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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안배-58화 (58/60)

58화

한참 말이 없는 나를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이 초조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황제가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만큼 나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을 이런 불안에 떨며 살게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폐하.”

“그래.”

“저는 이 황궁에 갇혀 사는 것입니까?”

황제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나도 마음이 아프지만 그렇다고 여기에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남자가 마음을 먹었으면 황제의 불안감 정도는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아니, 절대 아니다.”

“그런데 왜 저는 갇혀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까?”

“절대 아니다. 나는 그러니까 나는…….”

“압니다.

폐하가 어떤 마음이신지. 그러면 저를 그저 공작저로 보내 주십시오.”

황제가 마음에 안 드는 아이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곧 아이 아빠가 될 터인데 아빠가 이렇게 아이처럼 굴어 대니 귀엽기만 했다.

“안 가면 안 되나?”

“예. 가겠습니다. 원래는 꼭 안 가도 상관이 없었는데 폐하가 이렇게 불안해하시니 제가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엔 황제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협박과 눈물 없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황제를 기특해했었는데 뭔가 허망한 기분이었지만, 달라지지 않은 황제라고 해도 예쁘고 잘생겼으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왜 이러나?”

내가 할 소릴 먼저 하는 황제의 눈 밑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러자 눈가에 달려 있던 눈물이 내 손에 닿았다.

“폐하, 저는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제가 돌아온다는 것을 굳게 믿고 황궁에 계십시오. 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는 이젠 울음을 참지도 않고 엉엉 울었다.

나보다 큰 사내가 나에게 얼굴을 묻은 채 울고 있었다.

정말 몸만 컸지 마음은 자라지 못한 어른 아이 같았다.

“폐하…….”

“싫다. 나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가 가지 않는 것은 안 되나?”

“예, 안 됩니다. 그러니 저를 보내 주십시오. 제가 어디 먼 곳에 가는 것도 아니고 황궁에서 가장 가까운 공작저로 가는 것인데, 그것도 안 된다고 하면 저는 제가 갇혀 산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황제가 무언가 한참 생각하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나에게 물었다.

“갇혀 산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나?”

대답을 잘해야 했다.

그래야만 나의 감금 생활이 앞으로 없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면 저는 폐하를 아주 싫어하게 되겠죠. 그렇다면 폐하는 마음은 떠난 껍데기만 품고 살아가실 겁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아니, 그건 당연히 싫지.”

황제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쵸? 그러니까 폐하, 제가 공작저에 다녀와도 괜찮으시죠?”

“그래. 다녀와. 하지만 꼭 돌아온다고 약속해.”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꼭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는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정말로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한 황제를 두고 나는 베스와 함께 궁을 나섰다.

공작가에 도착하자 공작이 문 앞까지 나와 있었다.

오늘 연통을 보낸 것 같은데, 뭔가 며칠 동안 준비를 한 모양새였다.

아니면 내가 언제 올지 모르니 계속 기다린 느낌이기도 했다.

“뭘 나와 계시고 그러십니까? 그저 안에서 기다리셔도 되는데.”

머쓱한 마음에 일부러 툴툴대며 말했다.

“마마께서 오시는데 당연히 나와 있어야지요. 공작저로…… 다시 안 오실 줄 알았습니다. 화가 풀리실 때까지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해 어쩌면 오랫동안 못 볼 거라고……. 그래서 연락을 받았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공작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의 얼굴을 보니 내가 좀 심했던 거 같기도 했다.

“뭐 그렇게 화가 났던 건 아니었습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화를 내셔도 됩니다. 다만 화를 내도 이 아비의 얼굴을 직접 보고 해 주십사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제대로 된 아비가 되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공작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정도 머물다 가실 겁니까?”

앉자마자 가라고 말하는 건가 싶어 공작을 봤다.

“조금 오래 머물 수 있으십니까? 이제 가면 또 언제 올지 모르는데…….”

다행히 곧장 덧붙인 공작의 말에 오해는 하지 않았다.

“뭐 좀 알아보러 왔습니다.”

“어떤 것 말입니까?”

“혹시 공작님 아시는 분 중에 요즈음 뭔가 행동이 예전 같지 않은 분 있으십니까? 원래는 착했는데 갑자기 화가 많아졌거나, 활동적인 사람이 아닌데 대외 활동을 한다거나, 어찌 되었든 변한 사람이 있으십니까?”

사실 공작저가 황궁에서 가장 가까웠기에 주목적은 여기에 있었다.

황궁 안에서 어둠을 찾는 방법도 있었지만, 궁 밖도 충분히 알아봐야만 했다.

어둠을 물리쳐야만 나와 아이, 그리고 황제의 미래가 보장되었고, 더 크게는 신과 한 약속들…… 그러니까 나의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두 발 벗고 나서야 했다.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고 급한 것은 나였다.

“그런 건 왜 물으십니까?”

공작이 이상하다는 투로 말했다.

하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면 당황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공작은 이 제국의 충신이고, 내 아이의 할아버지이고, 그리고 이 제국의 검이기도 하니 어쩌면 도움이 많이 될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자면 내가 성자인 것부터 말을 해야 했다.

황제가 워낙 일찍 쳐들어왔고, 황후가 될 사람이 성자인 것은 말도 안 되었기에 내가 성자라는 것이 알려지지 않았다.

