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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안배-52화 (52/60)

52화

자기도 인간이었으면서 왠지 신은 인간을 비웃고 있었다.

아무리 아주 먼 옛날의 일이라고 해도 근본은 달라지는 것이 아닌데, 저렇게 비웃는 얼굴을 보자니 마음이 삐딱해지는 걸 겨우 붙잡았다.

그리고…… 악마는 그럼 도대체 뭐란 말이냐고…….

“그저 어둠을 칭하는 말이다. 어둠에 물들면 악마라고 하지. 보통 어둠은 인간의 간악한 부분을 파고들고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계약을 하게 된단다. 그래서 그들을 악마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대가는…… 목숨이겠지. 악마에게 사로잡힌 이들은 보통 오래 살지 못하거든.”

“그럼 설마 폐하도…….”

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 경우는 특별히 다르다. 그리고 허접한 악마들과 황제에게 들러붙은 것은 완전 다르지. 왜냐하면 그는 태초의 어둠이니까.”

“태초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센 어둠이 굳이 지금처럼 숨어 살 필요가 있습니까?”

나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아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사실 태초의 어둠, 그를 칭하는 이름은 무수하단다. 세계마다 그들을 칭하는 이름들이 달랐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들을 칭하는 이름은 하나였다. 악마의 왕 바알, 그들은 없어지지 않는 존재였단다. 다만 힘을 약하게 할 수 있었지. 그렇게 힘을 잃은 그들은 다시 어둠을 축적해 강해지고 그러면 우리는 또다시 힘을 빼앗고, 이런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는 힘을 빼앗기고 지금은 비축하는 중이란다.”

신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나의 착각일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 그리움이 묻어난다고 느끼는 것도 내 착각일 것이다.

신이 악마에 대해 말하는데 그리움이 묻어난다니 이 얼마나 웃긴 일이란 말인가…….

나는 왠지 쓸쓸해진 것 같은 신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면 폐하는 괜찮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황제에게 붙어서 힘을 축적해야 했으니까 힘을 교묘하게 사용한 것 같구나, 죽지 않을 만큼. 그리고 사실 그대가 없었다면 계약이 파괴되었을 때 아마도 황제는 죽었을 것이다. 다행히 이곳은 신전이었고, 바알이 급히 도망가다 보니 황제는 살아난 것 같구나.”

“그런데 왜 신력이 잡아먹히는 것 같았을까요?”

“그거야 지금껏 악마와 공존했으니 영혼의 그릇만 남고 안의 것은 다 먹혀 버렸으니까. 영혼의 그릇을 채우고 있는 것은 무수하단다. 인간이 악마와 계약을 하면 죽는 이유가 그릇이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지. 황제는 다행히 그릇이 깨지지 않아서 살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신력을 허겁지겁 들이켜는 것이란다. 몸의 아픔은 신력이 감싸고, 영혼의 아픔은 신력을 빨아들이는 것이지. 이해가 되었느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기억은 문제없습니까?”

솔직히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막장 드라마의 가장 흔한 클리셰가 기억상실이었으니까. 아이도 있는 놈이 인제 와서 수많은 후궁들의 치마폭에 싸이는 꼴은 내가 두고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왜 기억에 문제가 생기느냐?”

“그거야 무릇 기억이란 영혼에 새기는 것 아닙니까?”

“아니, 틀렸다. 기억은 몸에도 영혼에도 새겨지는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그 몸의 기억도 가지고 있는 것이란다.”

그렇다면 어찌 되었든 황제가 기억상실 같은 것에 걸리는 허황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이제부터는 어찌해야 합니까?”

신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에게서 받은 것이 많은데 나는 하나도 돌려주지 못했다.

그랬기에 이번에는 신이 하라는 것을 군말 없이 따르리라 결심했다.

“일단 바알의 행방부터 알아야지. 가장 최악은 그가 인간과 닥치는 대로 계약을 해 수많은 인간을 해치는 것이다.”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한마디로 눈앞의 사람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죽어 버리는 거였으니까. 그 말인즉 온 나라 안에 시체가 굴러다닌다는 소리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지가 있는 어른이라면 그런 계약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란다. 하지만 아이들이라면 하겠지. 그런데 아이들은 생각보다 어둠이 많지 않단다. 그러니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지. 그러니까 바알도 그런 방법은 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구나, 뭐 최악은 아니길 빌 수밖에 없었다.

아직 바알이 구석에 몰린 것은 아니니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뭐 쥐도 급하면 고양이를 문다는데 바알이 최악의 상황에 몰리면 당연히 할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 찝찝함은 뭐지? 아까부터 신이 바알을 꽤 신뢰하고 있었다.

악마인데 당연히 최악의 선택을 할 수 있으니 그것부터 막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신은 바알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설마…… 아는 사이인가? 싸우다 정든 뭐 그런 케이스라든가……. 에이…….

그때 신과 눈이 마주쳤다.

새의 눈동자가 번뜩이는 것 같았다.

그래……. 누가 봐도 감히 신에게 무례한 생각이었다.

악마와 신의 로맨스라니, 내가 신이었다 해도 기분이 나쁠 것이다.

