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어둠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수도이다. 특히 황궁 쪽.”
음…… 뭐 반경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수도는 인류의 밀집도가 매우 높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황궁 쪽이라는 것인데, 그 근방을 조사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터였다.
“뭐 전국이 아닌 게 어딥니까? 그러면 저희는 황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군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황제의 얼굴이 확 피었고, 교황과 성기사단장의 얼굴이 구겨졌다.
“어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교황이 물었고,
“그렇게 해 주십시오.”
성기사단장이 부탁했다.
나는 당연히 알려 줄 생각이었다.
“세상의 멸망을 가져올 어둠이 일단은 황제 폐하에게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누구에게로 옮겨 갔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뭐 다행히 행동반경은 알아내셨습니다. 황궁 쪽이라고 하셨는데 황궁 안인지 황궁 밖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황궁에 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제야 교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뜻이겠군요. 저희 신전에서도 힘닿는 데까지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도와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감사하게 도움받겠습니다. 아무래도 신력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탁에도 나왔듯 성자님의 뜻이 신의 뜻이고, 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 저희가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나와 황제는 황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뭐 돌아오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황궁을 비운 황제가 돌아가는 길이었고, 전쟁 또한 승전이 아닌 양측 협정을 맺고 돌아가는 공작 또한 함께였기에 수도의 분위기는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황제의 행렬은 길었고, 환궁하는 길 또한 번잡스러웠다.
“폐하와 마마의 무사 귀환을 경하드립니다.”
황궁에는 귀족들까지 합세해 우리를 반겨 주었다.
뭐 귀족들이 진심으로 환영하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런 환대를 받은 적이 없었기에 조금은 민망했다.
특히 이렇게 황제와 손을 꼭 잡고 입장하는 지금은 죽어 사라지고 싶었다.
“이만 놓아주십시오.”
나는 황제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손에 힘을 주며 황제에게 말했다.
이곳으로 오면서 몇십 번은 말한 것 같았다.
물론 이번에도 황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맞잡은 손에 더욱더 힘을 줄 뿐이었다.
“놓아 달라니까요.”
이번에는 나도 굴하지 않고 말했다.
너무 오랜 시간 잡고 있어서 매우 매우 불편했고 손에 땀도 차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만 더 이렇게 가다가는 어깨에 담이 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황제는 이번에도 내 말을 씹을 심산인 모양이었다.
그냥 앞만 보고 걸었으니까.
“손 안 놔주시면 각방 쓸 겁니다.”
별수 없이 나는 황제에게 가장 협박이 될 수 있는 카드를 날렸다.
다행히 황제의 걸음이 멈췄다.
하지만 손은 놓지 않은 상태였다.
“왜 계속 손을 놓으려고 그러나?”
“그거야 불편하니까요.”
뭘 저렇게 당연한 걸 묻나 싶었다.
“나는 너무나 좋아서 아주 작은 불편함은 감수할 수 있다.”
아니, 님이 아니라 내가 불편한데?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고 있는데 황제의 입이 나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무, 무슨 짓입니까?”
황궁 안이긴 했지만 온 귀족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막은 채 말까지 더듬었다.
“그대가 입 벌린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미친……. 차라리 묻지 말 걸 그랬다.
“손을 놓으라고 하니까 아까부터 왜 계속 멍멍이 소리를 하십니까?”
생각 같아서는 개소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많은 사람 앞에서, 물론 거리가 있어서 듣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듣는 이가 있다면 황제 모독죄로 잡혀갈지도 몰랐다.
“죽을 만큼 힘든 것이 아니면 손을 잡아 주면 안 되겠나? 그대가 옆에 있는 것을 계속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다.”
최대한 안쓰러운 표정으로 애원하는 황제를 나는 안 마주치려고 고개를 돌렸다.
예쁘고 청순하고 사랑스러운 그가 저렇게 세상 안쓰러운 눈빛을 한다면 나는 들어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단호함이었다.
“뭐 땀 정도는 저도 아까부터 참고 있었습니다.”
“아니다. 그대는 그때부터 놓아 달라고 했다.”
“하지만 안 놓아주셨습니다.”
순 억지를 부렸다.
신전에서부터 이곳까지 한 번도 손을 놓은 적이 없으면서…… 나는 그때부터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었다고!!!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손을 놓으려고 그러나?”
불편하다고 말하는데 통 들어 먹질 않았다.
뭐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황제를 잘 조련해 오던 존재……. 한숨을 쉬면서 불편한 점을 말했다.
“팔이 아픕니다. 손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이러다가 담이 와서 아예 팔을 사용 못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황제가 화들짝 놀라 내 손을 놓았다.
이렇게 효과가 직방인 걸 진작 아픈 시늉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렇게 가면 되겠군. 몸도 불편한데 내가 그대를 배려하지 못했다.”
나를 번쩍 안아 든 황제였다.
조금만 민망하면 될 일을 더 크게 벌인 셈이다.
“폐하……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내가 내 반려를 챙기겠다고 하는데, 뭐가 심하다는 것인가?”
“폐하의 반려는 저뿐만이 아닐 텐데요?”
나는 후궁들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당연히 황제는 한숨을 쉬었다.
“그대가 그녀들을 궁에서 내보내지 말라고 해서 그냥 두고 있던 것이었는데, 이만 내보내도록 할까?”
어이가 없었다.
뭐 내가 내보내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데려온 것은 자기이면서 몹시나 뻔뻔했다.
“이렇게 하는 건 둘만 있을 때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밖에서는 그림이 안 좋으니까요. 제가 황후라는 말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건 소문 아니고 팩트다. 이미 그대는 황후 내정자이고, 대관식만 치르면 그대는 황후가 될 것이다.”
