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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안배-55화 (55/60)

54화

“베스, 오랜만이야.”

나는 해맑게 베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왠지 베스는 전보다는 수척해진 얼굴로 나에게 인사를 해 왔다.

“마마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걱정했나?”

“예.”

무뚝뚝하게 대답하지만 누구보다 걱정했음을 함께 지내 온 시간이 있는 나는 알 수 있었다.

“쌍둥이 형은 잘 있고?”

“예. 마마의 은혜 덕분에 원래의 자리로 복귀했습니다.”

정말 다행이었다.

황제가 내가 아는 그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웠고, 그러한 정신력을 붙잡고 있느라 고생했음이 눈에 보여 감사했다.

응당 해야 할 일에 이렇게 감동씩이나 받는 내가 너무 하찮아서 울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스의 얼굴을 보니 너무너무 좋았다.

“그런데 나 내 궁에 안 가도 돼? 뭐 전에야 후궁의 신분이었으니 폐하와 함께 지내도 애첩 정도로 봐줬지만 나 황후라며. 그런데 이곳에서 폐하와 함께 지내도 되는 거야?”

황제는 그간 밀린 서류를 처리하느라 일에 파묻혀 살았다.

그리고 전과 다르게 나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침실에 곱게 앉혀 놓았을 뿐이었다.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을 뿐 나는 지금 황후 신분이었다.

황제가 다짜고짜 나를 황후라고 칭했기 때문이었고, 황제의 말이 곧 법인 황궁에서는 나를 황후로 인정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로 귀족 회의에서 말들이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특히 공작 각하께서 아직까지 황후마마를 뵙지 못하게 하시는 데 대하여 따로 궁을 마련해 주지 않으니 그러한 일이 있는 거라면서 폐하께 주청을 드렸고…… 폐하께서는 바로 기각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마마와 합궁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라 지시하셨습니다.”

합궁? 뭐 우리는 원래 합궁한 거 아닌가?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베스가 곧이어 말했다.

“합궁은 폐하와 후궁 마마들이 날을 받아 하는 합궁이 아닌, 황제궁과 황후궁을 따로 두지 않고 두 분이 계속 함께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뭐? 그런 게 가능해? 생각도 못 했던 발상을 하는 황제에 대하여 또다시 감탄했다.

“내가 뭐 따로 해야 하는 건 없고?”

“예. 폐하께서 알아서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베스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가장 처음으로 달려와 웃고 가야 하는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9후궁은 어디 가셨나? 왜 못 본 거 같지?”

말하고 나니 정말이었다.

후궁들이 서 있을 때도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9후궁마마는 지금 근신 중이십니다.”

근신? 나는 못 들을 말을 들은 것 같아 다시 물었다.

“근신이라고? 왜? 내가 없는 동안 그 여인이 무엇을 잘못했나?”

“폐하께서 함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랬겠지. 내가 이 궁에서 유일하게 교류하는 후궁이니까. 그러니 자신이 그녀에게 벌을 주었다는 것을 내가 알면 안 되었기 때문이겠지.

나는 베스를 빤히 바라봤다.

“베스.”

“예, 마마.”

“그대는 누구의 사람이지?”

일부러 목소리도 쫙 깔았다.

“마마의 사람입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왔다.

“그럼 내 사람인데 왜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하는 것이지?”

“송구합니다. 하지만 마마께서 들으시면 상심하실 내용이라 신하 된 마음에…….”

나는 베스의 말을 잘랐다. 그런 변명보다는 9후궁의 행방이 더 궁금했다.

“알고 있어. 그러니 베스는 내가 묻는 거에만 대답하면 돼.”

딱 잘라 말했다.

“9후궁께서는 황후마마의 도망을 도운 죄로 명이 있을 때까지 근신하라는 것이 비공식적인 입장입니다.”

비공식적? 결론은 갇혀 있는 것이 비공식적이면 공식적은 뭐란 말인가?

“공식적으로는 병환이 깊어 밖으로 나오지 못하신다고 합니다.”

그래? 아픈 것이 공식적이라면 병문안을 가면 되겠군.

“병문안 가자.”

자리에서 일어나자 베스가 말렸다.

“9후궁마마께 병문안 가는 이는 황제에 대한 도전이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은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말해 줘. 내가 떠난 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섣부르게 움직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자리에 앉아서 베스에게 명령했다.

그렇게 베스의 입을 통해 대충 황궁의 실태를 알 수 있었다.

베스의 목이 달아날 뻔한 일, 후궁들의 티파티에 난입해 9후궁을 닦달한 일……. 그리고 가장 놀랍게는 9후궁이 황제의 신하였다는 일.

하긴 그녀는 황제의 총애 따위는 관심이 없는 여인이었다.

왠지 후궁보다 신하가 더 어울리기는 했다.

파격적이라면 여인들의 직업이 없는 이곳에서 그녀만이 유일하게 모시는 상관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아들도 잡음 없이 황궁에 들일 수 있구나, 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폐하께서는 바쁘시겠지?”

“예. 한창 바쁘실 겁니다.”