서로 공생하지 못하는 사이, 아니 공생은 하나? 그러면 서로 잡아먹지 못해 으르렁대는 사이끼리 그러한 핑크빛 기류가 말이 되지도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신의 눈을 피했다.

머리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일단은 황제가 일어나는 것을 보자꾸나. 그다음 일은 그때 가서 의논하고……. 기도 시간이니까 나는 거기에 있으마. 아무 걱정 말고 그대는 황제나 잘 돌보고 있으렴.”

“예, 알겠습니다.”

신이 사라지고 방 안에 황제와 나만 남았다.

어제는 정신이 없었고, 좀 전에는 황제를 세세하게 바라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황제의 얼굴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물론 방금 전에 엄청난 일을 겪었으니 수척해질 수도 있는데, 왠지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다.

늘 나보다 커다랗고 늘 사납기만 한 줄 알았던 그가 이렇게 맥없이 누워만 있으니 나보다 더 작아 보였다.

황제도 나와 같은 작디작은 존재인 인간임을 나는 알아 버렸다.

“으음…….”

황제가 어디 안 좋은지 몸을 뒤척였다.

눈썹을 한가운데 모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다시 신력을 황제에게 흘려 보냈다.

그랬더니 다시 편안한 얼굴을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왜 신력을 사용하는 것과 페로몬 운용하는 것이 같은 것 같지?”

나는 페로몬을 살짝 흘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력이 함께 나왔다.

“뭐야? 말도 안 돼…….”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신력과 페로몬은 함께 흘러나왔다.

내가 나의 페로몬을 맡지 못해 정말로 신력과 페로몬이 함께 흘러나오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내 몸에서 흘러 나가는, 자연스럽게 숨 쉬는 것과 같은 페로몬을 내가 모를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자기가 숨 쉬는 것을 모르는 바보는 없듯이 페로몬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설마. 뭐 신력이 페로몬과 같은 것인가?”

그러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찾아들어 피식 웃었다.

왜냐하면 전에 페로몬을 사용할 때 신력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지금 이 현상은 뭔데……? 아무리 머리를 싸쥐고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뭐. 이따 솔 님이 오면 물어보면 되겠지. 일단은 폐하부터 어떻게 해야겠네.”

나는 그렇게 황제에게 신력을 흘려 보냈다.

황제가 신력을 잡아먹지 않을 만큼 말이다.

그러다가 황제의 옆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신력을 많이 사용한 탓도 있었고, 아침부터 너무 많은 일을 겪은 것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깨어났을 때 황제가 없었다.

“폐하?”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빈혈이 잠깐 올라와 휘청거렸다.

“조심조심. 홑몸도 아닌데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어떡하려고 그러나.”

황제였다.

“폐하?”

“그래…… 괜찮나?”

내가 할 말을 하는 황제를 나는 멍한 얼굴로 바라봤다.

안색이 괜찮은 것을 보니 이제는 위험하지 않은 것 같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는 어디 불편한 곳이 없습니까?”

황제는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부끄럼을 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황제는…….

“그대가 잠든 사이에 이야기를 들었다.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죽었을 텐데 그러지 않아서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대가 왜 나에게서 도망을 갔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입니까?”

“그래……. 하지만 그대도 나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알려 주지, 아니다 내가 그대와의 약속을 가볍게 여긴 탓이지. 미안하다. 그러니까 한 번만 봐줄 수 있겠나? 절대 앞으로는 그대와의 약속을 가볍게 여기지 않겠다. 그러니 나와 함께 궁에 돌아가 줄 수 있겠나?”

황제는 긴장했는지 온몸이 뻣뻣해 보였다.

그리고 내 눈치를 보느라 동공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직 신과의 대화가 끝나지 않았다.

그랬기에 당장 답을 줄 수 없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내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황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 버리니 무섭기까지 했다.

“폐, 폐하?”

나는 곧 쓰러질 것 같은 황제를 부축한 채 침대로 향했다.

침대는 내가 엎드려 있던 자리에 이불이 떨어져 있었다.

내가 혹시라도 깰까 봐 안아 옮기지는 않고 이불만 덮어 준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사색이 된 황제와 침대를 번갈아 보았다.

“나와 황궁에 가지 않을 것인가?”

황제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음, 그건 아닙니다.”

황제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시들던 잎이 물을 머금고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같이 가 줄 건가?”

방금 전까지 죽어 가던 황제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순식간에 황제가 다시 시무룩해졌다.

“당장은 아닙니다.”

“왜? 내가 그대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그건 아닙니다.”

황제가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잠깐 골려 줄까, 라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황제의 마음이 아프면 내 마음 또한 아팠기에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왜 안 가겠다는 것이지?”

“제가 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폐하와 저와 그리고…….”

나는 배를 소중히 끌어안았다.

“제 배 속의 아이까지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아이가 빛도 보지 못한 채 멸망한 세계와 함께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황제는 배 위에 놓인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 포갰다.

“함께 해야지, 그런 건. 내가 아빠인데 그대만 힘들면 안 되지 않겠나? 안 그래도 지금껏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아빠라 점수를 잃었을 터인데, 안 그렇나?”

황제가 싱긋 웃었다.

그 어떤 날보다 특히 오늘 더욱더 멋있는 황제였다.

“좋습니다. 폐하.”

나는 기꺼이 황제의 질문에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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