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좀 봐주라. 곧 이 게이트 닫으러 다른 헌터들이 올 텐데 나 걔네 방해하러 가야 한단 말야. 근데 내가 멀티플레이가 안 돼서 너까지 상대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좀 얌전히 있어주거나 순순히 기절해 줬으면 좋겠는데.”
남자가 보란 듯이 야구배트를 허공에 후웅 휘둘렀다.
그러다가.
“아, 혹시 네 누나가 걱정돼서 그래?”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주제를 거론하고야 말았다.
저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지금, 지금 저 자식이 이하늘 얘기를…….
이활이 되묻지도 못하고 남자를 응시하자 그가 야구배트 끄트머리를 바닥에 푹푹 찔렀다.
“네 누난 걱정 마. 내가 음……. 그래. 악마를 좀 다룰 줄 알거든?”
“…….”
“너 계속 힘숨찐 상태로 있겠다고 약속하면 소악마보고 네 누나 건드리지 말라고 재설정, 아니 전해줄게.”
“…….”
“아, 물론 거절하면 그 반대가 될 거야. 무슨 소린지 알지?”
“…….”
“아오, 이 새끼도 내가 백 마디 하면 한마디만 하는 새끼인가.”
소악마.
‘악의 지하굴’에 서식하며, 언제나 분노에 차 있어 자신보다 작은 인간을 발견하면 가차 없이 삼지창으로 찔러 죽이는 몬스터.
그러니 악마를 다룰 수 있다는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활은 이하늘을 생각해서라도 저 영문 모를 명령에 따라야 했다.
하나 이활은.
“아, 잠깐만. 크흡!”
난데없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하지만 막은 보람도 없이 웃음소리가 속수무책으로 새어 나왔다.
남자가 야구배트로 바닥을 쑤시다 말고 제 어깨에 툭 올렸다.
“뭐야. 왜 처웃고 지랄이야?”
“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악, 마를, 크흡, 다룬다고? 하아, 개웃겨!”
급기야 이활은 별 헛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대놓고 웃었다. 실성이라도 한 것처럼.
남자가 눈썹을 올렸다가 욕했다.
“썅. 악마 테이머 몰라? 데빌 테이머 모르냐고요.”
“아, 알지. 전 세계에 몇 없는 직업이잖아, 새끼야.”
데빌 테이머. 다른 것도 아니고 악마를 길들인다는 직업. 굉장히 희귀성이 높았다.
이활은 당연히 그 직업에 대해 알았다.
“응응, 잘 알지. 잘 알고말고.”
친한 친구를 대하는 양 이활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렇지만 남자가 듣기엔 단순히 상냥한 것이 아니었다.
저건 불쌍히 여겨서 나오는 동정의 투.
불쾌감으로 남자의 입가가 굳어갈 때, 이활이 겨우 웃음기를 잠재우고 정색했다.
그의 분위기가 변했다. 동시에, 떠돌던 공기의 흐름도 돌변했다.
이활이 힘을 숨기는 걸 관둔 탓이다.
남자가 황당해 목소리를 높였다.
“네 누나가 소악마한테 당해도 좋아? 힘숨찐 끄지 말라니까 내 말을 무시해 버리…….”
남자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앞에 있던 이활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앗, 할 틈도 없었다. 시야가 뒤집히더니 남자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악, 썅!”
욕을 뱉든 말든 남자의 뒤통수를 움켜쥐어 바닥에 처박은 이활이 중얼거렸다.
“내 뒤통수 때린 건 아무래도 좋아. 근데 건드릴 걸 건드려야지.”
좀 전까지 박장대소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스산한 목소리였다.
× 됐음을 감지한 남자가 한 번 더 협박했다.
“아니, 야! 당장 안 놓으면 소악마 시켜서 네 누나…….”
“그래, 악마를 다룰 줄 안다고?”
그의 말을 자른 이활이 낮게 비웃었다.
“우리나라에 데빌 테이머는 한 명밖에 없어. 아니, 한 명이나 있다고 해야겠지.”
이활의 말에 남자가 잠시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나야, 새끼야.”
“아, 그래? 이상하네. 내가 아는 한국 데빌 테이머는 나랑 똑같이 생겼던데.”
콰드득, 이활이 남자의 머리를 더 짓눌렀다.
이활의 말을 이해 못 했는지, 아니면 이해했는지 남자는 말을 더 하지 않았다.
“뭐, 아무래도 좋아. 내 뒤통수 후려갈긴 거? 네가 그 새끼 사칭한 거? 아무래도 좋다고. 알 바 아니야.”
이활이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리며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네가 나에 대해 아는 듯이 구는 것. 어떻게 알았나 ×나 궁금하긴 한데, 그것도 괜찮아. 관리국에 지하실이란 게 있거든? 거기서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지, 뭐.”
방법이 좀 과격하겠지만.
“그런데 왜, 하필, 그딴 식으로 날 협박했을까?”
“…….”
“왜 하필, 이하늘을 언급했을까? 왜, 내 화를 돋울까? 나에 대해 조사를 했으면 이딴 식으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아야 하는 거 아닐까?”
