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 멸망을 굳이 막아야 하나요 (22)화 (22/90)

<제22화>

시스템 운영자에겐 크게 두 가지 업무가 있다.

하나. 화면에 떠오르는 문장을 타이핑해서 헌터에게 보내기.

둘. 성신과 대화하며 언약자에게 말을 전달하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신입인 이하늘에겐 타이핑 업무만 주어졌다.

즉, 그녀의 업무량은 함께 일하는 다른 야간 조에 비해 적었다는 뜻.

‘그런데도 이렇게 정신적으로 피곤하니.’

이하늘은 지긋지긋한 눈초리로 타이핑해야 할 문장들을 노려봤다.

타다다다다, 탁.

〔축하합니다! 레바브 시스템에 선택되어 각성자가 되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설정> FAQ를 확인 바랍니다.〕

그것 아는가? 대한민국엔 헌터가 너무 많다.

타다다다다닥, 탁.

〔코어 습득 완료!〕

〔코어를 정화하거나 파괴할 수 있습니다.〕

〔코어 파괴를 선택하여 지금부터 30초 후, 게이트는 폐쇄됩니다.〕

그럼 그것도 아는가? 그 많은 헌터가 매일매일 게이트를 닫아가며 열심히 살아간다.

그리고 그 열심히 일하는 것 때문에…….

타다다다다다다닥, 탁!

〔축하합니다! 특성, ‘내로남불(일반)’이 발현되었습니다.〕

시스템 운영자가 죽어가고 있다.

그랬다. 헌터가 무언가를 하거나 발전하면 그때마다 그 사실이 화면에 떴는데, 그걸 재입력해서 메시지 창으로 알려줘야 했다.

신체에 피로가 쌓이지 않는다는 능력이 없었다면 지금쯤 손목은 갈라지고 눈에선 피눈물이 쏟아졌으리라.

‘이걸 내가 1년 동안 할 수 있을까?’

1년을 우습게 본 이하늘이 열심히 손가락을 놀리다 말고 슬쩍 옆을 바라봤다.

“하……. 나야 모르죠. 나는 일개 시스템 운영자라서.”

임여명이 그녀처럼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며 어느 성신과 신랄하게 대화하고 있다.

커다란 화면 아래에 존재하는 다섯 자리.

자리 한 곳당 주간 조와 야간 조가 한 명씩 등록돼 있었다. 이하늘이 입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임여명은 홀로 자리를 써왔지만 이젠 아니다.

덕분에 지난 보름간 이하늘은 임여명과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있었다. 그 기회에 친해졌느냐 물어본다면 전혀 아니었지만.

‘그나저나 대체 언제 쉬는 거야?’

휴식 시간을 갖는 이하늘과 달리 임여명은 좀처럼 쉬지 않았다. 잠도 원체 없는지 센터에 머무는 동안 자는 꼴을 보지 못했다.

아주 가아안혹 쉬어야겠다며 자리를 떠도 30분도 안 돼서 돌아오곤 했다.

‘다른 야간 조님도 돌아가며 쉬는데. 괴물인지 뭔지.’

“하…….”

그때, 임여명이 한숨을 쉬며 손을 돌연 멈추고 눈가를 문질렀다.

그럴 리 없단 걸 알면서도 이하늘은 속마음을 들킨 줄 알고 움찔했다.

다행히, 그리고 당연히 그녀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살벌하게 말했다.

“언약자가 휴가 내내 누나 찾는 게 안쓰러운 거 알겠는데, 그만 징징거리시죠. 예? 뭘 계속 도와달래. 내가 어떻게 도와.”

‘와, 성신이랑 말싸움까지 해.’

본인의 미래라는 걸 모르고 이하늘은 감탄하며 임여명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들려온 게 맞다.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힘숨찐 켜서 이 헌터한테 누나가 있단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뭘 어떻게 도와요. 아니, 하……. 그래. 관심 없어. 하나도 없어. 누나가 있든 없든 내 알 바 아니니까 입 다물어, 제발. 2주 동안 지겹지도 않아? 입 안 아파? 아니. 시끄러워. 뮤트해 버리기 전에 입 닥, 아니 아까부터 신입은 왜 찾…….”

‘신입? 나?’

“야간 조들아, 우리가 돌아왔다! 교대하자!”

임여명이 막 폭발하기 직전, 천사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이하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통로에 후광이 비치는 주간 조들이 보였다.

‘드디어! 드디어 주간 조가 돌아왔어! 당장 퇴근은 못 하지만! 주간 조가 돌아왔다고!’

“어, 안녕하세요! 저 ‘돈많은백수가꿈’이에요……!”

주간 조 넷 중 하나가 이하늘에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지난 2주 동안 이하늘은 업무만 한 게 아니다.

정식으로 시스템 운영자가 되자마자 레바브 시스템이 혜택으로 준 시솝 커뮤니티의 기능 중 하나.

톡방에 초대받았다.

덕분에 주간 조 직원들과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이하늘은 상대가 ‘돈많은백수가꿈’이라고 본인을 소개해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누군지 알았으니까.

“교대하러 왔으면 빨리 교대해! 네 파트너 나거든요?”

