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아는 사람 중에 이렇게 탈색한 사람이 없기에 왜 익숙한지 의아해질 무렵, 그는 무언가를 떠올려냈다.
‘허, 죄, 죄송해요. 누가 갑자기 밀어서…….’
‘저, 일단 감사해요. 아까 도와주셔서…….’
아. 지하철에서 봤던.
임여명이 표정 변화 없이 깨달았다. 남에게 전혀 관심 없는 그가 스쳐 지나가듯 만난 사람을 기억해 내는 건 드문 일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던 임여명은 마지막 하나 남은 음료수 캔을 보다가 보호막을 톡톡 쳤다.
그 안에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의자에 폭 기댄 이하늘은 미동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는 패딩 속에 입은 후드티 모자를 끌어당겨 깊게 썼다. 그리고 물었다.
“누가 지명됐어요? 이 자리에서 접속한 거 보면 유성우? 아니면…….”
“최가영 헌터야.”
“E급에 최가영? 미친 거 아냐?”
“그러게. 근데 걱정은 마. 유성우 헌터가 곧 도착할 모양이거든.”
“그래요?”
그럼 최가영은 왜 부른 거지.
임여명은 건조하게 중얼거리고 모노클과 이어폰을 차례대로 착용했다.
임여명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건 이어폰을 꽂자마자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욕할 것 같은 얼굴로 옆자리의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됐고 레바브나 불러요. 이거 치우라고.”
살벌하게 말하며 발로 보호막을 툭툭 친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 같았다.
이어폰을 매만지던 임여명은 이세현에게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라는 손짓을 했다.
정말, 귀염성이란 조금도 없는 믿음직한 부하라니까.
이세현은 그의 뜻대로 관심을 거두었다.
반면 임여명은 짜증스레 말했다.
“아니, 궁금하지 않고요. 레바브나 부르라고요. 못 들었어? 유성우도 그쪽으로 간다잖아. 신입한테 둘이나 맡길 수 없으니 내가 끼어들겠다고요.”
잠시 침묵하던 임여명은 얼마 안 가 신랄하게 굴었다.
“뭐라는 거야. 내가 타자 실력 키우든가 다른 성신처럼 말로 하든가 하랬지. 빨리 이거 치워, 나도 접속하게.”
임여명의 말이 끝맺어지는 순간, 센터 내부에 있는 모든 이에게 커다란 레바브 창이 두둥 떴다.
〔ㄴ,한테망 머라 ㄱ,래 ㅠㅠ!!〕
〔나도 닿른 세게 살퍄보느라 밥브다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레바브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레바브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º º º
망했다.
게이트에 휘말린 운영자들이 최가영 헌터에게 잡히면 × 된다.
왜냐하면 14일 동안 격리당해서 안정을 취해야 하니까.
혹시 게이트에 휘말리면 어쩌나 하고 먼 옛날 복지에 대해 찾아봤기 때문에 이하늘은 안다.
그 복지를 누릴 혜택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이유가 뭐였더라?’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시스템 운영자 중 넷씩이나 붙잡힐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 넷이 만일 잡힌다면…….
‘백퍼 야근이야. 아니, 미친. 이 중요한 걸 왜 안 알려줘?’
알려줄 틈이 없었다. 이하늘의 속마음을 대표 둘이 들었다면 꽤 억울했을 거다.
이하늘은 입술을 깨물었다.
야근이라는 늪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최가영 씨를 막읍시다!”
【네가 무언데 감히 내 언약자를…….〗
“뭐긴 뭐예요. 입사 첫날부터 야근하고 싶지 않은 시스템 운영자지! 물론 아직 근로계약서를 쓰지는 않았지만.”
여태껏 성질을 죽였던 이하늘이었건만 야근 앞에 장사 없다고, 그녀의 입이 해방됐다.
“우리가 먼저 네 분을 찾는 거예요. 최가영 씨보다 더 빨리. 그리고 뭔갈……. 뭔갈 어떻게 잘해서 숨는 게 낫겠어요.”
【이 망할 운영자. 내 언약자가 알아서 해줄 터이니 내버려 둬라.〗
“네에, 그래요. 알아서 14일 동안 복지 누리게 해주시겠죠! 무려 공무원이신데!”
이하늘은 흥분해서 상대가 고귀한 별님이란 사실을 잊어버리고 소리쳤다.
하찮은 존재가 이를 드러내는 광경을 응시하다가 성신이 그제야 이하늘을 내려놨다.
【난 언약자를 쫓을 것이다.〗
그렇게 ‘망할 언약자’라고 부를 땐 언제고, 마치 언약자 없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성신.
그에게 이하늘은 조용히 속삭였다.
“성신님. 굳이 곁에 있지 않아도 언약자님 볼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최가영 씨에게 하는 말 다 찍어 보낼 테니까 우린 다른 운영자님들 찾아요.”
말 그대로 아주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존재다.
이하늘의 말대로 굳이 쫓지 않아도 언약자가 제 손바닥에 있는 것처럼 언제나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볼 수 있을 터.
“잘 모르겠지만, 성신님이 여기에 있는 것처럼 보여도 어딘가에서 변함없이 언약자를 ‘내려다보고’ 계실 거잖아요. 맞죠?”