이활이 야구배트를 빼앗아 남자의 얼굴 바로 옆에 콱 박았다.
“대답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다. 아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참을성이 별로 없어서.”
“하……. 진짜 이렇게까진 안 하려 했는데.”
역으로 협박받고 있는 주제에 남자가 실실 웃었다.
태생이 여유로운 건지, 아니면 뭐가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인벤토리에서 뭘 꺼내려나?’
이활의 예상과 달리 남자는 당장 항복이라도 할 것처럼 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생뚱맞게, 그야말로 느닷없이 그대로 허공에 피아노 치듯 손가락을 굴렸다.
뭔가 수상함을 느낀 이활이 남자의 손을 붙잡으려는 순간.
키에에엑거리는 기이한 소리와 두두두두거리는, 그래, 발소리가 앞뒤에서 들려왔다.
“에이, 난 우리나라 데빌 테이머가 이공인 줄 몰랐지. 알았으면 구라 안 쳤어.”
여유 가득한 목소리를 배경 삼아 이활은 좋은 눈으로 앞뒤를 빠르게 훑었다. 저 멀리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소악마 떼가 보였다.
‘말도 안 돼.’
소악마는 이 굴을 정찰하는,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것.
즉, 떼를 지어 다니지 않는다.
지금 상황은 무척이나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 않은가?
이활은 아주 짧은 사이에 혼란에 빠졌다.
내가 헌터라는 걸 어떻게 아는가?
이하늘은 어떻게 아는 거지?
이공은 또 어떻게 알아.
저것들은 또 어떻게 한 거길래 떼를 지어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상황을 주도한 게 분명한 새끼가 제 아래에 있다는 거다.
이활이 다급하게 남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자폭하자는 거냐? 너만 손해야. 내 능력치는 또 모르나 봐?”
“일단 인정할게. 맞아, 나 데빌 테이머 아냐.”
결국 미쳤는지 지난 이야기를 꺼내 동문서답하는 남자.
이활이 말없이 이미 찌푸린 미간을 더 구기자 남자가 큭큭 웃었다.
“근데 어떻게 소악마를 여기로 불러들였을까아아요.”
“이거 완전, 미친 새끼 아냐…….”
“네 말대로 이러면 너만 멀쩡하고 나만 손해인데 왜 그랬을까아아요. 설마 여기서 도망칠 방법도 없이 무모하게 이랬을까아요?”
말이 끝나자마자였다. 갑자기 남자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사라지기 시작했다.
‘뭐야. 이동 스킬인가?’
의문은 늦었다. 벌써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손아귀가 텅 비었다.
거의 사라져가는 남자가 질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야. 다시 만나지 말자? 괜히 건드려서 뒈질 뻔했네. 형한테 따져야지, 이거 원……. 아니, 이 게이트는 또 어떡하냐. 아오, 되는 일 ×도 없고.”
“야!”
“그리고 인마! 내가 너보다 형이야, ×발. 어디서 반말을 띡띡…….”
진짜 어디 나사가 빠진 게 분명하다.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끝까지 지껄이던 남자는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이활은 어처구니없음에 헛웃음을 뱉으며 그대로 소악마 떼들에게 덮쳐졌다.
º º º
관리국 본부 피해수습과가 하는 일.
첫째, 게이트가 생성된 곳으로 바로 출동해 아직 피하지 못한 주변 민간인들을 대피시킨다.
둘째, 게이트 주변에 게이트 전용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전달받은 게이트의 등급과 유형이 틀림없는지 재감정한다.
셋째, 게이트를 폐쇄하러 온 공략대의 신원을 파악하고 브리핑한다.
넷째, 게이트가 닫혀 피해자를 무사히 구조하면 인적 사항을 받아 보호 센터에 안내한다.
보통 셋째까지 순조롭고 넷째부턴 피해자들이 협조해 주지 않으면 조금 삐거덕거리곤 했다. 그런데…….
‘첫째부터 이렇게 꼬이면 어떡하지?’
올해 1분기에 새로 들어온 피해수습과 1팀 신입은 앞에 펼쳐진 기이한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균열은 나타나는 위치가 제각기 다르고 크기도 다양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모두 타원형이라는 것.
그러나 신입 앞에 펼쳐진, 공간을 찢어 벌린 것 같은 균열은 타원형이 아니었다.
타원 두 개가 겹쳐진 것처럼 울퉁불퉁했다.
‘이건…….’
같은 장소에서 두 개의 균열이 동시에 나타나야 볼 수 있는 진귀한 풍경이었다.
‘이중 균열……!’
드문 현상이었지만 없는 일도 아니었다. 당황할 필요 없이 규정대로 일을 진행하면 끝. 그런데도 신입이 당황한 이유는.
근처에 있던 신입의 선배가 뒤를 돌아 외쳤다.
“팀장님. 신처과에서 들은 것과 달리 이중 융합 균열인뎁쇼. 아무래도 ‘언노운 게이트’인 것 같슴다!”
“오늘 무슨 날이라니?”
뭐라 중얼거리며 피해수습과 1팀장, 피연의가 휘적휘적 다가왔다.
“쯧, 레바브도 참. 어떻게 이걸 안 알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