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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멸망을 굳이 막아야 하나요 (23)화 (23/90)

<제23화>

막 사옥에서 나가려고 문을 열려는데, 불쑥 뒤편에서 낮은 목소리와 함께 손이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그녀보다 한 발 앞서 문을 열다가 멈춘다.

덩달아 멈춘 그녀의 등에, 몸이 닿았다.

“올해 24살이라던데. 맞아요?”

잠깐 굳은 이하늘이 고개를 돌렸다. 손의 주인, 임여명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 가까이서.

“어……. 네, 맞아요.”

혹시 내가 어리니까 지금 말 놓겠다고 그러려는 걸까?

이하늘은 임여명의 뒷말을 예상하며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여러모로 예상 밖이었다.

“나도 24살이야. 동갑이니까 말 놔.”

“……어?”

“그러니까 임여명 씨라고 부르지 말고 편하게 불러. 그렇게 불리는 거 낯간지러워서 안 좋아하니까.”

‘아까 임여명 씨라고 부르는 거 들었구나……!’

성신과 말싸움하느라 못 들은 줄 알았는데.

이하늘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살짝 충격받았다.

‘시스템 운영자……. 모두 10년 전에 고용됐다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임여명은 14살 때부터 일한 게 된다.

“안 나와?”

놀라운 사실에 멍을 때린 사이 임여명은 이미 밖으로 나간 후였다. 그가 문을 잡고 기다리고 있길래 이하늘은 재빠르게 나갔다.

첫 만남이 지하철이었듯이, 당연히 둘의 가는 방향은 같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처럼 어색한 침묵 속에서 이동할 줄 알았으나 의외로 대화가 이어지긴 했다.

업무 이야기였지만.

“두 대표는 몇이나 담당하는지 몰라도 우리는 자리마다 성신 다섯을 담당해. 너랑 내가 맡은 성신은 알다시피 머장, 남태, 쓰레기, 잠만보, 멍청이.”

‘분명 그런 이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하늘은 태클을 거는 대신 퇴근할 때부터 궁금했던 사실을 털어놨다.

“그런데 내일부터 우리 둘 다 쉬어버리면 그동안 그 다섯 성신은 누가 맡아?”

“누구겠어. 대표들이지.”

시큰둥하게 말한 임여명이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문질렀다.

“그리고 당분간 넌 타이핑 업무만 할 거야. 그 다섯이랑 대화하는 건 좀 더 익숙해지면…….”

그때였다.

뒤편에 어느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와락 어깨동무했다.

“뭐…….”

갑작스러운 접촉이라 이하늘에게서 황당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곧 잠잠해졌다.

목 근처에 날카로운 것이 닿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임여명도 해당됐다. 고개를 막 돌리려다 멈춘 이하늘은 임여명의 목 근처에 닿은 짧은 칼을 보고 숨을 삼켰다.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춘 두 사람에게 어깨동무한 사람이 명령했다.

“어어, 긴장하지 말고. 움직여, 움직여. 저어기 버스 정류장까지.”

‘이게 무슨…….’

황당했지만 무기를 쥔 괴한에게 반항할 수는 없는 법. 두 사람은 거의 떠밀려서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사람은 없었다.

“둘 다 폰 버려.”

괴한이 또 명령했다.

임여명이 한숨을 내쉬며 패딩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하지만 이하늘은 할 수 없었다. 이미 휴대폰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남자가 칼을 이하늘 목에 가까이 댔다.

“안 버려?”

“저기, 정말 죄송한데요. 제가 이미 휴대폰이 없어서요.”

“웃기는 소리하고 앉았네. 그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애? 어?”

“정말이에요. 도둑맞았다고요.”

“내가 뒤져봐?”

그건 싫었다. 범죄자 손이 몸에 닿는다 생각하니 피가 식었다.

눈에 띄게 창백해진 이하늘이 필사적으로 패딩 주머니를 까뒤집었다.

“보세요,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잖아요……!”

사실 레바브의 모노클과 이어폰이 있었으나 투명화된 상태라 보이지 않을 거다.

그래도 괴한은 쉽사리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지 급기야 이하늘에게 손을 뻗는데.

“헌터가 민간인 상대로 이러면 불법인 거 알고 이래요? 아, 모르니까 잘도 이런 멍청한 짓을 하는 거겠지.”

느닷없이 임여명이 한심해 죽겠다는 목소리로 괴한의 속을 긁었다.

괴한이 곧바로 이하늘에게 쏠렸던 관심을 임여명에게 돌렸다. 그녀에게 닿을 뻔했던 손 역시.

“죽고 싶지 않으면 닥쳐라, 애새끼야.”

괴한이 당장이라도 목을 그어버릴 것처럼 칼을 덜렁였다.

그 광경에 이하늘의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막상 어그로를 끈 당사자 임여명은 아무렇지 않아 했다. 심지어 괴한을 개무시했다.

관심을 끌려고 한 게 다였다는 듯이.

‘설마 나…… 때문에 도발한 건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고마운 일이지만 무모했다. 흉기를 든 사람을 긁었다가 괜히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는가.