알려고 노력한다면 알 수 있겠지만 전장에 있던 공작은 특히 모를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성자인 것, 신의 계시를 받고 세계를 멸망으로부터 구해야 하는 것, 그러니 앞으로 전쟁은 안 된다는 것을 사실과 각색을 교묘히 섞어 공작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못난 아비가 힘이 되어 드리지는 못할망정 또다시 힘들게 했습니다.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아닙니다. 알고 하신 일도 아닌데요, 뭐.”

나는 미안해하는 공작의 손을 슬쩍 잡았다.

어색했지만 따뜻했다.

“그러면 그 어둠이 황궁을 중심으로 깔려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어둠과, 그러니까 악마와 계약한 인간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계약을 끊어야 합니다. 아직 어떤 인간과 함께 있는지 알지 못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소재 정도는 알아야 다음 대책을 세울 수 있을 듯합니다.”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도 아니고, 수도에서 악마를 찾기라니 너무 어려웠다.

“악마와 계약하면 뭐가 달라집니까?”

“이성을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분명 나인데 나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지가 없는 인형을 다른 이가 조종한다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그러니 평소와 다른 인간을 위주로 조사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공작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저를 그렇게 보십니까?”

“제 주변에 달라진 사람이라면 마마가 가장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속으로 뜨끔했다.

하지만 악마 이야기를 하는 와중이라 그런 말을 하는 건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제가 악마와 계약이라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공작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신전에서 성자라 인정한 분인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혹시나 공작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싶어 입술이 말랐다.

하지만 그 후 공작은 악마에 대해 질문할 뿐 더 이상 나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아주 오랜만에 이 몸의 주인이 사용하던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아, 맞다. 아이 가진 걸 이야기하지 않았네.”

사실 혹시나 내 정체에 대해 의심을 할까 신경을 쓰다 보니 말을 못 했다.

알면 어떤 얼굴을 할까, 라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퉁 투둥 서걱.

이상한 소리들이 즐비했다.

처음에는 꿈속에서 누군가와 싸우는 줄 알았는데, 점차 정신이 또렷해지고 그 소리들이 나의 창문 너머에서 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쭉 돋았다.

나는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나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베스였다.

“베스…… 무슨 일이야?”

나는 온몸이 떨리는 것을 애써 추스르며 물었다.

물론 이불로 배를 가린 채였다.

“자객이 든 것 같습니다.”

자객? 태어나서 정말로 처음 현실에서 접하는 단어였다.

“그런 것이 이곳에 왜 있는데?”

“마마께서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알 수 있지. 내가 그냥 아무나도 아니고 눈에 띄는 사람이니까. 위치나 외모나 어디 가도 튀기는 했다.

하지만 자객 같은 것이 왜 이곳에 있냐는 말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죽을 정도로 원한을 산 기억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걸 알고 있는 거와 저들이 이곳에 있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는 말이다.”

그제야 베스가 알아들은 것 같았다.

“자세한 건 자객들의 입을 열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후궁 마마들 중 한 분일 수도 있고, 다른 왕국에서 보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후궁들 중에 누군가 보냈다면 조금 억울했다.

나는 그녀들을 지켜 주려고 황제가 쫓아내겠다는 것도 막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왕국에서 보낸 것이라면 더더욱 억울했다.

나는 그들과 척진 적이 없는데 황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만으로 죽어야 한다면 진짜이지 너무 억울했다.

“그래서 지금 저들을 막고 있는 건 공작저 기사들인가?”

“예. 공작저 기사들과 폐하께서 보내신 그림자 기사단 둘 다입니다.”

언제 나에게 그런 것까지 딸려 보냈나 싶었다.

이걸 스토커라고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지켜 줘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수가 많나? 아직까지 처리하지 못하고 있네?”

무서움이 가시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나를 죽이겠다고 온 이들에게 안쓰러움을 느낄 만큼 내 인성이 그렇게 살갑지도 못했다.

“살아 있는 것을 잡아들여야 하니 품이 많이 드는 것 같습니다.”

하긴 그렇긴 할 것 같았다.

도구를 쓰면 쉽게 죽일 수 있는 사냥도 산 것을 잡으려고 하면 그만큼 손이 많이 간다고 들었으니까.

“그래. 그러면 내가 죽을 일은 없겠군.”

“예. 혹시 안심이 되지 않으신다면 제가 옆에 함께 있겠습니다.”

안심이 안 되는 것은 사실이다.

저렇게 칼이 난무하는 것을 본 적이 없기도 했다.

그저 황제가 일방적으로 휘두르는 칼만 보았지, 이렇게 누군가 나에게 악의를 가지고 휘두르는 칼들은 처음 접했다.

“그러는 베스는 칼을 쓸 줄 알아?”

“예. 황궁에 있는 이들은, 특히 폐하의 곁에 있는 이들은 맡은 일이 어떻든 기초적인 검술은 다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이건 또 처음 듣는 말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데?”

“암살이 잦기 때문입니다. 폐하를 해치려고 하는 왕국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약한 이들은 진작에 다 죽었습니다. 자기 한 몸 건사할 수 있는 이들만이 황궁에 남아 있습니다.”

하긴 미친 듯이 전쟁을 하려는 인간을 좋아할 사람은 당연히 없을 터였다.

언제 자신의 나라에 쳐들어와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았으니 최대한 멀리 있을 때 터뜨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제야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조금 더 안심이 될 만한 상황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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