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연, 많이 놀랐겠구나.”
공작이 들어왔다.
정말로 안심이 되었다.
공작이 황제를 지키는 검이라는 거야 모르는 이들이 없었으니.
“저는 괜찮습니다.”
아까 자다가 깨어났을 땐 정말로 무서웠는데 지금은 진정이 되었다.
그것보다 공작이 더 놀란 얼굴을 했다.
곧 죽어도 마마 마마 하더니 이름까지 부르는 것을 보면.
“감히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공작저에 자객이라니…… 나도 늙었나 보구나. 씨조차 말려 버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렴, 아가.”
아가라니……. 아직까지 공작이 이 몸을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아, 맞다. 아가라는 말까지 나온 이 상황에서 해도 될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말이 나온 김에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공작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무릎을 꿇고 손을 잡아 왔다.
“무엇이든지 괜찮으니 말해 보려무나. 반역만 아니면 뭐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단다.”
이 와중에도 황제를 지키려고 애쓰는 그를 내려다보며 나는 툭, 하고 내뱉었다.
마치 오다 주웠다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말투로 말이다.
“저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래그래. 아이를…… 뭐 아이?”
공작이 귀신을 본 것처럼 하얗게 질렸다.
“예. 아이를 가졌습니다.”
도대체 내가 아이를 가진 게 저렇게 충격적인가 싶어 쐐기를 박듯 이번엔 힘 있게 말했다.
그리고 베스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공작이 내 손을 놓은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서 이곳으로 도망 온 것이냐?”
도망이라니……. 그저 온 것인데 기분이 슬슬 나빠졌다.
“그냥 온 것입니다. 도망이라는 단어는 적절치 못합니다.”
“내가 정말 아들을 잘못 키우긴 키웠나 보구나. 도대체 어느 집안 여식이냐? 그래……. 연, 네가 아무리 황제 폐하가 싫다고 해도 이미 너는 폐하의 사람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서 아이를 본다니 이 얼마나…….”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내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는 건가? 아닌데? 여식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내가 다른 여자를 품은 것으로 오해하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남자라는 것과 이곳에서는 남자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도 떠올랐다.
내가 변명도 하기 전에 공작이 벌떡 일어났다.
“어느 집안 여식인지 말만 하거라. 아까는 내가 너무 흥분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구나. 아이를 가진 여인이 원하는 것은 들어주고 아이만 받아 오면 되는 것 아니냐? 그러면 평생 손주를 못 본다고 체념한 나도 손주를 안아 봐서 기쁘고.”
정말 제정신이 아닌 듯 공작이 중얼거렸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저 상상력이 어디까지 갈지 몰라서 공작을 불러 세웠다.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하시는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거 아닙니다. 그러니 진정하십시오.”
“그럼 무슨 말인데? 아이가 생긴 게 거짓이라는 거냐?”
아니 무슨 결론이 저렇게 극과 극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황제에게 충성한다며, 그런 사람이 아이를 몰래 빼돌려 키울 생각이나 한단 말이야? 너무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아이가 생긴 것은 맞습니다.”
“그럼? 뭐가 오해라는 말이냐?”
“그 아이가 지금 제 배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폐하와 저 사이의 아이입니다. 다른 사람은 끼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폐하가 다 죽이고 말걸요.”
공작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한참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혹시 내가 딸을 낳았던가?”
한참 만에 내린 결론이 자식의 성별을 바꾸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게 말이 되는 것이냐?”
그래…… 사실 말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공작이 부정한다고 해서 생긴 아이가 없어지지는 않듯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설화나 역사서를 보면 예전에는 남자와 여자라는 성보다 알파와 오메가가 더 자연스러웠죠. 그때는 남자가 아이를 낳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작은 납득하지 않았다.
“연아. 지금은 설화 속 세상이 아니란다. 그러니까 그런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안 드냐?”
“뭐 전제가 잘못되든 잘되든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 오메가인데 오메가가 아니 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설화에 나오는 알파는 폐하가 맞습니다. 저는 오메가인 것이 확실합니다. 신이 인정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듣는데 계속 그렇게 부정하시면 서운하지 않겠습니까?”
공작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쉬이 믿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걸 알지만 사실을 반박하려고 하니 서운한 맘이 더 먼저 들었다.
“그러니까 사실이라는 것이냐?”
“예. 뭣 하러 이런 걸 장난으로 말씀드리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장난을 칠 만큼 공작님과 가까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절로 목소리가 뾰족하게 나갔다.
공작이 한참을 멍 때리다 큼큼거렸다.
그러더니 대뜸……한마디 던졌다.
“만져 봐도 되느냐?”
“예, 뭐,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방금 전에도 아이를 빼돌려 키우겠다고 말한 걸 보니 아이를 좋아하는 듯싶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얼굴이 가시자마자 말하는데 거절은 할 수가 없었다.
공작의 투박한 손이 배에 내려앉았다.
평생을 검을 잡은 사람답게 손이 매우 거칠었다.
그때 공작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 할애비다. 아까는 아가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다. 할애비는 아가가 찾아와서 무척이나 기쁘단다.”
