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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안배-51화 (51/60)

51화

황제의 손이 눈을 가렸다. 그리고 한참을 심호흡했다.

“무서워서 싫다고 한 이유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나?”

황제에게서 침착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무작정 안 하겠다는 대답만 받아 내고 희희낙락했던 지난날의 내가 떠올랐다.

그러니 나는 진실한 이유를 말하지 않은 채 그저 그만둬 달라고 떼를 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화가 순식간에 푸시식 식었다.

사실 화를 낼 이유조차 나에게 있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 맞았다.

“우린 정말로 대화가 없었군요.”

나는 힘없이 말하곤 침대로 걸어가 앉았다.

하긴 우리의 대화는 늘 황제가 나에게 자신을 떠나지 말라 애걸하고, 나는 늘 그를 안심시키는 형태로 이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생산적인 대화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 버렸다.

“폐하께서 제 이야기를 진심으로 여기든 안 여기든 들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제가 화를 낸 이유를, 아니 제가 폐하에게서 도망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괜찮으십니까?”

황제는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그대로 걸어와 나의 옆에 와서 앉았다.

최소한 이야기를 들어 보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제대로 된 우리의 첫 번째 대화일 것이었다.

“폐하, 저는 사실 공작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

“웃기는 소리인 걸 압니다. 믿지 못할 테고요…….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이곳뿐만 아니라 수많은 세계가 있고, 신 또한 많이 존재함을 알고 계십니까?”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 나갔다.

고아원에 혼자 버려지고, 처음으로 생긴 가족의 불행이 나로 말미암은 것이고, 기어코 세상의 멸망의 중심에 내가 서 있었음을, 그런데 그 이유가 사실은 어둠이라는 것이 한 것임을, 그저 불행한 내가 그 장소에 있었던 것일뿐 침착하게 하나하나 이야기해 주었다.

황제는 그러한 나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 줄 뿐이었다.

“……그렇게 저는 폐하께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날 호수에 빠져 죽은 이는 공작님의 아들, 폐하의 30번째 후궁이 맞습니다. 저는 이 모든것들 그러니까 공작의 아들과 폐하의 후궁을 비릇해 저를 지칭하는 것들중 진짜 저는 없습니다. 그저 다른 세계의 영혼입니다. 그리고…… 폐하, 폐하께서 들으시는 환청, 그러니까 폐하의 이지를 빼앗는 이는 사실 환청이 아닙니다. 실체가 있으니 환청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테지요. 그러니까 제가 지금까지 말한 어둠의 실체가 폐하께서 들으셨던 소리와 동일한 것입니다.”

놀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황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해 보였다.

“알고 계셨습니까?”

황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청이 아니라는 것은 근래에 알게 되었다. 환청이라고 하기에는 그 의지가 내 의지가 아니었지. 환청은 어찌 되었든 나의 의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니까.”

나는 황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제가 이 몸의 주인이 아닌 것에는 놀라지 않으십니까?”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대와는 늘 이상했다. 뭐 환청의 실체가 따로 있고, 사라진 줄 알았던 알파, 오메가가 세상에 다시 나왔는데, 다른 세계의 영혼이 나왔다고 하여 내가 놀랄 일은 아니지. 그리고…… 나는 그대가 뭐라고 해도 괜찮다. 뭐 영혼이 다른 이라고 해도, 내가 사랑한 이는 그대가 분명하니까. 그러니까 괜찮다. 내가 계속 말하지 않았나. 그대가 내 옆에만 있으면 나는 뭐든지 괜찮을 거라고.”

늘 황제를 안심시키는 쪽은 내 쪽이었는데, 황제는 다른 방법으로 나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내가 누구든 나 자체로 상관없다는 이 말이 왜 이렇게 나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는지, 나는 황제가 하는 말이 그 누구보다 위로가 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어둠이 늘 하는 말은 파괴였습니까?”

“그래. 하지만 나는 곁에 있는 것이 중요했다. 뭐, 애정 결핍에 걸린 애새끼였으니까. 물론 지금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지. 하지만…… 지금은 떠난 이를 내 손으로 잡아 올 만큼은 자랐지.”

황제가 나를 향해 눈을 번뜩였다.

진짜 지금 도망간다면 지옥까지 쫓아올 기세였다.

“그, 그러시군요.”

“그래. 그러니까 그대는 내 손을 벗어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났으면 좋겠군. 나는 절대 그대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 그리고 내 아이를 품은 반려를 놓칠 일은 더더욱.”

황제는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실어 말했다.

그리고 나는 어쩌면 황제의 저런 집착적인 면에 더더욱 안심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어둠은 폐하를 이용해서 전쟁을 일으키고, 그렇게 인위적으로 죽은 영혼들을 어둠으로 만들어 힘을 키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더는 이 세계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멸망해 버린 수많은 세계의 하나가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더는 폐하와 제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 아이도요. 그러길 바라십니까?”

황제는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욕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감히 나를 속여?’라는 말이 들려왔으니 아마도 어둠에게 욕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황제가 피식하고 쓰러졌다.

“폐하!!”

나는 쓰러지는 황제를 황급하게 끌어안았다.

“도와주십시오. 제발…… 도와주십시오.”

나는 목청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정말로 황제는 영혼이 빠져나간 인형인 양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나마 미약한 숨소리로 그가 살아 있음을 잠깐 확인할 뿐이었다.

