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온몸이 아프다고 아우성치고 있는데 황제가 나에게 다가왔다.
“도망은 즐거웠나?”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 같은 모습에 나는 이번엔 아픔이 아닌 두려움으로 몸이 떨려 왔다.
황제를 만나기까지 그래도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미친놈임을 간과한 내 잘못으로 인한 완전한 판단 미스였다.
“흐으윽, 하아. 폐……하.”
입을 열려고 하니 신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황제가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연?”
“흐으으.”
대답을 해야 하는데 신음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왜 이곳에 있냐고, 이젠 나 같은 것은 당신에게 아무 의미 없는 것 같으니 죽일 거냐고 묻고 싶었는데,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왜 그러는 것이야? 아픈 건가?”
서릿발같이 차갑던 황제의 눈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연은 마음속 깊이 묻어 두었던 감정이 다시 올라옴을 느꼈다.
사실은…… 아직 나를 사랑하냐고, 내가 당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나하고 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처럼 나와의 사랑도 버린 것이냐고, 그런 것들을 묻고 싶었지만, 그저 나오는 것은 신음뿐이었다.
그때 헐레벌떡 교황이 달려 들어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교황은 숨도 채 추스르지 못한 채로 황제를 향하여 노성을 질렀다.
황제는 그런 교황의 앞에 당도했다.
그러한 황제를 성기사단장이 막아섰다.
황제는 주저하지 않고 검을 빼 들었다.
“연이 왜 저러는 것인지 말하여라. 그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목소리에 살기가 뚝뚝 묻어났다.
“칼을 내리십시오. 이곳은 신의 구역입니다.”
“내 제국이고 내 땅이다. 신도 내 구역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땅에 내가 오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다는 거지?”
“…….”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교황은 수염이 부들부들 떨려 올 정도로 이를 사리물었다.
그때 뒤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성자님.”
“연.”
황제는 손에 있던 검을 바닥으로 내렸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느냐? 도대체 연이 왜 이러는 것이냔 말이다.”
“소리를 죽이십시오. 태아를 품고 계십니다. 그리고……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력을 갑자기 쓰셔서 그런 것입니다. 내일 아침이면 일어나실 겁니다.”
황제는 순간 멍해졌다.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태기라니? 연이 아이를 가졌다는 말인가?”
황제의 고개가 갸웃했다.
나는 희미한 정신 속에서도 황제의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들려올까 겁이 났다.
그때 교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 안정을 취할 수 있게 우리는 이만 나가도록 하시지요.”
황제는 그때까지 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황제의 머뭇거림이 나에게 전해졌다.
사실 곁에 있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차라리 나에게 사랑을 속삭이지 않고, 나에게 전쟁을 그만두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면 내 마음이 이렇게 아프지 않을까, 그랬다면 내가 지금 이곳에서 이렇게 혼자 아이를 품고 아파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하는, 만일……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되뇌며 생각했다.
황제는 고집스럽게 버틸 거라는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교황과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적막이 감돌았고, 나는 그 적막감에 휩싸인 채 서서히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음상으로는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하지만 지친 몸은 조용한 것을 원한 것 같았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잘 잤다.
밤새 죽을 것 같았는데 막상 깨어나니 정신이 너무 개운했다.
이래서 성력과 관련된 아픔은 치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구나를 몸소 깨달았다.
또한 왠지 성력이 드나드는 길이 훨씬 넓어졌음을 감지했다.
훈련을 하는 것보다 이 방법이 신력을 많이 쓰는 데 더 효과적이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식으로 신력을 쓰게 된다면 그대의 몸이 먼저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하긴 육체는 정신과 이어져 있다.
어젯밤도 충분히 아팠는데 정말로 아픔이 반복된다면 정신이 먼저 붕괴될 것이고, 그렇다면 몸도 마음도 더는 버티지 못할 거니까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무식하게 몸이 아픈 방법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저 생각만 한 것입니다, 생각만. 설마 진짜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래, 생각만 하거라, 생각만……. 안 그럴까 봐 걱정한 것이니라. 그나저나 저기는 저대로 둘 참이냐?”
신이 가리킨 것은 문 쪽이었다.
안 봐도 무슨 상황인지 충분히 그려졌다.
왜인지 황제가 교황을 닦달할 것 같았다.
개운하던 머리가 다시 아파 오는 것만 같았다.
“해결해야 하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제가 폐하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지요. 이렇게 일찍 쳐들어올 줄 알았다면 제가 성자가 되는 방법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은 나를 돌아보았다.
