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 멸망을 굳이 막아야 하나요 (12)화 (12/90)

<제12화>

2. 마르고 닳도록 야근을

고귀하고 위대한 존재이시자 저 하늘의 별이기도 한 성신은 언제 어느 때나 인간을 굽어볼 수 있다.

그런 초월적인 성신에게도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따분함이다.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기간을 지루하게 보낸 성신들은 유흥을 우선시했다. 그랬기에 흥미를 끄는 인간을 찾는 걸 좋아했다.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제아무리 시선을 이끄는 인간이 있어도 관찰만 하다 보면 흥이 떨어지기 마련이었으므로.

그러다 드디어 인간과 ‘접촉’할 기회가 찾아왔다.

당연히 힘을 빌려줘 놓고 관찰만 하는 건 수지가 안 맞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성신은 만들었다. 선택한 인간의 주변을 본뜬 가상공간을.

그리고 그 공간을 ‘채널’이라 불렀다.

채널에 입장하면 성신은 좀 더 자세히 인간을 들여다볼 수 있고, 더 나아가 알게 모르게 인간사에 개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신이 인간사에 개입하는 것은 엄연히 규율을 어기는 짓이었다.

레바브는 이를 막고자 시스템 센터에 한 가지 기능을 도입했다.

이하늘이 좀 전에 멋모르고 클릭했던 채널 접속(CHANNEL ACCESS) 말이다.

채널 접속을 활성화하면 시스템 운영자는 성신이 만든 채널에 입장할 수 있었다.

입장해서 성신이 인간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지 안 하는지 감시하는 것, 그게 시스템 운영자의 또 다른 일이었다.

당연히 성신들의 반발은 거셌다.

자신의 채널에 멋대로 들어와 감시하는 것도 빡쳐 죽겠는데 레바브가 한 가지 제한을 둔 탓이다.

〔레바브 시슽렘에 가이ㅂ하신 선싱 여럽분 아프로 채널에 접속하실땨 반ㄷ,시 운영자와 동행핫세요 어길시 츠방~〕

다시 말해 운영자가 채널에 접속하지 않으면 성신 또한 접속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그 제한을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궁극적 존재가 있지만…….

어쨌거나 지금 이하늘은 ‘머리로 장난치는 자’의 언약자 주변을 본떠 만든 채널에 입장했다.

채널은 언약자의 주변 환경에 따라 휙휙 바뀐다. 언약자가 게이트에 진입하면 채널도 게이트 내부로 슉 변한다는 의미.

물론 ‘본떠’ 만든 공간인 만큼 언약자가 겪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재생하는 것뿐이지, 실제는 아니다.

그러므로 언약자는 채널에 입장한 이하늘을 못 보고 못 만지며, 동시에 이하늘은 실제로 게이트에 진입한 게 아니었으나.

“저 왜 게이트에 들어왔죠?”

채널 접속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이하늘은 게이트에 진입한 줄 알고 당연히 겁을 먹었다.

급격하게 두통이 몰려와 이하늘이 이마를 짚었다. 그러면서도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여기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이트니까.

주변을 둘러보던 방독면의 헌터가 구두 앞코로 바닥을 툭툭 치며 혀를 찼다.

“쯧, 낙원이잖아. 성가시게.”

‘낙원?’

방독면의 헌터 앞에도 그녀의 앞에 뜬 창과 똑같은 창이 떠 있었다.

그곳에 적힌 ‘낙원의 끝자락’.

이하늘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뭐예요?”

【이 균열에 저장된 정보다. 그것도 모르다니, 이리 멍청해서야 쓰겠느냐.〗

슬슬 상대방을 무시하는 ‘머리로 장난치는 자’의 화법에 짜증이 났다.

하지만 상대는 신적 존재다. 성질을 죽여야 했다.

‘그보다.’

이하늘이 초조하게 입술을 매만졌다.

알 수 없는 상황이 자꾸만 들이닥쳐 뭐가 뭔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저 헌터 눈에 자신이 안 보인다는 것.

‘어쩌면 이 게이트에 있을 몬스터 역시 날 못 볼지도 몰라.’

그러니 잘 사리면 괜찮을지도……?

뒷걸음치다 얼떨결에 쥐를 밟은 격의 추론이었다.

“빨리빨리 가자…….”

헌터가 목을 뚜두둑 돌리며 스트레칭했다.

그를 향해 이하늘이 시선을 옮기는 찰나.

터엉,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자잘한 충격파가 퍼졌다. 화들짝 놀란 이하늘은 두 귀를 막았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눈 깜짝하기도 전에 방독면의 사람이 사라졌다. 대신 그가 서 있던 땅바닥.

거기에 자글자글한 금이 가 있다.

설마, 땅 좀 박찼다고 저렇게 된 거 아니지?

‘머리로 장난치는 자’가 나직하게 말했다.

【쫓자.〗

“네? 어디로 간 줄 알고요?”

【내가 그것도 모를 것 같으냐.〗

아, 넵. 신적 존재시죠.

이하늘이 포기하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저는 저 헌터만큼 못 달려요. 애초에 저는 일반인이고…….”

【어쩔 수 없군. 망할 운영자, 내 이번만 도와주마.〗

네?

“뭘요? 아니, 괜찮아요. 됐어요. 안 해도 돼요. 저 그냥 여기서 성신님 말만 타이핑할게요.”