그렇구나…….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있는 곳을 바로 알려 주지 않고 시간을 끌다가 실토한 그녀에게 감사함을 전해야 하겠기에 나는 황제에게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지금 황후인데, 물론 아직 대관식은 치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비공식적으론 내가 황후인데 황제를 찾아가는 것이 뭐가 문제냐 싶어 나는 씩씩하게 황제 집무실로 향했다.

매일매일 황제에게 안겨 가던 길을 나 혼자 걸어가니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둘이 걸을 때는 보이지 않던 풍경들도 눈에 들어왔다.

초상화라든가…… 장식품들이라든가…… 그렇게 여기저기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집무실에 다다랐다.

“아뢸까요?”

베스가 물었다.

하지만 장난기가 일었다.

악마가 떨어져 나간 황제가 일반적인 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매우 궁금했다.

똑똑똑.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두드렸다.

똑똑똑똑.

“내가 두 번 두드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말했을 텐데. 들어오든지 가든지……. 연?”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떻게 모르나. 이렇게 싱그럽고 향긋한 향기는 그대만이 낼 수 있는 것인데…….”

페로몬을 최대한 숨겼는데도 황제는 바로 알았다.

“연락을 보냈으면 내가 갔을 터인데 왜 힘들게 이곳까지 오고 그러나. 어디 힘든 곳은 없고?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것인가?”

나는 황제의 반응에 쿡쿡하고 웃었다.

“몸은 괜찮습니다. 폐하가 보고 싶어서 온 것도 맞습니다.”

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황제가 환하게 웃었다.

“바쁘신데 제가 찾아온 거였습니까?”

“아니, 그럴 리가. 그대는 언제 오든 환영이다.”

다행이었다.

황제가 혹여나 곤란해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바쁜 것을 알면서 쳐들어온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황제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진정한 자유를 얻어야 하는데, 일에만 파묻혀서 살아가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얼른 악마를 몰아내고 아이까지 셋이서 알콩달콩 사는 모습을 상상하며 황제가 이끄는 손을 잡고 집무실 안에 들어섰다.

“차를 들겠나?”

“예. 저는 그저 우유로 주십시오.”

워낙 차를 좋아하지 않았고, 커피가 마시고 싶었지만 아이에게 좋지 않을 것이고. 물론 이곳에는 커피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나는 주저 없이 우유를 택했다.

“폐하.”

“왜 그러지?”

황제가 다정하게 물었다.

“9후궁의 근신을 풀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사실 빙빙 돌려 말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황제와는 그렇게 다른 사람 대하듯이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이면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말한 황제를 나는 믿고 있었기에.

“그대는 참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군, 공식적으로는 아픈 것일 텐데 말이야.”

“베스가 유능해서 말입니다.”

황제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래서 그대에게 붙여 주었는데 살짝 후회가 되는군.”

“그래서 근신을 풀어 주지 않을 것입니까?”

“그녀는 사실 근신이 아니다.”

황제가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황제의 다음 말을 얌전히 기다렸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베스라면 다 전해 주었겠지. 뭐 사실 그녀를 황궁에 들여온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직 후궁 중에 무희 출신은 없었거든. 그리고 내가 협박이 아니라 그저 여인을 데려왔다는 것만으로도 온 황궁이 술렁거렸지. 잘못하면 무희 출신 황후가 생길지도 모른다면서 모두가 입방아를 찧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뜻을 관철시켰다. 내가 절대 그녀에게서 아이를 보지 않을 것이고, 그녀가 황후가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내가 내 입으로 쐐기를 박은 덕분에 그녀는 황궁에 들어오게 되었지.”

사실 순탄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

무희가 자칭 타칭 고귀한 이들이라고 불리는 여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 황궁에 데려오신 겁니까? 그때부터 혹시 폐하의 신하였습니까?”

“그래, 그녀는 모든 나라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정보상의 수장이니까?”

“예?”

너무 놀란 나머지 멍청하게 물었다.

아니, 무희라면서요……. 그런데 정보 조직의 수장이라니요?

내가 잘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황제는 그런 나의 생각을 바로 부숴 버렸다.

“놀랐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무희가 아니다. 어떻게 무희까지 되었는지는 모른다. 전에 그녀에게서 들으니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지?”

“예. 폐하의 아이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숨겨서 키우고 있기에 아닌 줄로 알았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처음 만날 당시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고, 나는 그녀를 도와주었지. 사실은 도와주었다기보다 연약한 여인과 젖먹이를 죽이려고 따르는 이들이 한심해 보였고, 때마침 살기가 돌았고, 그랬던 것뿐인데 그녀가 나에게 도움이 되겠다더군.”

정말로 범상치 않은 여인이었다.

나 같았으면 혼자서 아이까지 데리고 목숨을 노리는 이들을 피해 도망을 다니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저 죽을 날을 기다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황궁에 데려오셨습니까?”

“아니, 그저 그녀의 자질을 시험해 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똑똑한 여인이었지.”

“그런데 왜 무희로 살게 하셨습니까?”

황제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때 일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남자가 여인을 생각하면 마땅히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왜인지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친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 이렇게 안쓰러운 생각이 먼저 드는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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