찾는 이가 있다. 알고 있나?”

모두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 알고 있겠지. 나는 그가 나와 같은 곳에 있기를 바란다. 수많은 후궁 중 한 명이 아니라.”

황제가 반대하는 이는 정말로 칼로 벨 것 같은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황제가 늘 곁에 두는 칼도 함께였다.

“잘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오늘 회의는 이만하지.”

황제는 볼일이 끝난 양 그대로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그저 그곳에 있는 귀족들만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남자 황후라니…….”

누군가 한탄스레 내뱉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차라리 잘된 일이지요. 후사는 생산 못 한다는 말이니까.”

“조용히들 하시지요. 황궁입니다. 황궁 안과 밖의 모든 것에 폐하의 눈과 귀가 있습니다. 불충을 저지르는 발언들은 그만하시지요. 폐하가 인정한 이를 우리가 감히 입에 올리는 것은 불충이고 불경입니다.”

데일리 후작이었다.

공작가 다음으로 화력이 강하다는 가문, 그의 발언에 모두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렇게 정기 회의가 끝났다.

안건은 황후의 옹립, 대대로 내려온 것처럼 후궁들 속에서 가장 뛰어난 이를 간택하는 것이 아닌, 오직 황제의 말 한마디뿐이었지만, 안건은 무사히 통과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사건임에도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었다고 역사서에는 기록될 것이었다.

“우리는 무탈하게 황후 폐하께서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준비합시다. 그것이 폐하를 보좌하는 우리들의 일일 테지요.”

후작은 그 말과 함께 웃으며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누군가는 속으로 당신은 딸이 없으니까 그런 말이 가능하겠지요, 라고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후작은 누구보다도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인물이었다.

그도 황제가 공작에게 했듯이 아들을 내놓으라고 했다면 망설이지 않고 내놓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이미 황제를 보좌하고 있었다.

황제의 그림자 기사단 단장이 바로 그의 아들이었으니, 그의 아들 또한 황제를 충심으로 모시고 있었다.

그림자 기사단에 대해 모르는 놈들이나 후작을 음흉한 노인네로 알고 있을 뿐, 그의 가문의 실체를 아는 이들은 감히 그의 앞에서 황제에 대한 불경을 저지르는 발언을 감히 하지 못했다.

“정보 길드의 길드장께서 오셨습니다.”

초점이 없던 황제의 눈에 잠깐이나마 생기가 돌았다.

자신이 기다리는 소식을 가지고 왔기를 바라며…….

“들라 해라.”

황제의 대답에 시종장의 뒤에서 여인이 나타났다. 다름 아닌 신려였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은?”

“송구합니다. 수도에는 계시지 않은 것으로 파악이 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황제는 피식 웃었다.

“전국적으로 금발 머리를 가진 이들과 녹색 눈을 가진 이들은 내가 먼저 잡아들이고 있지. 내가 그따위 소식이나 듣자고 그대의 정체를 까발리며 임무를 준 것이 아닐 텐데?”

황제가 느릿느릿하게 신려를 돌아보았다.

사실 신려는 황제에게 교황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을 말했으면 지금쯤 공자는 황제의 품에 있을지 모르나, 그의 눈에 슬픔이 서리는 것을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었다.

언젠가는 황제에게 잡혀 올지도 모르나 그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었다.

그랬기에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은 그곳, 신전 외 모든 곳에 사람을 풀었고 이렇게 허접한 정보나 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대는 참으로 의를 중시하지. 내가 그대를 데리고 온 것도, 그것이 가장 큰 위치를 차지했다. 그대와 내가 이제는 10년이려나? 그렇다는 것은 그 아이도 열 살이 되었다는 말일 테지. 어때 아이는 잘 있나?”

신려는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그 아이를 궁에 데려온 이후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황제였다.

그랬던 그가 지금 아이를 들먹인다는 것은 협박이었다.

저번에 말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말의 연장선일 터였다.

그러한 황제 앞에 신려는 그저 머리만 조아리고 있을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제발 황제의 입에서 아이에 대한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걱정 마, 아이는 처음 약속했던 대로 건드리지 않으마. 내가 그대를 정보 길드장 위치까지 올려놓을 때 약속한 것이었다. 그대가 나에게 충을 바치는 대가로 나는 그 아이의 목숨을 보장해 주기로……. 그대의 충은 아직 무사한 듯 보이는군. 내 반려에게 보이는 의리는 나에게 하는 것과도 같으니 그 점을 높이 사 주겠다. 하지만…….”

황제가 검을 검집에서 빼지 않은 채로 신려의 목에 올렸다.

“이 이상 한다면 나는 그대의 충을 의심하게 되겠지. 그렇다면 우리의 약속은 그대가 깬 것으로 나는 간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같잖게 찾지 못했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그대가 찾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찾지 않은 것일 테니 어떤가? 말할 마음이 들었나?”

황제는 신려의 생각을 다 들여다본다는 듯이 웃었다.

물론 입만 웃고 있었기에 마주하는 이로서는 온몸에 한기가 들 정도였다.

신려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자신이 입을 연다면 자신의 하나뿐인 친우의 앞날은 암흑일 거였다.

자신의 목숨만이 황제에게 달려 있었다면 기꺼이 침묵을 택했을 터인데 자신의 아이가 달려 있었다.

어찌할 수 없었다.

그저 처음에는 아이를 들킨 것에, 아이에게 해가 될까 가까이 갔던 것이었고, 다음에는 황제의 명으로 찾아갔던 것뿐이었는데, 어느새 하나뿐인 공작가의 아들이자, 하나뿐인 남자 후궁은 자신에게 소중한 친우가 되어 있었다.

당사자가 듣는다면 얼굴을 찌푸리며 질색할 테지만 아이에 대해 발설하지 않은 그때부터, 또 아이의 안부를 물어 준 그때부터 더없이 소중한 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아이보다 우선순위에 놓을 수 있는 것은 없었기에 신려는 입을 열었다.

“교황에서 성자가 나왔음을 공표했습니다.”

황제는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금발 머리 성자가 모두에게 신력을 부어 주어 아픈 이들이 모두 나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게 언제지?”

“오늘 하루 일어난 일입니다.”

황제는 스산하게 웃었다.

“만약 오늘을 넘겼다면 나는 그대의 충을 의심했을 것이다. 오늘을 넘기지 않았음에 감사해라. 여봐라.”

황제의 부름에 시종장이 문을 열었다.

“마차를 준비해라. 가장 편안하고 안전하고 화려한 걸로. 지금 당장 신전으로 가야겠다.”

황제는 확신하는 말로 자신의 궁을 나섰다.

황제가 명하자마자 마차는 준비되었을 터였다. 황궁에 없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까.

그렇게 황제는 야밤에 신전을 급습했다.

무혈입성으로 연이 누워 있는 방까지 찾아갈 수 있었다.

연의 페로몬이 이끄는 대로 발을 옮기니 그의 방이 나왔다.

그렇게 다시 반려와 마주한 황제는 굳건한 다짐을 했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고. 감히 도망갈 생각 따위는 할 수 없게 만들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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