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황제는 떼쓰지 않고 식사만 마친 채 얌전히 궁으로 돌아갔다.
편지 처방이 제법 잘 통한 것 같았다.
오늘은 얼굴 봤으니 내일부터 편지를 보내야겠다 마음먹고 나는 공작에게 찾아갔다.
“뭐 좀 알아보셨습니까.”
빚 받으러 온 사람인 양 당당하게 물었다.
“일단 귀족 중에는 달라진 이가 없었다.”
하지만 공작은 마음에 드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나마 귀족에게 악마가 들러붙지 않았다니 다행이었다.
그래도 면밀히 살펴야 하기에 다시 한번 봐 달라 부탁했다.
“설마 정말로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있는 거 아니겠지?”
오싹한 등을 문지르며 터덕터덕 방으로 돌아왔다.
부디 그런 건 아니길 바라며.
“이제 오느냐?”
앞을 바라보니 신이 와 있었다.
“황궁에서는 안 보이셔서 안 오신 줄 알았습니다.”
“어둠이 너무 짙어서 내가 들어갈 수 없을 뿐이다.”
그러면…… 어둠과 계약한 사람을 잡아도 어떻게 처리를 하지?
“일단 찾기부터 하거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곳은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마 이곳까진 어둠의 영향이 없는 탓이겠지.”
정말 다행이었다.
공작저에서 사람들을 의심해 보려고 했는데 수고를 덜었다.
그러다가 퍼뜩 든 생각에 신에게 물었다.
“저번에 황궁을 중심으로 그 주변까지 다 어둠이 보인다고 하셨지요?”
“그래…….”
“하지만 공작저는 황궁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습니다.”
“알고 있단다.”
그렇다는 말은…….
“이번에도 어둠은 황궁 안에 있군요.”
사실 나는 공작저에 와서 여러 연회와 티타임에 열심히 참가해 악마를 찾으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뭐 황궁 안에 존재한다면 내가 이곳까지 온 이유가 사라진 셈이었다.
“그래…… 공작도 조사를 한 결과 귀족가에는 없다고 했으니까 황궁 안뿐이겠지.”
황궁 안은 정말로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달라졌는지 아닌지는 쉬이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황궁은 원래 가면을 쓴 사람만이 살아가는 것이니까.
그저 모종의 이유로 그들이 자신의 진심을 비친다고 해서 그들 모두를 의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앞이 깜깜했다.
“저 그러면 황궁에 돌아가야겠습니다.”
그런데 신이 말렸다.
“아니, 이곳에 있는 것이 좋겠구나. 이곳에 있어야 내가 지켜 줄 테니까. 그대를 해치려는 것은 분명 어둠일 것이다.”
어제는 너무 놀라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성자는 그에게 걸림돌이라는 것을 어둠도 충분히 알 것이었다.
“그냥 황궁에 함께 가시면 안 됩니까?”
“나는 황궁에 있는데 그대가 나를 보지 못한다. 그러면 내가 위험을 알려 주어도 그대는 듣지 못하겠지.”
“계속 계셨습니까?”
“그래. 늘 함께 있었다.”
나는 신의 힘이 황궁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신의 힘을 느끼지 못하는 거였다.
하지만 황궁 안에서도 신력은 사용할 수 있었다.
교황도 나에게 신력을 사용했고 말이다.
“신력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왜 솔 님과 소통이 불가한 것입니까?”
“신과 악마는 거의 비슷하단다. 신이 태초의 빛이라면 악마는 태초의 어둠이지. 즉, 어둠과 빛이 한곳에 존재하지 못하듯이 우리도 그저 어둠이 그곳에 존재하는구나를 느낄 뿐이지 누가 본래의 어둠을 내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정해 놓은 영역 안에 들어갈 수는 있지만 계약자와 소통이 불가하다. 황제와 어둠의 계약이 쉽게 끊긴 것은 황제가 신전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어둠도 신전에 따라오긴 했지만, 황제에게 힘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지켜보기만 하다가 잘못하면 자신이 잡힐 것이라고 생각해 관계를 끊은 것이겠지. 마찬가지이다. 내가 황궁에 갈 수는 있지만 그대와 소통은 할 수 없다. 딱 한 가지 방법은 그대에게 내가 강림하는 것이다.”
이제야 말하는 신이 아니꼬웠지만 네가 안 물어보지 않았냐, 라는 말이 나올까 봐 그냥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러면 솔 님은 어둠을 찾을 수 없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그의 영역은 찾을 수 있지만 그 본인을 찾을 수는 없구나.”
이제야 내가 얼마나 위험한 곳에 무방비로 노출이 되어 있었는지 실감이 났다.
나는 덜컥 무서운 마음에 배부터 그러안았다.
“내가 지켜 주마. 그러니 너무 무서워 말고. 그대는 황궁이 아닌 이곳에 있는 것이 좋겠구나.”
신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그러다 이번엔 이곳의 인간에게 들러붙으면 어떻게 합니까?”
무서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도 머리가 있을 텐데 그렇게 하면 이번엔 바로 잡힐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내 눈앞에서 악마와 인간이 계약하는 것을 몰라볼 리 없지 않겠느냐?”
그건 그렇긴 했다.
그래, 나는 신의 사랑을 듬뿍 받는 인간이고, 그러니 나는 무사히 출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를 세뇌하듯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신은 그런 나를 빤히 바라만 볼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폐하께 편지를 써야겠습니다.”
내일 쓰려고 했던 편지를 일찍 써야겠다 생각하며 나는 베스를 불렀다.
“폐하께 편지를 쓰게 편지지 가져다줄 수 있겠나?”
“예, 마마. 그리하겠습니다.”
