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황제는 빈 내 잔에 우유를 따라 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황제도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그녀가 원래 무희였다고 했다.”
아…… 뭐 그럼 무희에게서 태어난 여인일지도 몰랐다.
대부분 그렇게 무희가 되는 이들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그녀에게는 기품이 있었다. 그저 평범한 무희가 아니었다. 노래나 춤이나 파는 여인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희라는 것에는 반박할 수가 없더군. 왜냐하면 그녀는 춤과 노래를 정말 잘했거든.”
황제가 저런 칭찬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기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그래서 신하로 두셨습니까? 아니지, 그래서 후궁으로 데려오신 겁니까? 마음이 없으셨다면서요.”
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입에 걸렸던 황제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황제에게서 처음으로 욕을 먹었다.
다행히 육성으로 먹은 것은 아니지만 눈으로 완전 과격하게 먹었다.
“죄, 죄송합니다.”
나는 말까지 더듬으며 사과했다.
“그래……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을 하지 말았으면 한다. 내가 좋아하는 건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대 하나뿐일 테니.”
이렇게 거창한 고백을 받고자 한 말은 아니었지만 들으니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예. 저도 폐하를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좋아할 것입니다.”
똑같은 고백을 해 주었다.
만족스러웠는지 황제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에게 입술을 붙여 왔다.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황제와 한참을 물고 빨고 했다.
“제가 너무 붙잡고 있은 것 같습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있었다.
황제의 책상 위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 이야기는 그녀에게서 마저 듣도록 해. 그래도 되겠나?”
당연히 되지. 근신 풀어 달라고 온 것인데……. 뭐 목적이 살짝 왜곡된 것 같기는 했지만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했으니 상관이 없었다.
“근신을 풀어 주시는 겁니까?”
“근신을 한 게 아니다. 나는 그녀를 내 나름대로 지키고 있던 거였다. 그녀를 만나면 자세하게 알 수 있을 테니 가 봐도 좋아.”
나는 황제의 목을 끌어안은 채 입술을 진득하게 비볐다.
“이러면 보내기 싫어지는데…….”
나는 낮게 울리는 황제의 목소리에 흠칫하며 물러섰다.
그리고 재빨리 방을 나섰다.
“감사합니다, 폐하. 저녁에 뵙겠습니다.”
황제가 한숨을 쉬는 것 같았지만 바쁜 황제를 붙잡고 일을 치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는 왜인지 한 번 시작하면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기에 나는 얼른 도망쳤다.
***
신려의 궁은 몹시나 수수했다.
본인이 화려하니 초라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후궁의 궁인데 정말로 돈을 쓰지 않은 티가 났다.
그리고 나는 입구에 서 있는 기사들을 보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아픈 후궁인데 기사들이 앞을 지키고 있으니 왜인지 비공식적인 이유가 더 돋보이는 광경이었다.
다행히 기사들은 내가 올 거라는 언질을 받았는지 나를 불러 세우지는 않았다.
하긴…… 황후가 될 사람인데 아무나 붙잡으면 그것 또한 우스운 일이었다.
“황후마마?”
신려와 함께 있는 기사였다.
그녀는 수수하게 기사 한 명만을 데리고 있었다고 했는데, 정말로 딱 한 사람만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아직 아닙니다.”
먼발치에서나 보았던 사람이기에 조금은 서먹할 줄 알았는데, 상대방이 나를 보는 눈길에 호감이 깃들어서인지 불편하지 않았다.
“아…… 하지만 폐하께서 이미 황후마마시라 말씀하셨으니 저희들에겐 황후마마이십니다.”
뭐 본인이 저 정도까지 말하는데 굳이 내가 아니라고 우기기도 뭣해 고개를 그냥 끄덕였다.
“신려 님께서는 계십니까?”
질문하자마자 방문이 열렸다.
“공자님?”
정말로 오랜만에 듣는,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마마가 아닌 공자님, 처음엔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신려만의 애칭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신려 님 오랜만입니다.”
신려의 얼굴에 반가움이 한가득 묻어났다.
“어서 들어오세요.”
신려는 응접실로 나를 바로 데려갔다.
수수하지만 그렇다고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작지만 아담하고 수수하지만 고고한 딱 신려를 닮은 응접실이었다.
그녀는 늘 그렇듯 나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그때에는 그저 그녀의 성격이겠거니 했는데, 황제가 사랑하는 이에 대한 예의였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 수 있었다.
“저로 인해 곤욕을 치른다고 들었습니다.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진심을 담아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이 적막한 황궁에서 황제 외에 유일하게 나의 말벗이 되어 준 이이기도 했다.
“제가 감사 인사를 받자니 민망하군요. 저는 공자님의 거취를 폐하께 알려 드렸답니다. 이런 제가 밉지는 않나요?”
그녀는 최선을 다해 나를 숨겨 주었음에도 자신으로 인해 내가 끌려왔다고 생각하는지 미안한 얼굴로 물었다.
“신려 님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겠지요. 그리고 충분히 도망을 갔습니다. 배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감사하는 마음만 있으니 저에게 미안한 마음은 갖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로 인해 이렇게 갇혀 지내게 한 것만으로도 넘치도록 받았습니다.”
한 번도 그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못 했었는데, 한 번 입을 열기 시작하니 그녀에겐 정말로 감사한 일뿐이었다.
“공자님은 정말로 재미가 없다니까요. 네가 나를 지켜 주지는 못할망정 황제에게 가져다 바치냐고 화를 내셔야지요.”
