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폐하는?”
황제궁 침실로 들어가며 물었다.
“아직 일하고 계십니다.”
“식사도 안 하고?”
“예.”
그러다 몸 상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안 먹고 기다리니까 웬만하면 함께 식사하자고 말씀드려 줄 수 있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살포시 배에 손을 올렸다.
“안녕 아가. 오늘 아빠가 밥을 조금 늦게 먹을 건데 괜찮지?”
“절대 안 괜찮다.”
문 쪽에 급하게 뛰어온 것 같은 황제가 서 있었다.
“바쁘신 거 아니었습니까?”
“내가 아까도 말했지만, 그대가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아기도 가진 사람이 식사를 늦게 하면 안 되지.”
나는 그런 황제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팔을 벌렸다.
“저와 아이에게 인사해 주십시오.”
그러자 황제가 그답지 않게 쭈뼛거리며 말을 돌렸다.
“식사, 그러니까 식사하러 빨리 가지.”
황제는 나에게 다가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누가 봐도 쑥스러워하는 것이 티가 났다.
“인사는 안 해 주실 겁니까?”
그제야 황제는 나와 나의 배를 번갈아 보았다.
“꼭 그렇게 해야 하나?”
사실 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
황제의 페로몬만으로도 아이는 충분히 안정되어 있으니까. 뭐 평범한 부모들은 태교로 아이와 교감한다면 우리는 페로몬만으로도 충분히 교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귀가 빨간 황제를 보고 있노라니 왠지 꼭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것을 장난기가 발동했다, 라고 하는 것이겠지…….
“그래서 인사 안 해 주실 겁니까? 뭐 그 정도로 싫으시다면 안 하셔도 됩니다.”
일부러 시무룩하게 말하자 황제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아니, 싫은 건 아니다. 당연히 할 것이다. 아, 안녕 아가…… 아빠랑 잘 있었나?”
황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미친 듯이 웃었다.
그러자 황제의 얼굴이 토마토인 양 붉어졌다.
어떤 일에도 아무렇지 않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황제가 이런 반응이라니, 무척이나 신선했다.
“우리 그러고 보니 태명을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아기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대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나는 뭐든 좋으니까.”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함께 생각해서 불러야 합니다. 제가 혼자 만든 것도 아니고 우리 둘이 만든 거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이 이름이라면 몰라도 태명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지라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냥 이번만 그대가 해 주면 안 되나? 다음엔 내가 해 보도록 하지.”
황제의 말에 이번엔 내가 당황했다.
아니, 아직 아이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음을 생각하는 황제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뭐 딱히 우리가 헤어질 것도 아니고 계속 살다 보면 또 생기긴 할 건데…….
하지만 나는 아이를 또 낳을 생각 같은 건 해 보지도 못한 터라 지적을 해야 할지 자연스럽게 넘겨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럼 블랙빈으로 할까요?”
사실 생각해 놓긴 했던 것이었다.
아이가 처음 처음 배 속에 생겼을 때는 아주 작다고 들었다.
물론 내가 아기 초음파 사진을 접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 아니기에 잘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일하는 직원들이 아이가 생기면 그걸 보고 아주 작은 검은콩처럼 생겼다고 했다.
그거에 기초해서 볼 수는 없으니 그렇게 부르려고 한 것이다.
“무슨 뜻인지 물어도 되나?”
“그냥 작은 콩이라는 뜻입니다. 제 고향에 있는 다른 나라 언어입니다. 아기는 배 속에 있을 때 아주 작은 콩부터 시작해서 아기가 되어 간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세계에서는 아기가 커 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거든요.”
황제가 놀란 얼굴을 했다.
하긴 이곳은 그런 게 없으니 놀랄 만했다.
나도 그 말을 들었을 때 엄청나게 놀랐으니까.
“그런데 아기 이름이 콩이어도 되나?”
“예. 원래 태명은 그렇게 짓는 거라고 그러더군요. 이름만 좋은 것을 가져다 놓으면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빈이라고 부르면 되나?”
황제는 빈이라는 부분에서 목소리가 작아졌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는 안 드십니까?”
나에게만 음식을 집어 주는 황제를 향해 물었다.
“신전에서는 많이 먹었다고 들었는데 왜 이곳에서는 잘 못 먹는 것 같지?”
황제는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내 걱정만 늘어놓고 있었다.
“그거야 그땐 폐하께서 안 계셔서 그런 거였습니다. 아이에게 아빠의 페로몬이 필요하다고, 안 그러면 아이가 위험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불안정해서 먹는 입덧을 한 게 아닌가 싶고요. 물론 지금은 폐하께서 계시니까 그 정도로 먹지 않는 것뿐입니다.”
“정말인가? 그러면…… 황궁 음식이 신전보다 맛없어서 안 먹는 건 아니란 말이지?”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신경 쓰고 있었다.
“예. 그러니까 저는 그만 신경 쓰시고 폐하도 좀 드십시오. 일이 많으시니까 아마 늦게까지 일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제야 황제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전처럼 나보고 먹여 달라 조를 것 같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나의 생각을 읽었는지 황제가 묻지도 않은 말을 꺼내 놓았다.
“이제부터 내가 그대를 돌볼 것이다. 전처럼 그대에게 억지 쓰지도 않을 거고.”
자신이 나에게 억지 부렸다는 것을 아는 것만 봐도 장족의 발전을 했다.
나는 뭐 본인이 그렇다는데 뭐라 할 수 없었기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이도 내가 돌볼 것이다. 그대는 무사히 낳아 주기만 하면 된다.”