대처가 손바닥 뒤집듯이 정말로 빠르게 바뀌었다.
그리고 왜인지 그것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먹먹한 목소리로 공작에게 말했다.
“태명이 있습니다. 블랙빈입니다. 검은콩이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공작이 환하게 웃었다.
“빈아, 할애비다. 할애비 만나서 반갑다고? 그래그래, 할애비도 너무나도 반갑구나. 뭐? 졸린다고? 그래그래, 얼른 자려무나.”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 공작을 나는 이상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공작은 전혀 신경 쓰지도 않았다.
“폐하께서는 아십니까?”
어느새 다시 존칭을 쓰고 있었다.
“예.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빠인데.”
공작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배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였다.
“아직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태동 같은 걸 느끼지는 못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마마의 아비입니다. 이미 아기를 한 번 안아 본 사람인데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하긴 그렇기는 했다.
“그럼 이만 배에서 손을 좀 떼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공작이 서운한 얼굴을 했다.
“배에 있을 때부터 이렇게 교감을 해야 태어났을 때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예? 그럼 저는 왜 공작님과 사이가 안 좋습니까?”
저렇게 잘 아는 사람이니 그렇게 했을 거라고 생각해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공작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제가 그것을 못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너무 바빴습니다. 변명뿐이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다시는 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 괜히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
공작과 내 사이에 과거가 있다면 당연히 안 좋은 이야기일 뿐인데, 나는 무엇을 하자고 물었는지 모르겠다.
“그러셨군요. 그러면 어떻게 아셨습니까?”
“기사단에 가정을 꾸린 녀석들이 제법 됩니다. 자식들과 관계가 좋은 이들에게 물어봤습니다.”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체면을 버리고 기사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기까지 쉽지는 않았을 거였다.
그저 아들과 관계 개선을 하고 싶은 공작의 간절함이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몸의 주인에겐 미안하지만, 감히 내가 용서를 논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앞으로는 조금 마음을 열고 공작을 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단 밖의 일이 끝난 것 같은데 가 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제야 공작이 밖을 내다보았다.
어두운 창문 너머에 고요가 찾아왔다.
밤손님들은 제법 잘 처리가 된 듯싶었다.
“혼자 계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뭐 괜찮습니다. 공작가의 기사단도 폐하께서 보낸 기사들도 밖을 지키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 잘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이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나를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하긴 제국을 수호하는 검인데 마냥 인자한 할아버지일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공작이 “감히 내 손주를 건드려?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부디 잡힌 이들이 뒷배를 술술 불기를 기도했다.
공작이 나가고 잠을 청한 나는 생각보다 아주 잘 잤다.
밤에 그 소란이 있었는데도 곯아떨어진 자신을 보며 참으로 나는 참 무신경하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하품을 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보나 마나 베스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한 말이었는데 공작의 얼굴이 보였다.
“아, 공작님 좋은 아침입니다.”
그리고 공작의 뒤에 황제가 서 있었다.
차마 들어오지는 못하고 쭈뼛거리는 것 같았다.
“폐하?”
황제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눈을 돌렸다.
하긴 사저에 간 지 하루도 안 돼서 득달같이 달려왔으니 눈치를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폐하께서 걱정이 많으셨는지 어젯밤에 바로 오셔서 지금까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뭐? 아니 왔으면 깨울 것이지…… 바쁜 사람을 나 때문에…….
“들어오십시오.”
사실 기다리라는 말을 듣지 않고 온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어젯밤 일을 생각하면 오히려 안 오는 것이 이상했다.
나 같아도 걱정했을 테니까.
“내가 그대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도 그대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려고 했다. 그런데 어제 보고를 받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혹시 화났나?”
황제는 무척이나 눈치를 보며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폐하는 저에게 감시를 붙인 것은 미안하지 않은가 봅니다.”
사실 덕분에 살아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무 말 없이 감시를 붙인 건 한마디 해야 했다.
“그건…… 감시가 아니다. 보호다.”
뭐 사실이긴 했는데 그대로 넘어가기에는 찝찝하긴 했다.
“그러면 보호이니까 보고를 받지 않을 것입니까?”
황제가 대답을 안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보호를 물리실 것 아니면 보고를 받지 않겠다 약속하십시오.”
단호하게 말하자 그제야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위험해도 안 되나?”
뭐 그건 다르긴 했다.
“그건 허용하겠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눈에 띄게 기뻐했다.
“그럼…… 내가 이곳에 머무는 것은 안 되나?”
“예. 폐하는 아침 식사만 하시고 바로 돌아가십시오.”
당연히 거절당할 것을 알았는지 더 조르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황제가 기특해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를 감시하지 않고 얌전히 잘 기다리시면 서신을 쓰겠습니다.”
“정말인가?”
충동적으로 한 말이었는데 황제가 선물을 받은 아이인 양 환하게 웃었다.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던 방이 화사해질 정도로.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지은 황제가 너무 예뻐서 나는 다시 한번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예. 매일매일 써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대답했다.
“좋다. 너무나 좋다. 나도 답장을 쓰도록 하마. 매일매일 사랑한다고 꼭 답장을 쓰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