끝자리에 앉은 ‘박하사탕’이 까칠하게 소리쳤다. ‘돈많은백수가꿈’이 까딱 인사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이하늘은 바로 고개를 돌려 임여명을 바라봤다.

“저, 임여명…… 씨. 주간 조 오셨는데 퇴근…….”

“아니, 멍청아! 경찰에 실종 신고했으면 믿고 기다리라니까. 같은 말 반복하게 할래? 너 머리 없어? 진짜 멍청이가 된 거야, 뭐야.”

이하늘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친하지 않은 상대가 당장 화를 내고 있는데 건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모르겠다……. 퇴근하고 싶다…….’

이하늘이 나직하게 속삭이며 타이핑을 이어 나갈 때, 누군가가 그녀와 임여명의 어깨를 잡았다.

“여명아! 그리고 하늘 씨!”

누군가 했더니 야간 조 대표, 이세현이었다.

그녀 역시 2주 동안 퇴근도 하지 않고 일했던 사람이었으나 하이레처럼 말끔했다.

“두 사람 퇴근해요!”

“예?”

“네?”

성신과 말싸움하던 임여명의 반응이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이하늘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2주 동안 고생했잖아요? 어서 퇴근해요!”

“하, 하지만 이 대표님. 저는 주간 조인데…….”

원래 주간 조 넷, 야간 조 다섯이었으니 이하늘은 자연스럽게 주간 조가 되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반박하자 이세현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퇴근해요! 대표로서 명령입니다!”

세상에.

저 하늘의 별인지 신인지, 하여간 성신들과 대화하는 직업을 가진 이하늘. 그녀는 생각을 달리했다.

진정한 별, 진정한 신은 일찍 퇴근하라고 말하는 상사라고.

전달 사항이 더 없는지 이동하려던 이세현이 잠깐 멈칫했다.

“아, 맞아. 하늘 씨. 이번에 고생한 만큼 야간 조에게 내일부터 2주 휴일을 줄 거예요.”

그것참, 주간 조에게 끔찍한 말이었다. 주간 조가 앞으로 2주 동안 철야 근무한다는 말을 돌려 한 거니까.

‘그래서 주간 조들도 필사적으로 헌터에게 안 잡히려고 했던 거구나. 2주 야근이 되돌아오니까.’

이하늘이 납득하는데, 뒤이어 흘러나오는 이세현의 말이 아리송했다.

“그런데 하늘 씨, 내일 하루만 더 출근할래요?”

“네? 내일 하루만, 이라뇨?”

“하늘 씨가 주간 조긴 하지만 똑같이 2주 휴일 줄 거거든요. 대신 내일 하루만 더 출근해요. 2주 동안 인수인계 없이 일했잖아. 내일 인수인계받읍시다.”

아하.

이하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현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어서 퇴근하라고 이하늘과 임여명의 등을 밀어댔다.

무려 2주 만의 퇴근이었다…….

몇 분 먼저 퇴근한 야간 조 넷은 이미 없었다.

덕분에 이하늘은 임여명과 단둘이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

당연하지만 근무하는 내내 너무 바빠 그와 그럴듯한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없다. 즉, 이 어색하고 껄끄러운 분위기를 타파할 이야깃거리가 없다는 뜻.

2주 전만 해도 존재했던, 그와 잘 지낼 수 있을 거란 근자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 저번에 음료수 준 거 잘 마셨다고 말이나 할까?’

전광판 숫자가 내려가는 걸 보다 말고 이하늘은 임여명을 흘깃거렸다.

센터에 여분의 옷이 갖춰져 있어서 그는 첫 만남 때와 달리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되게 피곤해 보이네. 하긴, 그럴 만도. 잠을 거의 안 잤으니.’

심지어 밥도 그녀보다 형편없이 먹었다.

젤리, 커피, 커피, 젤리, 커피커피, 젤리젤리.

‘그래도 나는 11일 차까지는 밥도 먹고 샌드위치도 먹고 그랬는데…….’

“할 말 있어요?”

훔쳐보고 있단 걸 어떻게 알았는지 눈 감은 채 벽에 기대고 있던 임여명이 까칠하게 물었다.

이하늘은 펄쩍 놀라 고개를 저었다가 그가 눈을 감고 있단 걸 깨닫고 목소리를 냈다.

“아, 아뇨?”

띵.

그 순간,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렸고, 레바브 시스템 센터의 오묘한 공간이 아닌 평범한 사옥의 1층 로비가 보였다.

이하늘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가방을 고쳐 매는 시늉을 하다가 어깨에 가방이 없단 걸 깨닫고 불현듯 기억해 냈다.

2주 전에 소매치기당한 현실을.

‘아, 맞다. 나 휴대폰 어떡하지?’

2주 동안 너무 바빠 휴대폰이 없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휴식 시간이 주어지면 기절하듯 잠을 자고, 일어나면 바로 일을 했으니.

이하늘은 당장 자신의 통장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가늠했다. 그 돈으로 휴대폰을 못 살 것도 없었다.

‘요즘 휴대폰이 얼마 하더라.’

“음침하게 알아낸 게 아니라 어쩌다 이 대표한테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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