뭔가 불길함을 느낀 이하늘이 여러 번 말을 보태며 거절했으나 검은 그림자, ‘머리로 장난치는 자’는 그녀에게 다가올 뿐이었다.

본능적으로 움찔한 이하늘이 뒷걸음쳤다.

그 모습에 우습지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치는 ‘머리로 장난치는 자’.

【어지럽다고 토하거나 눈물을 쏟아내도 소용없을 것이다.〗

“네?”

【어지러워도 버티란 소리야.〗

“무슨 개소…….”

와락.

제대로 대답하기도 전에 ‘머리로 장난치는 자’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어?

순식간에 지지직거리는 검은 그림자에 안기게 된 이하늘. 기우뚱 뒤로 쏠리는 무게중심에 혹시나 떨어질까 본능적으로 성신의 목을 안아버렸다.

‘아니, 잠깐마…….’

돌연 쏜살같은 바람이 머리와 온몸을 스쳐 지나갔다.

‘아니, 바람이 부는 게 아니야.’

겨우 벌어진 시야에 뭉개진 것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배경.

이하늘은 혀를 깨물지 않게 이를 악물며 콱 그림자를 붙들었다.

‘이 성신이 미친 것처럼 빨리 달리는 거야!’

그랬다. 성신, ‘머리로 장난치는 자’는 달렸다. 자신의 언약자를 쫓기 위해, 격에 맞지 않는 아아주 무식한 방법을 골랐다.

성신은 금세 헌터를 따라잡았다.

헌터는 방독면을 쓰고 달리면서도 숨이 가쁘지 않은지 평온해 보였다.

성신에게 짐짝처럼 들린 이하늘은 숨을 헐떡이는데 말이다. 심지어 멀미가 나서 속이 메슥거리기도 했다.

“꺄아아아악!”

그 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때마침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리는 길 앞이라 헌터는 비명이 들려온 왼쪽으로 발을 틀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헌터가 우뚝 발을 멈춰 성신 역시 덩달아 멈췄다.

어딘가를 보는 헌터,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지금까지 메슥거렸던 건 아무런 문제가 아니게 될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있다.

거인이 만든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넓은 통로를 꽉 채운, 커다란 무언가.

뾰족한 귀 두 개, 얼키설키 뒤섞인 더러운 털과 꼬리. 뒤태만 보였지만 알 수 있었다.

‘늑……대? 늑대 맞지?’

늑대치곤 경악스러울 정도로 컸으나 지금 그게 대수가 아니다.

늑대인지 뭔지 모를 짐승 앞에 쓰러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째선지 스스로 입을 틀어막고 꼼짝도 안 했다.

“민간인이에요!”

헌터가 자신을 볼 수 없으니 목소리 역시 들릴 리 만무한 걸 알 텐데도 이하늘은 소리쳤다.

【식인 늑대로다. 보아하니 우두머리는 아니군.〗

‘머리로 장난치는 자’가 중얼거렸다.

본인에게 하는 말이 아니란 걸 찰떡같이 알아들은 그녀는 ‘머리로 장난치는 자’에게 안긴 채로 빠르게 타자를 쳤다. 손을 아무 데나 뻗어도 키보드가 생겼기 때문에 무리는 없었다.

〔식인 늑대로다. 보아하니 우두머리는 아니군.〕

〔라고 ‘머리로 장난치는 자’가 말했어요.〕

“그딴 건 나도 알아.”

신랄하게 대답한 헌터가 갑자기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야, 이 개×끼야!”

흡사 아파트 단지에서 개와 싸우는 유명한 아저씨처럼 소리를 질렀다.

“…….”

아니, 저기, 헌터님. 당신이 아무리 헌터라 해도 상대는 집보다 커다란 짐승인데요. 그렇게 도발을 해버리시면 어떡하죠?

뭣보다 개도 아니고 새끼도 아닌 늑대인…….

쿵―

그때 소리가 울리면서 땅이 흔들렸다.

이하늘은 눈을 여러 번 깜박이며 다시 앞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마주쳤다.

유연하게 몸을 돌린 그 늑대와.

‘아니, 저건…….’

이마와 기다란 주둥아리에 빽빽하게 차 있는 눈. 벌어진 입에서 떨어지는 굵직하고 더러운 침.

‘저, 저건 늑대……가 아닌데……?’

물론 개×끼도 아니다.

그저 괴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파랗게 질린 이하늘은 무심코 ‘머리로 장난치는 자’에게 꽉 매달렸다.

‘대체 이 헌터는 무슨 생각으로 저걸 도발한 거야? 내가 헌터였다면 그냥 뒤를 습격했을 텐데!’

그러나 ‘머리로 장난치는 자’의 생각은 이하늘과 다른 모양이었다.

몹시 흡족한 목소리로 그가 호탕하게 외쳤다.

【역시 내 언약자다! 좀 더 도발해서 단숨에 죽이거라!〗

이하늘은 또 반사적으로 그 말을 헌터에게 보내주었다.

헌터가 성신의 말이 못마땅한 것처럼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또 한껏 소리쳤다.

“야, 인마! 그 눈깔들 장식이냐? 뭘 꼬나보기만 하고 앉았어. 빨리 안 와?”

이하늘은 직감했다. ‘머리로 장난치는 자’만큼이나 저 헌터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