이제야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황제는 내가 아이를 가졌으니 자신이 달라지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협박하지 않고, 울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전하는 황제는 오늘따라 몹시 의젓해 보였다.
이제야 미친놈에서 조금 미친 인간으로 승격했다고나 해야 할까.
황제는 정말로 밤늦게까지 일했다.
황제를 기다리다가 까무룩 잠이 든 나를 잠깐 보다가 다시 일을 갔다는 것을 다음 날 일어나서야 들었다.
내가 도울 일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황제는 내가 정말로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했다.
“지금 가장 바쁜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나?”
나는 옆에서 차를 따르고 있는 베스에게 물었다.
“대관식 준비와 지금까지 벌려 놓았던 전쟁에 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관식이라면…… 내가 황후 자리에 오르는 것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황제 자리에 오르는 것 말고, 황후가 되는데도 대관식이라는 표현을 쓰나?”
“예. 황제와 황후의 위치는 동등합니다. 두 분이 같은 권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유일하게 황제 폐하에게 반기를 들어도 반역죄로 잡히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가장 현명한 이를 황후 자리에 앉히는 것이고, 귀족들의 만장일치를 얻어야만 오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대관식이라는 황제 폐하께서 자리에 오르실 때와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론적으로 거창한 말이긴 한데, 실질적으로 황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역사적으로 황제보다 더 권력적인 황후가 있기는 했는데 그건 아주 적은 경우였다.
대부분의 권력은 황제가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같았다.
하긴 지금은 같은 선상에 놓으면 안 되긴 했다.
폭군은 항상 절대 권력이었다.
그래서 폭군들이 유능한 반려를 들이지 않은 건가 싶었다.
절대 권력은 부패하고 부패한 권력은 혁명이 일어나기 마련이니까.
그런 위치를 가지고 있는 황후를 그래서 늦게 들이는 건가 싶었다.
“그럼 그동안 나는 공작저에 가 있어도 되는지 폐하께 여쭤봐. 아무래도 공작저에 가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으니까.”
베스가 왜 그러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지만 나는 무시했다.
아마 그는 내가 황제가 오지 않아서 토라진 건가를 가늠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로 공작저에 가야만 했다.
공작과 풀어야 할 것도 있고, 본인도 아니면서 용서하네 마네를 입에 올린 것도 미안해서였다.
베스를 보냈는데 돌아온 것은 황제였다.
너무 바쁜 것 같아 찾아가지 않은 것인데 이곳까지 걸음 할 줄 알았다면 내가 직접 갈걸 하고 후회했다.
“폐하. 바쁘실 텐데 그저 베스에게 말씀 전하셔도 됩니다.”
“아니다. 혹 내가 뭐 잘못했나?”
그제야 황제의 얼굴이 땀범벅임을 알았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단연 베스뿐만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제가 공작저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린 겁니다.”
차분하게 말하고 있는데 황제의 눈동자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바쁜 것은 거의 끝났다. 그리고 그대를 혼자 둬서 미안하다. 절대 밤에는 혼자 두지 않으마. 집무실에도 그대가 사용할 수 있는 소파를 가져다 두었다. 그러면 예전처럼…….”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불안은 악마가 떠나가도 고쳐지지 않는 것이었다.
애당초 그에게 태초의 어둠인 악마가 들러붙은 이유도 황제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불안감에 기인한 것일 테니까.
“폐하. 저를 보십시오.”
나는 두 손을 들어 황제의 볼을 잡았다.
그제야 흔들리던 눈동자가 자기 자리를 차지했다.
“제가 영원히 떠난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말을 뱉고 나서야 그의 불안을 내가 더 부추겼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을 버리고 도망쳤으니, 이유가 뭐였든 나는 많이, 아주 많이 미안했다.
“그저 며칠만 공작저로 다녀오려고 합니다. 폐하께서 모든 귀족들의 출입을 금하였으니 제가 찾아가려는 것뿐입니다. 그저 조용히 말입니다.”
“하지만…… 공작은 그대의 진짜 아비도 아닌데…… 나는 그대가 나에게 서운한 것이 있어 떠나는 줄 알았다. 충분히 생각할 만한 이유이지 않나?”
그렇긴 하네……. 친아버지가 아니고, 이 세계에 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정이 든 것도 아닌데 대뜸 공작에게 가겠다고 하면 오해할 만했다.
“그렇군요. 제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물론 공작님은 저에게 진짜 아버지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현 상황에선 제가 이 몸의 주인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저와 공작님은 피가 이어진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가족에게 매우 약합니다. 그러니 폐하, 제 말은 저는 공작님을 아버지로 생각하겠다는 말입니다. 이해해 주시겠습니까?”
황제가 무척 차분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아비인데 나의 이해가 뭐가 필요하겠나. 대신 공작가에 가지 말고, 이곳에 있어 줄 수 있나?”
나 방금 알아듣게 설명한 것 같은데? 왠지 대화의 핀트가 어긋나 있었다.
나의 눈빛이 이상했는지 그제야 황제가 황급히 다음 말을 덧붙였다.
“아니, 내 말은 공작을 오라고 하겠다. 그대가 불편할까 막은 것이었는데, 그대가 원하고 있으니 이젠 더는 막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안 가면 안 되겠나?”
황제가 아주 간절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감금되어 있는 상태인 것 같았다.
뭐 전이라면 황제가 눈 돌아가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니까 그리하마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황제가 아무리 불안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라는 걸 인식시켜 줄 필요성을 느꼈다.
갔다가 되돌아온다는, 그러니까 내 종착지는 당신이라는……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알려 주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