피식 웃는 그녀는 어느새 전에 항상 봐 왔던 그 모습 그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게 화를 낼지도 모르는데 반갑게 맞아 주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화를 못 내겠더군요.”
나 또한 그녀의 장단에 맞춰 장난을 했다.
그러자 그녀는 깔깔대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나를 볼 때마다 저렇게 웃고 있었다.
뭐 누군가에게 웃음이 된다면 그것 또한 좋은 일이기에 나의 입에도 슬며시 웃음이 지어졌다.
“역시 폭군의 사랑이 대단하군요. 저는 공자님이 영원히 이 황궁에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답니다. 황궁을 나가기 전 얼굴이 죽어도 돌아올 것 같지가 않았거든요. 그래서 폐하께서 제 아이를 들먹여 겁박할 때 눈물을 머금고 입을 열면서 저는 공자님의 원망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들어오는 공자님의 얼굴에 반가움이 묻어 있어서 오히려 더 미안해졌다는 것을 아시나 모르겠네요.”
나는 푸스스 웃었다.
하지만 그녀와 나는 그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가 나를 지켜 줘야 하는 이유가 없음에도 나를 지켜 주고 있었다.
친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나 혼자가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우정 어린 눈빛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갇혀 지내는 것이 많이 답답하겠습니다.”
“음…… 그닥? 저는 원래 이렇게 지냈는걸요. 제가 이 궁을 나설 때는 공자님을 찾아갈 때 외엔 잘 없었답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렸죠? 저는 이 궁 안의 모든 일을 알고 있답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차를 우아하게 입으로 가져갔다.
“예, 그렇겠지요. 정보 조직의 수장이니까요?”
그녀의 눈이 놀란 듯 휘둥그레졌다가 곧 제자리를 되찾았다.
황제가 다 말한 것을 알고 있는 듯싶었다.
“폐하께 다 들으셨나 봅니다.”
“음, 그건 아닙니다. 그저 신려 님께서 폐하와 만난 데까지만 들었습니다. 나머지는 본인에게 들으라고 하셔서요.”
그녀는 과거를 생각하듯 눈동자에 추억이 깃들었다.
아니, 아픔인 것 같기도 했다.
“폐하는 저에게 은인이지요. 저는 그때 죽는 줄 알았답니다. 그저 죽을 각오를 하긴 했는데, 이제야 세상에 나온 아이가 죽는다고 생각하니 어미 된 마음으로서 최선을 다해서 도망을 쳤어요. 그러다 아이를 잠시 다른 곳에 놓아둘까, 라는 생각도 했다가 금방 접었지요. 왜냐하면 제가 그렇게 키워진 아이거든요.”
생각보다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녀의 말이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폐하가 딱, 하고 나타나 저를 구해 주고, 저는 폐하께 도움이 되기 위해서 뭐든지 하겠다고 했지만…… 우리 폐하가 좀……. 그러니까 배려가 없으신 건 공자님도 아시지요?”
황제의 뒷담화에 나도 가담시키겠다는 의지가 돋보여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그런 폐하이시니까 저를 쓸모없는 취급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보여 드렸고…… 폐하는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을 맡겨 주셨어요. 원래 정보 조직은 폐하의 그림자 기사단이 운영하였는데, 저에게 오게 된 것이랍니다. 그때에는 유명한 것이 아니었지만 제가 유명할 정도로 키워 냈지요. 그 후 폐하와 가장 아무렇지 않게 접촉할 수 있는 후궁이 된 것이고, 또 후궁들끼리 분란도 적당히 만들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폐하가 눈 돌아가 버려서 이렇게 들통이 나 버렸네요.”
그녀는 시원섭섭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데 폐하께서 신려 님을 지켜 주신다고 하던데 무슨 의미입니까?”
“그거야…… 제가 폐하의 정보원 같은 역할을 했을 거라고 모두가 생각할 거니까요. 그렇다는 것은 이 궁중 암투에 어울리는 마지막이 있지 않겠어요? 독살이라든가 암살이라든가……. 저는 아직 후궁 신분이고, 자신들의 비밀을 발설한 나를 후궁들이 가만히 둘 리 없잖아요? 그러니 제가 확실한 신분이 다시 생길 때까지 폐하는 저를 가두는 것으로 보호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만약 이때 누군가 저에게 독약을 보냈다는 것은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하고 이곳에 들어왔다는 말이고, 암살도 같은 이유일 테니 아무도 손을 쓰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그녀의 궁에 기사 하나뿐인 것도 매우 도움이 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또한 기사들은 철저히 황제에게 충성하는 이들이니 매수가 될 일은 없을 것이고…….
“다행입니다. 저 때문에 갇혀 있는 줄 알고 폐하께 이만 근신을 풀어 달라고 부탁했었습니다.”
“저런…… 마음은 감사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수고를 하지 말아요. 공자님보다 제가 제 앞가림은 더 잘한답니다.”
그래 보이기는 했다.
내 코가 석 자인 주제에 온 세상의 정보를 주무르고 있는 수장을 걱정하다니 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참견이냐고…….
“그래도 걱정해 주신 것은 감사해요. 그리고…… 이렇게 찾아와 주신 것도 포함이랍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따른 언질이 있으실 때까지 찾아오지 않도록 하세요. 높으신 자리에 오르실 때 제가 흠이 되면 안 되니까요. 저는 공자님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답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해야 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너무나도 진심이라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녀는 멋진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