나는 베스가 가져온 편지지에 자초지종을 썼다.
그리고 출산할 때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 또한 구구절절 썼다.
간략하게 써도 되었지만, 황제가 울며 달려오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구구절절 쓸 수밖에 없었다.
“베스. 이 편지를 폐하께 무사히 가져다줄 수 있을까? 절대 중간에 아무에게도 가로채이면 안 돼. 폐하만이 볼 수 있어야 해.”
베스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림자 기사단에 맡기자 했다.
하긴 그들은 황제 직속이므로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할 테니 가장 적합했다.
나는 그러라 말하였고, 내가 쓴 편지는 황궁을 향해 달려갔다.
“신전에도 소식을 전해야겠습니다.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때 베스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
“성기사단장님이 황궁에 도착하셨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아니…… 성기사단장씩이나 되면서 맨날 신전을 비워도 되냐고……. 물론 나는 수고를 덜었기에 이곳으로 와 달라 사람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장이 도착했다.
정말 빛의 속도였다.
방금 생각한 것 같은데 눈앞에 나타난 단장을 향해 나는 얼떨떨하게 말했다.
“날아오셔도 이보단 늦으실 것 같은데 어떻게 이리 빠르게 오셨습니까?”
그러자 단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성자님께로 오는 길이었습니다. 제가 황궁에 간 목적이 이곳에 계시는데, 의미 없이 그곳에 있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마침 공작저에 도착했을 무렵 성자님께서 보내신 이와 마주쳤을 뿐입니다.”
“그러셨군요. 잘 오셨습니다.”
할 말이 고작 이것뿐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기는 했지만, 그것밖에 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먼저 정 없이 딱딱하게 말한 것은 성기사단장이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새로운 소식이 있으십니까?”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 제가 한동안 공작저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경청하는 자세를 취하는 단장을 향해 나는 처음부터 설명했다.
아까 신과 나누었던 대화의 전반이었다.
그런데 한참 말하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찾아들었다.
신은 나의 아이에 대해 심하게 신경을 썼다.
항상 어둠 외엔 만사가 태평하다시피 하는 신인데 뭔가가 조금 이상했다.
나를 아껴서 지켜 주겠다는 것은 이해가 되었는데, 왠지 뉘앙스가 지켜 주겠다는 게 내가 아닌 배 속의 아이인 것 같았다.
아이를 좋아하나 보다 하고 넘어가고 싶지만,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꼭 집어서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었기에 일단은 묻어 두기로 마음먹었다.
“몸은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암살당할 뻔했다는 이야기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뭐 유능한 분들이 곁에 있으니 다행히도 괜찮습니다.”
“저도 이곳에 머물러도 괜찮으십니까? 도움이 되실 겁니다.”
순간 내가 어디 다쳤다고 말한 줄 알았다.
성기사단장의 무표정한 얼굴에 걱정이 떠올랐고, 분명 괜찮다고 말했는데 이곳에 남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뭐 그러셔도 되는데 단장님이 신전에 안 계셔도 괜찮겠습니까?”
“예. 제가 하는 일이 성자님을 지키는 일입니다. 교황 성하도 허락하실 겁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성기사단장에게 교황 성하의 허락을 받으면 그리하라 말했다.
공작에게는 뭐 따로 허락을 안 받아도 되겠지…….
왜냐하면 공작은 그림자 기사단의 주둔도 허락해 줬으니까 성기사단장의 주둔도 허락해 줄 터였다.
교황이 허락을 안 해 줄 수 있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내 걱정이 기우였는지 다음 날 바로 허락의 서신이 날아왔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 걱정으로 가득 찬 서신을 받는 순간 무언가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워낙 신에 미친 인간이니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임에도, 악의에 찬 암살을 한 번 겪어서인지 무한정 호감이 담긴 서신은 몽글몽글한 기분을 선사해 주었다.
또한 교황은 서신과 함께 성기사들도 보내왔다.
아니…… 신전을 지키는 사람들을 이렇게 보내도 되나 싶었다.
그렇다고 보내온 사람들을 다시 돌려보낼 수는 없어 공작에게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성기사단장 한 사람만 머무르는 것은 따로 허락을 안 구해도 되겠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공작가의 식량을 쓸 테니 허락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공작은 쌍수 들고 환영했다.
나를 지키는 일인데 뭐든지 좋다고 했다.
그렇게 공작저는 공작가 기사들과 황궁의 최정예인 그림자 기사단, 그리고 성기사들로 철통 방어 요새를 이루었다.
황제도 못 받아 본 호위를 내가 받고 있었다.
“마마, 폐하께서 오시겠다 연통을 보냈습니다.”
안 그래도 어제 편지를 보내자마자 황제가 방문해도 되냐 물어보는 서신이 답장으로 오긴 했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기도 하고 해서 내일 다시 연락해 보라 했는데 깨어나자마자 황제의 서신이 왔다.
“그래. 찾아오셔도 된다고 해.”
베스에게 말을 전하자마자 방문이 열렸다.
뭐 보지 않아도 황제임을 알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황제의 페로몬이 방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눈 가리고 아옹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왔으면서도 서신을 따로 전하는 황제가 귀엽기도 해 모른 척하고 있었다.
“연…….”
황제가 애절하게 나를 불렀다.
그리고 나는 황제를 돌아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얼굴이 수척해진 것은 뭐 일이 많아 그렇다 치고,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줄줄 흘리는 황제 때문이었다.
이미 계속해서 울고 있었는지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폐하? 왜 울고 계십니까?”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난 나는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황제는 나에게 안겨 더욱더 서럽게 울었다.
방 안에는 황제 외에 공작과 성기사단장도 함께 있었다.
정말 위엄 따위는 집어치운 황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