【과연…….〗
랩하는 것처럼 내뱉는 이하늘의 말에 ‘머리로 장난치는 자’가 읊조렸다.
과연?
이하늘은 약간의 긴장이 온몸에 맴도는 것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과연 레바브가 선택한 자로다. 눈치가 악귀처럼 빠르구나. 머리에 든 것이 없어 하나를 모르는데도 열을 눈치채니.〗
이 망할 성신이.
하마터면 입사 첫날부터 상사, 아니 저 노오오옾이 위치한 병, 아니 별신에게 욕할 뻔했다.
이하늘이 작게 투덜거렸다.
“말 좀 그렇게 하지 말아요.”
【허나 운영자. 언약자가 아닌 네 말을 따라주면 내게 무슨 이득이 있느냐.〗
“어…….”
대놓고 성신이 뭘 해줄 거냐고 묻는다. 이하늘이 말끝을 흐리다가 미간을 좁혔다.
“그냥 좀 해주면 안 돼요? 고귀한 존재시니 이 정도는 껌이잖아요.”
비행기 태워주는 말이었지만 반쯤 비아냥거리는 어조기도 했다.
너무 겁대가리 상실한 채 말한 건가 싶어 이하늘이 잠시 입을 다물었을 때.
성신이 시원하게 웃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인간 같으니. 좋다! 내 네가 마음에 들었다. 기념으로 네 말을 친히 따라주마. 무얼 해주었으면 하지?〗
인간 취향이 독특하신지 흔쾌한 수락이 떨어졌다. 이하늘은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대꾸했다.
“거창할 건 없고요. 최가영 씨보다 먼저 운영자님들을 찾으면 돼요. 빨리 가요!”
이하늘이 당연하다는 듯이 ‘머리로 장난치는 자’에게 팔을 뻗었다.
‘머리로 장난치는 자’ 역시 자연스럽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응?’
이상함을 느낀 건 비단 이하늘뿐만이 아닌지 ‘머리로 장난치는 자’가 혀를 찼다.
【이 망할 운영자는 내가 무슨 탈것으로 보이는 모양이로다.〗
“죄, 죄송해요. 다음에는 제가 업어드릴게요. 자, 빨리 한 바퀴 돌아서 운영자님을 찾자구요!”
멋쩍어진 이하늘이 괜히 큰 소리를 냈다. 그러자 성신이 헹, 하고 코웃음을 날렸다.
【뭣 하러 오래 걸리게 한 바퀴를 도느냐. 위에서 보면 되는 것을.〗
그게 무슨 뜻?
이하늘이 말뜻을 파악하기도 전에 성신이 무릎을 굽히고는 쾅, 하고 바닥을 찼다.
쌔애애애액, 거센 바람과 중력이 정수리를 마구 내려쳤다.
‘우와아아아악, 미친. 이게 뭐야!’
자이로드롭. 인간을 태워서 갑자기 위로 솟구치는 놀이기구. 그것을 타기라도 한 것처럼 배 속이 난리가 났다.
메슥거림에 구역질이 나기 일보직전, 갑자기 바람이 그치고 허공에 우뚝 멈춘 듯해 이하늘은 눈을 떴다.
“허…….”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분명히 아주 거대하게 보였던 미로가 개미굴처럼 자그맣게 보였으니.
‘미로가 이렇게 컸단 말이야?’
이 넓은 곳에서 운영자 넷을 무슨 수로 찾지?
생각하다 말고 그녀가 대뜸 성신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 근데 떨어지겠어요!”
높게 도약해 허공에 잠깐 멈췄으니 남는 건 추락뿐. 이하늘은 아연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추락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하늘은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멍청한 것. 추락할 거면 왜 위로 올라왔겠느냐? 도통 멍청한 건지 똑똑한 건지 알 수가 없군.〗
아……. 옙!
아주 자연스럽게 순리와 이치를 무시하시는군요.
도약했고 어디에 오르지 않았으니 떨어질 거라 생각한 제가 멍청입니다, 성신님.
성신이 손을 뻗었다.
【저기에 셋.〗
그리고 반대편에 손을 또 뻗는다.
【저기엔 하나가 있구나.〗
“어, 와. 금방 찾으시네요. 저는 안 보이는데…….”
【쯧, 보지도 못하는 이 운영자를 얻다 쓰면 좋을꼬.〗
“어디부터 갈까요? 가까운 곳이 어디예요?”
성신의 신랄한 말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이하늘이 대충 넘어가며 묻는 그때였다.
성신, ‘머리로 장난치는 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내 언약자가 아주 빠른 속도로 너의 동료에게 가고 있구나. 역시 내 언약자다! 아주 빨라!〗
이 망할 성신님이?
지금 한가롭게 칭찬이 나오나요?
이하늘이 외쳤다.
“빨리 그쪽으로 먼저 가요!”
재차 말하지만 ‘머리로 장난치는 자’는 위대한 존재시다.
즉, 한 발자국 내딛자 공간을 뛰어넘는 것처럼 휙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란 소리다.
‘이럴 거면 위로 도약은 왜 했대. 그냥 이동하지.’
따지고 싶었으나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