‘그보다…….’

이하늘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람 헌터였어?’

2주 전에 가방을 훔쳐 간 헌터가 떠올랐다. 2주 전에도 그렇고, 헌터 새끼들이 왜 민간인 상대로 지랄을 하는지 모르겠다.

‘역시 헌터란 것들은.’

이하늘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초조하게 눈을 굴렸다.

‘신고해야 하는데.’

신고는커녕 넌지시 도움을 청할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건 무심하게 도로 위를 쌩 달리는 차와…….

이쪽으로 오는 버스뿐.

괴한이 고갯짓했다.

“지금 오는 버스 타.”

그 말을 듣고 이하늘은 직감했다.

오늘 하루가 길 거라는 것을.

º º º

“야. 저거. 저 노란 머리.”

그 시각, 삼성동의 어느 사옥 옥상에서 길거리를 감시하던 청년 둘이 있다.

그중 아이스 아메리카노(아아)를 마시던 하나가 머어얼리 떨어진 길가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뜨거운 아메리카노(뜨아)를 마시는 상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맞지 않아? 단발에 금발!”

“저게 금발이야? 백발 아냐?”

“그래도 알리자. 비슷하게라도 생겼으면 보고하라 했잖냐.”

그것도 맞는 말이라 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우리 왜 등반에서 제외되면서까지 사람 찾아야 하는 거야?”

“몰러. 길마 형이 명령한 거니까 잔말 말고 해. 음, 형은 지금 등반 중일 테니까…….”

아아가 휴대폰 전화 목록을 뒤졌고, 곧 원하는 전화번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길마 형의 의뢰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뜨아가 턱짓으로 아아의 휴대폰 화면을 가리켰다.

“근데 그 사람 대체 누구?”

“몰러.”

“저 여자는 또 누구고?”

“몰러, ×발. 그 질문하는 버릇 좀 고치면 안 되냐? 어, 어? 잠깐. 저 남잔 또 누구여.”

아아가 통화 버튼을 누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뜨아가 커피를 음미하며 마시다 말고 어깨를 으쓱이며 아아의 말버릇을 따라 했다.

“몰러.”

두 사람의 각도에선 금발 머리의 뒷모습밖에 안 보였다.

다시 말해 갑자기 끼어든 남자 역시 뒷모습밖에 볼 수 없었다는 소리다.

“뭐야……. 어, 여보세요? 아, 저기, 안녕하세요. 저, 길마 형의……. 아, 넵. 다름이 아니고 방금 찾는 사람과 비슷한 사람을 발견했거든요? 아, 여기 서울이요. 서울 삼성동. 옆에 웬 남자 하나가, 아니 지금은 둘인데. 하여간 있던데요. 어, 지금 버스 정류장에 가려져서 안 보인……. 네? 정확히 어딘지 말하라고요? 삼성동…… 주소를 말하면 되나요? 아, 좌표, 좌표 찍으라고. 어? 지금 버스를 타는데요?”

아아가 멍청하게 말하다 말고 눈을 찌푸렸다.

“뭐여, 미친. 방금 칼 아녔냐?”

금발 머리 여자를 태운 버스는 금방 출발했다.

싸늘한 침묵이 돌았다. 아아는 순간 상대가 전화를 끊은 줄 알고 휴대폰을 뗐다가 나직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다시 귀를 붙였다.

“뭐라고요?”

―새끼야, 좌표 찍어 보내라고!

“예? 다짜고짜 새끼라니. 아니, 어, 저희가 쫓는 게 낫지 않을까요? 지금 부산이시라면서요. 당장 못 오실 텐데.”

후우, 휴대폰 너머에서 한계점에 도달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곧이어 가슴 끝부터 울리는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못 가는 곳은 없어, 당장 말해.

º º º

사실 10년 전 재앙 이후로 헌터가 생기면서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일반인과 차이가 생긴 신체 능력으로 범죄를 일으키는 헌터가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관리국이 세워지고 특수진압과가 생겼다.

일반인에게 주먹을 휘두르거나 협박하는, 이른바 불법 헌터를 잡아 족치기 위해서.

그곳에서 둘째 가는 선도자, 최가영은 오늘도 불법 헌터를 잡기 위해 책상을 내리쳤다.

“아니, 시대가 어느 때인데 버스 승객들을 인질 삼는 거야. 원하는 게 뭐래?”

“지금 교섭 중입니다.”

“이바우는 지금 어디 있어?”

“연락이 안 됩니다.”

“아, 제일 필요한 새끼가 아직도……. 그 망할 휴가 다 끝난 거 아녔어?”

“오늘부로 끝났습니다만 연락이 안 되네요.”

“그럼 유성우는?”

최가영이 다른 타깃으로 화살을 돌렸다.

사무적으로 계속 대답하던 남자 대신 머리를 쫑쫑 묶은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마포구에 게이트 터져서 그거 닫으러 갔어요.”

“요즘 게이트 닫겠다고 지원하는 길드들 없대? 왜 계속 우리를 시키고 지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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