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 멸망을 굳이 막아야 하나요 (36)화 (36/90)

<제36화>

이럴 수는 없다는 듯이, 이하늘의 눈이 텅 비었다.

“피해?”

“아니, 잠깐만…….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가면 맞을게.”

“피해?”

“아니, 나가면 맞겠다고!”

좋아하지도 않는 고구마를 몇 개씩이나 먹은 것처럼 답답해서 뒈지겠다.

일반인인 이하늘이 현재 헌터 상태인 자신을 때리면 뼈가 부러질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맞아준답시고 힘을 숨겨버리면 여섯 시간 동안 꼼짝없이 일반인 수준의 몸으로 이하늘을 지켜야 한다.

이활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데 비해 진정한 이하늘은 손을 내리고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히익. 이게 뭐야.”

드디어 말을 돌릴 수 있겠군.

이활이 바로 반응했다.

“그게 이제 보이냐?”

“뭐야? 헉, 소악마잖아.”

응?

지금 이하늘이 저 몬스터를 알아본 거야?

‘전엔 헌터한테 닉네임이 있는 것도 알더니. 뭐야?’

제가 알던 누나와 달라 이활이 이맛살을 구기는 와중에 이하늘은 이 상황을 정리했다.

거의 수백 마리는 되는 듯한 소악마의 사체.

피를 뒤집어쓴 이활.

제 피가 아니라고 버럭 외쳤던 남동생.

이 광경을 들켜서 무척이나 당황스럽다는 듯이 굴었던 모습.

“설마…… 아니지?”

이하늘이 중얼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검은 눈동자와 옅은 갈색 눈이 마주쳤다.

“……맞아?”

“……뭐가?”

“너…… 각성했니, 지금?”

누가 목을 조르는 것도 아닌데 숨이 턱 막히는 상황.

그 속에서 이하늘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던 레바브의 창이 뜬금없이 반짝 떴다.

〔ㅇ~ ㄷㅋㅂㄹㅈ? ㅎㅅㅉ ㅅㅎ ㄲㄴㅈ〕

왜 저래?

그래도 전에는 자음과 모음을 합쳐 한국어를 할 노력이라도 보여줬는데, 지금은 아무렇게나 막 친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무슨 의미인지 알았겠으나 이활이 우선인 이하늘은 눈을 찡그리며 레바보를 무시했다.

이하늘이 재차 물었다.

“아니면…… 원래 헌터였어?”

싸늘하다. 가슴에 의심이 날아와 꽂힌다.

이활은 지금 당장 혀를 깨물고 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혀를 억세게 깨물어봤자 잘리기는커녕 핏방울 하나 나지 않겠지.

각성자가 된 이후로, 아니 성신과 언약한 이후로 헌터일 땐 상처 하나 나본 적 없는 이활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헌터 기능을 도로 끄자!’

‘끄면 지금 어떡할 건데, ×발! 이하늘 어떻게 지킬 건데!’

‘그래도 들통나는 것보다 나아!’

‘그럼 지금 각성한 것 같다고 해. 그 자식이랑 나는 다르다고 말하면 되잖아!’

‘안 돼, 각성했다고 말하면 백퍼 날…….’

김이 나도록 돌아가던 이활의 머리가 차갑게 굳었다. 반면 주먹은 덜덜 떨렸다.

머릿속에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재생되었다.

‘너는 아니지?’

‘오빠처럼, 가버리는 거 아니지?’

‘각성자가 뭘……. 대체 뭘 구원했다는 거야?’

‘그냥 없어졌으면 좋겠어.’

9년 전, 정신을 차리니 이미 세상은 뒤바뀌어 있었다.

각성자가 되어서 축하한다느니, 당신과 언약을 바라는 성신이 있다느니 뭐라느니.

이활은 정신없이 쏟아지는 알림 속에서 문득 정신을 차렸다.

이제 죽어서 볼 수 없는 검은 정장의 사람은 말했다.

넌 헌터고, 등급 측정이 불가능하다. 최가영도 그러했으니 아마 너도 S급일 것이다.

스킬이 무어냐, 성신과는 언약했느냐, 성신 계승 스킬은 무엇이고 전투계냐 보조계냐 생산계냐.

알 수 없는 말의 향연.

거기서 이활이 그나마 알아들은 건 고작 몇 가지였다.

전 세계에 탑이 꽂힌 지 한 달 후, 균열이 열렸다. 거기에 휘말려서 살아 돌아온 자가 있다.

개중엔 시스템에게 선택받아 각성자가 되었다더라.

그중 하나가 너다. 너에겐 특별한 힘이 있고 우린 그게 필요하다.