“성자님, 무슨 일……? 이런…… 괜찮을 겁니다. 성자님께서 하실 수 있으십니다.”

교황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내가 신력을 사용할 수 있음을 떠올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내가 신에게 사랑받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깜빡했다.

나는 서둘러 황제에게 신력을 사용했다. 그런데 신력이 조금 이상했다.

신력을 사용한 건 딱 한 번뿐이지만 느낌이 완전 다른 것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전에 그 많은 사람에게 사용할 때엔 신력이 그들에게 덧씌워지는 느낌이라면 지금은 황제가 모든 신력을 흡수하는 느낌이었다.

비어 있는 그릇에 끊임없이 물을 채우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깨진 그릇은 아니었는지 어느샌가 차오르는 느낌과 함께 황제의 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물론 나의 안색이 나빠지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크게 사용한 것이 아니고 천천히 사용한 것이기에 저번처럼 무언가 확 빠져나가지는 않았다.

“어둠과의 계약이 끊어진 것 같구나.”

신이 우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진짜입니까?”

너무 다행인 소식이었다.

“그래……. 그때를 노려 어둠을 처치하려고 했는데 아쉽게 되었구나. 신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니……. 어둠이 어디로 숨었는지 알 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신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 저희 폐하는 어떻게 찾으셨는데요?”

“그거야…… 황제이니까. 충분히 이목이 휩쓸리는 자리였잖느냐? 그러니까 내가 찾아가서 볼 수 있었단다. 어둠이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는 없을 수 있는 그런 것이거든. 해가 있으면 그림자가 지는 원리와 같은 거란다. 신이 있으니 어둠이 존재하는 것이지.”

아, 그렇구나. 그러면 악마와 같은 건가?

나의 생각을 읽었는지 신의 눈이 커다래졌다.

“왜, 왜 그러십니까?”

“악마라는 것을 어찌 알았느냐? 설마 그대에게 접근한 것이냐?”

엥? 신과 대립하는 구도면 당연히 악마니까 그렇게 생각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곳의 설화에는 악마가 등장하지 않았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삭제한 것처럼. 그러니까 그 모든 것에 신이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합당한 의심이 들었다.

“설마. 진짜 직접 지워 버리신 거 아니죠?”

신이 한숨을 쉬었다.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를 아직 답하지 않았다.”

“저희 지구의 소설에는 늘 등장하는 클리셰거든요. 신이 등장하면 악마가 꼭 등장한다고 들었습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 중에 웹 소설에 미친 이가 있었거든요. 물론 저는 취미 같은 것을 키울 시간이 없어서 읽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랬었구나……. 그래서 모든 관리자들이 지구를 넘봤나 보구나. 지구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소설들로 구성된 세계를 만드는 관리자들도 꽤 많거든. 관리하는 세계 안에 재능이 넘치는 이가 많은 것도 인간들 말로 하자면 복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신의 눈동자에 그리움이 깃들었다.

나 혼자 지구를 위해 애도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도 지구가 사라진 것에 아픔을 느끼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지구인들이 그렇게 신을 좋아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신의 사랑을 듬뿍 받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것이 도움이 됩니까?”

“그래. 관리자 자체가 하나의 직업이나 같은 것이란다. 지구의 인간들을 보니 취업을 하면 인턴에서 정직원, 대리, 과장, 부장, 이사, 사장 이런 식으로 승진을 하더구나.”

“예, 그렇긴 합니다.”

“관리자 체계도 그것과 마찬가지로 굴러간단다. 그렇게 맨 위에는 관리자를 관리하는 관리자가 있는 것이지. 그리고 그들의 능력은 얼마나 많은 세계를 관리하는가 하는 것도 있지만, 어떻게 관리를 하는가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단다. 어둠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지. 하지만 밸런스를 맞춰서 약하게 만드는 것은 가능하단다. 그러한 세계는 소통이 잘되고, 그렇게 소통이 잘 이루어지는 세계는 오히려 신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신력을 받고 있단다.”

나는 너무나 현실적인 신들의 원리에 깜짝 놀랐다.

그러한 나를 신은 웃으면서 지켜봤다.

정말 신들이 사는 것도 별거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결론은 알찬 회사를 가지고 있으면 돈을 많이 버는 것과 같다는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의 말에 경청했다.

“그래서 체계가 잘 잡히고, 그런 체계를 이끌어 나가려면 재능이 많은 이들이 살고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와 같은 맥락이란다. 이해가 되었느냐?”

“예. 그런데 악마가 있으면 지옥도 있습니까?”

“무슨 소리냐?”

“아니, 보통 천국과 지옥의 개념으로 신이 천국에 살면 악마는 보통 지옥에 살더라고요. 그러면 악마가 사는 지옥이 있는 것 아닙니까?”

나는 그저 내가 귀동냥으로 들은 사실을 말했다.

하지만 신은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침묵을 고수할 뿐이었다.

그러다 그가 내뱉은 한마디는…….

“도대체 지구의 인간들이 만드는 악마는 어떤 것이냐? 천국과 지옥이라니, 참으로 인간이란 상상력이 풍부하구나.”

아니 악마가 나왔는데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그럼 여기 악마는 도대체 어떤 악마인데? 뿔 달리고 냄새나고 무서운 지옥에 사는 거 아니었어?

황당하기는 나 또한 신 못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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