정말 그리 원하느냐, 라고 묻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고는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아픈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괜찮은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보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생각보다도 좋은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살기 위해 ‘성자’라는 명칭이 필요했다면, 지금은 그저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런 나를 신은 다 안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하긴 신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닐 테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었다.
어찌 되었든 내가 저지른 일이니까 해결을 보는 것이 맞았다.
헤어지더라도 대화는 하고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게 끝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내 배 속에는 아이까지 있으니까 나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문을 열자 교황과 황제가 문밖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이 사람들은 밤을 새운 듯싶었다.
나와 눈을 마주친 황제는 화가 난 듯 보였다.
그래, 당연히 화가 날 것이다.
하지만 화는 내가 더 났다.
안 그랬으면 내가 도망까지 치지는 않았을 테니까.
“성자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교황은 신력 때문에 아픈 것은 자고 나면 괜찮다는 것을 알면서도 묻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아이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이한 케이스니까.
하지만 나는 정말로 몸이 개운했다. 전보다 더…….
“저는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신 덕분입니다. 교황 성하, 송구합니다만 자리를 비켜 주실 수 있겠습니까?”
교황은 그런 나와 황제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들어오십시오.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장 화를 낼 것 같았던 황제는 순순히 따라 들어왔다.
“몸은 정말로 괜찮은 것이 맞나?”
왜 도망갔냐고 따지든가, 아니면 칼을 빼 들고 죽여 버리겠다고 설칠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황제의 입에서 가장 처음으로 나온 말은 나를 걱정하는 말이었다.
순간 울컥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 그런 감정은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예. 교황 성하께 들으셨겠지만, 그저 성력을 갑자기 많이 사용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자고 일어나니 괜찮아졌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부러 딱딱하게 말했다.
그런데…….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데? 도망은 그대가 가 놓고 왜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하냔 말이다.”
황제가 나를 볼 때마다 짓는 애절한 표정이 나왔다.
조금 있으면 곧 울 것 같았다.
화를 내는 것 같았지만 왜인지 나에게 매달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싸늘하게 황제를 응시했다.
“폐하는 그러면 제가 왜 도망갔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래……. 나에게 질려서겠지. 그대는 나를 사랑한다고 해 놓고, 항상 나의 곁에 있겠다고 해 놓고 내가 궁을 비우자마자 도망갔으니까.”
황제는 내 탓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 제가 왜 질렸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대는 여인을…….”
“그만!!!”
나는 늘 황제가 말하는 내가 여인을 좋아하니까, 라는 말을 하기 전에 소리를 질렀다.
정말로 내가 여인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지금 이렇게 황제 따위를 좋아해서 거지 같은 기분을 안 느껴도 되니까. 아니, 여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있으면 좋겠다.
딱 한 사람 황제만을 좋아해서 느끼는 기분이 이렇게 비참하고 엿 같다면……. 그래서 다른 이를 좋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이 순간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이 빌어먹을 심장은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 현재 또한 황제를 향해 강렬하게 뛰고 있었다.
당신을 사랑하노라고, 그래서 지금 많이 아프다고, 그러니까 다시 한번 나에게 사랑을 속삭여 달라고 말이다.
“제가 그런 이유를 다시 입에 올리면 폐하 곁을 정말 떠날 거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하…… 하하하……. 그래, 그래서 지금 그대는 도망을 온 것이고, 내가 그대를 잡으러 왔지.”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제가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폐하께서 먼저 저와 한 약속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바보 같았고, 이 바보를 나는 정공법으로 들이받기로 했다.
그것이 지금의 내 결정이었다.
또다시 후회하는 한이 있더라도 부딪쳐 보고 싶었다.
아이의 아빠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적어도 아이에게 비겁한 아버지라고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나는 그대와 한 약속은 무엇이든 다 지켰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줄 수 있다고 했잖은가? 그런데 내가 무슨 약속을 어겼지?”
정말로 자신의 잘못을 황제는 모르고 있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래……. 나는 그대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그렇군요. 그러면 폐하는 저와 생각하는 것이 달랐나 봅니다. 아니면 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 아예 잊고 계셨거나.”
“아니, 그대에 한해서 내가 안 듣거나 잊거나 한 적은 절대 없다.”
“절대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면 전쟁! 제가 전쟁은 싫다고! 그러니까 폐하의 환청에 존재하는 이와 한 약속이 아닌 폐하의 의지가 아니면 전쟁을 그만둬 달라고 하셨을 때 폐하께서는 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건 약속이 아닌 것입니까?”
황제의 얼굴에 당황함이 깃들었다.
정말로 그런 이유라는 것을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 속에는 그 약속을 잊지 않았음이 여실히 드러났기에 나의 실망은 배가 되었다.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