입이란 게 있으면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지껄여보…….

말이 뚝 끊겼다. 시야에 들어왔던 배경이 변하고 다른 사람이 팔짱을 낀 채 설명을 이었다.

각성자를 등록해서 관할하는 관리국이 세워졌다. 이곳은 관리국의 지하실이다.

미안하다. 너를 속박한 이유는 폭주할지도 몰라서…….

당시 이활의 나이는 13살이었다.

어리지만 그렇다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걸 못 알아들을 나이는 아니었다.

이활은 차근차근 설명을 들으며 시스템에 닉네임 등록을, 관리국엔 각성자 등록을 마쳤다. ‘성신 언약’만을 무시한 채.

그때까지만 해도 이활은 조금 들뜬 상태였다.

아직 알 수 없는 것투성이지만, 세상은 변했고 저는 선택받은 사람이다.

아슬아슬하고 위태롭던 가족을 지킬 힘이 생겼다고 믿었다. 이하늘이 기뻐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갔더니 뭐가 반기고 있었지?

멀쩡했던 집이 폐허가 되어 있었다. 창문은 안 깨진 곳이 없고 누가 걷어찬 것처럼 현관문이 일그러지고 다 긁혔다.

철이 없어 여섯 명이 살기엔 좁다고 생각했던 집이, 황량하게 느껴질 정도로 넓어 보였다.

그 넓고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집에서, 이하늘은 1년을 혼자 지내고 있었다. 버티고 있었다.

그제야 이활은 깨달았다. 탑이 꽂힌 지 1년도 넘었다는 걸.

자신은 13살이 아니고 14살이며, 실종된 지 1년이 넘었다는 걸.

그리고 그 1년 동안, 이하늘은 혼자서 이 집을…….

비쩍 마른 몸, 어깨를 넘는 푸석한 머리카락. 힘없는 몸짓과…… 죽은 것 같은 눈동자.

이하늘은 1년 만에 돌아온 이활을 보고 물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울지 않고 물었다.

‘너는 아니지?’

뭐라 말하겠는가?

‘오빠처럼, 가버리는 거 아니지?’

대체 뭐라고 말하겠는가.

‘각성자가 뭘……. 대체 뭘 구원했다는 거야?’

짙은 원망과 배신감, 혐오가 담긴 말에.

‘그냥 없어졌으면 좋겠어.’

대체 뭐라고 답해야…….

차마 헌터가 됐노라, 관리국에 이미 등록을 마치고 돌아왔노라 말할 수 없었다.

여기서 자신이 각성했단 사실을 밝히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숨겨야 한다. 이 사실을 알리면 안 된다.

머릿속에서 비상이 걸려 붉은 빛이 어지럽게 점멸했다.

그때.

〔위대한 업적을 쌓은 당신의 소망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축하합니다! 특성, ‘힘숨찐(전설)’을 획득하였습니다.〕

〔특성, ‘힘숨찐’을 활성화합니다.〕

〔앞으로 여섯 시간 동안 비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성신인지 뭔지와 언약하라고 시끄럽게 굴던 시스템이 동아줄을 내려줬다.

또.

【숨기고 싶으면 숨기면 되고.】

【감추고 싶으면 감추면 되는 일.】

【네가 나의 유희를 책임져 주었는데 설마 이것도 못 해줄까.】

먹먹한 귓가에 진득하게 내려앉았던 말.

게이트에 휘말린 후 1년 동안 자신이 뭘 했는지 조금도 기억이 안 났지만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이활은 그렇게 이하늘에게 모든 것을 숨겼다.

9년이 지난 지금도, 가능하면 숨기고 싶었다.

하나의 거짓말 때문에 또 다른 거짓말을 낳을 땐 차라리 그만두고 싶기도 했지만…….

‘그럼 지금 그만두면 되겠네.’

‘그럴 수는, 여기서 허무하게 들켜버리면 분명…….’

‘아냐. 솔직하게 말하라니까. 나는 절대로 떠날 일이 없다고 해.’

‘이하늘도 그 말 믿고 기다렸다가 10년이 흘렀어. 내 말이라고 믿겠어?’

‘화내더라도 말할 기회가 왔으면 하는 게 나아!’

“잠깐.”

이하늘이 갑자기 손바닥을 들었다. 잠깐 대화를 멈추자는 뜻이었다.

이활은 멈출 수 없었던 사념을 겨우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이하늘이 설명 없이 등을 돌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임여명에게 톡이 온 것이다.

> 개인 | 새벽들

[ 1 ] 새벽들 : 헌터가 게이트 하나 닫고 막 지하굴에 진입했어.

1