뭐? 나는 따져 묻고 싶었지만, 황제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바람에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황제는 그들에게 쐐기를 박듯 말했다.
“황후가 먼 여행으로 인해 몸이 좋지 못하니 인사는 생략하도록 하겠소. 모쪼록 조심히들 돌아가길 바라지.”
나는 입을 헤벌린 채 황제와 귀족들을 번갈아 보았다.
더더욱 놀라운 점은 그 누구도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나? 원래 황후 간택은 후궁들 중에서 가장 자리에 걸맞은 이를 간택하는 거 아닌가? 옛날에는 처음으로 황자를 낳은 후궁도 황후에 들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귀족들이 반대해서. 그런데…… 이렇게 반대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나만 바라봐. 늙은이들 뭐 볼 게 있다고 그렇게까지 쳐다보는 것이냐. 질투 난다.”
나는 너무나 부끄럽고 당황스러워 귀족들의 반응을 살폈다.
내가 황후가 되면 그래도 마주칠 일이 많은 이들이었기에 벌써부터 미운털이 박히면 안 되었다.
하지만 귀족들 모두 황제가 한 말을 듣지 못한 듯한 태도로 가만히 있었다.
도대체 저 폭군이 어떻게 협박했길래 이렇게 모든 귀족들이 입을 다물 수 있는지 의문을 품은 채 나는 황제에게 안겨 황제궁으로 옮겨졌다.
물론 후궁들의 따가운 눈총은 덤이었다.
“주제를 모르는 것들을 저대로 둘 것인가?”
황제도 후궁들의 눈빛을 보았는지 나에게 물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질투입니다. 뭐, 폐하께서도 제가 다른 이에게 눈을 돌리면.”
“그대가 쳐다본 이를 이 세상에서 치워 버리겠다.”
정말로 황제의 저런 사이코 같은 기질은 어둠이 아닌 황제 본인의 성격임을 다시 알 수 있었다.
나는 한숨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황제에게 물었다.
“저에게 소중한 사람이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황제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저 그녀들은 질투를 하는 것뿐입니다. 뭐 제가 폐하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제가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고요. 그리고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질투뿐이라 오히려 안쓰럽습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나 고작 남자의 사랑이나 바라며 산다는 삶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물론 황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지구에 있었던 커리어 우먼들의 삶이었으니까.
최소한 자신의 삶은 자신이 선택해야 하건만 이 황궁 안에서 자신의 삶을 선택한 이는 없어 보였다. 그 대단한 황제마저도…….
“알았다. 그대는 참 마음이 여리다니까. 그대가 원하는 것인데 당연히 들어주어야지. 하지만 기어오르려고 하면 그땐 내가 처리해도 되겠나?”
“정말 그러면 제가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때까진 폐하는 가만히 계셔 주십시오.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황제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마차를 타고 오는 것이 힘들었을 것인데 어디 불편하진 않나?”
황제가 배 쪽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뭐 자신의 아이인데 저렇게까지 눈치를 보나 싶어서 나는 황제의 손을 배에 가져다 댔다.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지만…… 제가 문제없으니 아이도 문제없을 것입니다.”
“아이를 걱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그대를 먼저 걱정했다. 그리고 아이가 무사한 것쯤은 나도 안다. 그대에게서 다른 이의 페로몬이 풍기고 있으니까.”
“예? 그런 것도 아십니까?”
“그래. 처음에 그대에게서 다른 이의 냄새가 날 때 미치는 줄 알았지만, 다행히 교황이 말해 주더군. 그대에게 아이가 생긴 것이라고, 그것도 내 아이가…….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전혀 싫지가 않더군. 이게 핏줄의 힘인가 싶고. 그러니 아이가 괜찮은 것은 알 수 있는데, 그대는 알 수가 없으니까. 피곤한 것은 없는 것인지 물은 거다.”
“예. 폐하 덕분에 편안하게 왔고, 조금 피곤한 것만 빼면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제가 황후가 되려면 대관식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 것 같은데 언제쯤 할 계획이십니까?”
사실 어둠도 밝혀내야 하고, 그러자면 바쁠 것 같았고, 조금 있으면 배가 나올 것인데 남자라 슈트를 입으면 더더욱 우스울 것 같아서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그대가 원할 때 하려고 한다. 나야 뭐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만, 그대가 싫다는 것은 하고 싶지 않으니.”
“아니 그런 것치고는 저에게 의사를 물어보지 않으셨습니다.”
“그거야…… 그대가 전에 승낙했었으니까 이번에도 당연히 할 줄 알았지. 그리고 그대가 걱정한 아이도 이렇게 있고 말이다. 그러니까 나와 결혼해 주겠나?”
청혼을 이렇게 심심하게 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심심한 청혼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지조 없는 남자도 나뿐일 것이다.
“좋습니다, 폐하. 하지만 반지 정도는 준비하고 해 주십시오.”
나는 우는지 웃는지 모를 얼굴로 황제에게 핀잔을 주었다.
황제는 그제야 아차 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황제를 보며 실컷 웃었다.
그래, 청혼할 때 반지가 좀 없으면 어때. 제국에서 가장 위에 있는 남자인데…….
액세서리가 내 방에 차고 넘치는 것이 이럴 때는 참으로 위안이 되었다.
뭐 사용하는 것들이 없기는 하지만, 무소유보다는 유소유가 심리적 안정이 더 큰 법이니까.
나는 애써 내 속물적인 이유를 합리화하며 황제의 품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